27 장.
“형, 오늘은 뭐할 거야? 아버지 안 만나?”
“진영아, 휴일이잖아. 나는 등산이나 가련다. 이제 비도 그쳤고, 공기도 상쾌해서……. 같이 갈래?”
준영의 등산 제안에 진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나는 약속이 있어. 혼자 갔다 와. 저녁에 늦게 오겠네.”
“아마도. 친구들도 좀 만나고 싶다. 술도 한 잔 하고.”
진영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내 걱정은 말고, 잘 놀다 와. 나는 회사에나 가봐야겠다.”
준영은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다시 진영을 보았다.
“그런데, 쓰레기통은 비웠냐?”
“뭐? 쓰레기통? 아, 그건 아줌마가 날마다 버려.”
준영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가, 그냥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시계를 찾는구나. 아직 마음이 정리가 안 되었나?’
* * *
“여보세요?”
진영은 상대가 전화를 받자, 최준영의 목소리를 흉내냈고, 이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어, 오빠, 이 번호는 뭐지?”
예상대로 선경은 진영의 목소리를 준영으로 착각한 것 같았다.
진영은 일부러 스마트폰이 아닌 회사 전화로 했다.
“어, 회사 전화야.”
선경은 폰에 찍힌 번호를 보면서 약간 의아해했다.
“무슨 회사?”
“여기 아리랑이야. 알지? 친부가 하는 회사.”
선경은 조금 이해가 되었다.
“친부 만나러 간 거야?”
진영은 이제 뭐라 해야하나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밀고 나가기로 했다.
“나한테도 일을 주신다더라. 그렇데 대단히 건 아니고.”
“야, 잘 됐다. 이제 직업이 생긴 거네.”
선경은 진영의 말에 정말로 좋아했다.
“저녁에 만날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취직도 했으니.”
“좋아. 이런 건 당연히 축하해야지. 준영 오빠.”
진영은 전화를 끊은 다음, 오늘 일에 대한 준비를 했다. 먼저 준영의 방으로 들어가 준영의 옷을 꺼내서 입고, 다시 자기 방으로 와서, 서랍을 열었다. 시계가 놓여 있었다. 진영은 시계를 손목에 찬 다음 거울에 비춰보았다. 몇 번 인상을 쓰면서 준영의 얼굴 표정을 따라해 보았다. 준영의 옷이 살짝 컸지만, 그 정도는 문제가 안 되리라 생각이 들었다.
* * *
“얏! 얏!”
여기저기서 아이들의 기합 소리가 울려퍼졌다. 적어도 삼십 명은 넘어 보이는 초등학생들이 흰색 태권도 도복을 갖춰입고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정면에 이윤영이 허리에 검은 띠를 맨 채, 얼굴을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이거 봐라, 이거 봐. 그거 밖에 못 해? 자, 다시 한 번!”
“이얏! 이얏!”
사범의 호통 소리에 초등학생들의 눈빛에 긴장감이 올라오면서, 그 조그만 입들을 벌리고 악이 받쳐라 소리를 지른다.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경례!”
“태권!”
아이들이 사범 이윤영에게 힘차게 거수경례를 하였고, 윤영은 허리를 숙여 아이들에게 인사를 했다.
“이 사범, 수고했어요.”
“예, 관장님도요.”
윤영은 태권도 관장인 서정선과 인사를 나누고, 사범실로 들어갔다. 안에서 같은 사범이자 친구인 최서라가 앉아 있었다.
“윤영아, 너 오늘 기합이 잔뜩 들었다?”
“말도 마. 애들이 빠져 가지고서리…….”
“야, 야, 살살 해라. 아직 애들인데…….”
윤영은 서라의 옆에 철퍼덕 앉았다. 옆에 놓여 있던 종이를 집어들어 부채처럼 얼굴에 부쳐댔다.
“서라야, 너 소개팅 할래?”
도복을 벗다 말고 서라가 돌아보았다.
“소개팅?”
서라의 눈이 반짝거리는 걸 보면서, 윤영은 운을 뗐다.
“응, 괜찮은 남자가 있는데…….”
“누구?”
서라가 윤영의 옆으로 다가왔다.
“우리 오빠.”
“뭐? 네 오빠는 그 있잖아. 정혼자.”
윤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오빠 말고.”
“너 오빠가 또 있었어?”
서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야, 그만 두자.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다. 갑자기 생긴 오빠라니…….”
“뭔데 그래? 어서 말해 봐.”
윤영은 서라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잠시 들여다 보았다.
“외국에 나갔다가 얼마 전에 들어온 오빠가 있어.”
“아니, 안할래.”
서라는 딱 잘라 말했고, 윤영은 기분이 나빠졌다.
“왜?”
“아는 사람 오빠는 부담스러워. 잘 안 되면 서로 서먹서먹해지거든. 난 너하고 그러고 싶지가 않아.”
윤영은 고개를 끄덕거렸고, 속으로 ‘넌 참 좋은 친구야.’ 하고 생각했다.
* * *
아리랑 이현석 회장은 회장실의 자기 자리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고, 그 앞에는 송영구 법무실장이 서 있었다.
“회장님,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영구의 말에 현석은 고개를 들었다.
“그래, 얼마나 필요한가?”
“회장님, 프랜차이즈를 해체하고 전부 직원으로 고용한다면, 계약금을 돌려줘야 합니다. 프랜차이즈 하나당 계약금이 삼천 만 원입니다. 천 개의 가맹점으로 계산하면 삼백 억이 듭니다.”
“으음…….”
“회장님, 현재 회사의 잔고가 백 억이 조금 안 됩니다. 그러니까, 최소한 이백 억은 빌려야 합니다.”
“은행에서 빌리면 안 되나?”
영구는 다시 서류를 들여다 보았다.
“회장님, 프랜차이즈 하나당 직원이 다섯 명이라고 가정을 하겠습니다. 한 직원당 한 달에 이백 만원의 월급을 준다고 하면, 프랜차이즈 하나당 한 달에 천만 원이 듭니다. 천 개의 프랜차이즈, 직원은 5 천 명입니다. 한 달 월급만 다시 백 억원이 필요합니다. 당장 한 달 뒤에 백 억을 월급으로 지급해야 하는데, 이 내막을 안다면, 은행은 아마 안 빌려줄 겁니다.”
“매출을 올려서 월급을 주면 되잖나?”
영구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회장님, 저는 회장님의 이런 생각에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기가 이릅니다. 당장 자금을 돌리기가 힘듭니다. 이러다가 기존의 채무까지 상환하라고 압력이 오면, 회사가 쓰러지는 것은 시간 문젭니다. 아무리 좋은 정책도 때가 맞아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현석은 이제 영구를 똑바로 보았다.
“나는 27 년 만에 아들을 찾았다. 지금이 바로 내가 변할 시기야. 더 이상 가맹점 뜯어 먹고 사는 그런 사업은 안 돼.”
현석은 확고하게 말을 했고, 영구는 이제 어디가서 돈을 구해야 하나 하는 생각 뿐이었다.
“자네는 금융권을 알아 보게. 백 억 정도라도 끌어와 봐.”
“네. 회장님.”
영구는 회장실을 나갔고, 현석은 전화기를 꺼냈다.
“진태? 나 현석이야.”
“오오, 회장님, 어쩐 일이신가?”
전화기 너머에서 손진태의 호들갑스러운 인사가 들여오자, 현석도 그만 웃음이 나왔다.
“하하, 그만 웃기고. 나 지금 심각해.”
“흠, 심각이라. 그럼 심하고 각인데…….”
“손 회장, 나 돈 좀 빌려줘.”
전화기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백 억 정도만 빌려 줘. 아니야. 이백 억이면 더 좋아.”
“여어, 현석이, 자네 무슨 일 있군? 그렇지?”
“저녁에 만날까? 내, 만나서 얘기할께.”
진태와의 저녁 식사 약속을 잡은 현석은 다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돈 문제가 아니라 아들 문제였다. 두 아들. 진영은 그렇다쳐도, 준영에게도 뭔가를 해 주고 싶다. 만 평 정도 땅을 사려면, 다시 얼마가 필요할까? 거기에 건물을 몇 채 올리려면 또 얼마가?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온 인생. 아니, 돈만 보고 달려온 인생. 이제 이 모든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현석은,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준영이 돌아온 것은 하늘의 뜻이다. 난 이것을 받아야 한다. 현석은 다시 마음을 다져 먹었다.
* * *
“선경이 오는구나. 저녁은 먹었냐?”
종환의 물음에 선경은 흐뭇하게 웃었다.
“너, 오늘 좋은 일 있었냐? 엉? 너, 술 먹었구나.”
순화는 선경의 근처에서 코를 킁킁거리더니, 곧 인상을 썼다.
“선생이 술 마시면 되냐? 이 가시내야.”
선경은 순화에게 혀를 낼름거렸다.
“오늘, 나, 누구 만났게?”
혀가 살짝 꼬부라진 선경은 배시시 웃으며 핸드백을 식탁에 놓고, 의자에 앉았다.
“누구?”
순화는 관심도 없다는 투로 대답을 했고, 선경은 다시 혀를 내밀었다.
“엄마, 나 오늘 오빠하고 술 마셨다.”
설거지를 하고 있던 순화의 손이 멈췄다.
거실에 있던 종환마저 이쪽을 보면서 조용해지고 말았다.
“너, 왜 그러냐?”
순화가 조용히 선경에게로 돌아섰다.
“엄마, 그냥 남매가 술 마신 거야. 별 일 아니야.”
“선경아, 이리 와라.”
종환이 부르자 선경은 얼른 소파로 갔다.
“준영이는 어쩌고 있데?”
“아빠, 준영 오빠 취직했데요.”
종환의 얼굴이 환해졌고, 순화도 거실로 나왔다.
“그래? 취직했어? 어디에?”
순화는 속사포처럼 물어보았고, 선경은 다시 웃었다.
“자기 친부 회사.”
종환의 얼굴이 굳어져 갔다.
“아빠, 왜 그래? 오빠가 이제 자기 자리를 찾아가잖아.”
순화가 종환 옆에 앉았다.
“여보.”
“…….”
종환은 가만히 선경을 보았다.
“준영이가 좋아하더냐?”
“응, 아빠. 오빠는 취직해서 좋아하던데.”
“그래. 잘 되었다. 준영이만 좋다면 나도 좋다.”
종환의 나지막한 소리가 거실에 울렸고, 순화의 눈이 촉촉해져갔다.
“아이가 어른이 되면, 놓아주어야 하는 법이지.”
종환은 신문을 접더니, 텔레비젼을 켰다.
“너 이제 씻어라.”
순화의 말에 선경은 소파에서 일어나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여보, 괜찮아요?”
종환은 순화의 말에 고개를 돌리더니, 살짝 웃어보였다.
“이제 준영이도 자기 인생을 살아야지. 결혼도 해야 하고.”
종환은 순화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이제 당신도 그만 걱정해. 다 알아서 잘 할 거야.”
순화는 종환의 어깨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화였다.
* * *
“소희 씨, 여기 너무 어둡지 않아?”
병승은 작은 목소리로 소희에게 말했다.
“왜? 내가 무서워?”
소희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보이자, 병승은 눈에 힘을 주었다.
“내가 왜 소희 씨를 무서워해야 해?”
소희는 병승에게 다가 앉았고, 병승은 살짝 뒤로 물러나다가, 마세라티 왼쪽 뒷문에 등을 부딪쳤다.
“난 왠지 뒷좌석이 좋더라.”
소희의 목소리가 끈끈해졌다.
“소희 씨… 음….”
소희의 손가락이 병승의 입술을 누르자 그만 병승은 온 몸에 짜릿한 느낌을 받았다. 소희의 손가락이 병승의 입술을 살살 문지르기 시작했다.
“소희 씨, 이런 건 남자가 먼저…….”
“웃기지 마.”
소희의 낮지만 날카로운 소리가 들여오자 병승은 그만 얼어붙었다.
“난 여자가 남자한테 먼저 키스하는 상상을 항상 했단 말이야. 지금이 바로…….”
“소희 씨, 키스라니……. 우리는 아직 그런 단계가…….웁!”
소희는 병승의 입술을 자기의 입술로 눌렀고, 병승의 눈은 휘둥그래졌다. 바로 눈 앞 1 센티미터도 안 되는 곳에 소희의 두 눈이 병승을 보고 있었다. 병승은 그 눈에서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구미호의 느낌을 받았고, 온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소희의 입술이 멀어져 갔다.
“음, 그러니까, 남자도 기습 키스를 당하면 덜덜 떠는구나. 뭐, 여자보다 더 하네.”
병승은 이제 완전히 뒷문에 바짝 붙어 있었다.
“소희 씨, 대체 왜?”
“…….”
병승은 소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몸을 앞으로 확 내밀면서 소희의 양 어깨를 잡았다. 소희의 얼굴로 확 다가간 병승은,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소희에게 키스를 했다. 그렇게 둘은 한참 동안 서로의 입술을 탐닉했고, 차 안의 열기는 점점 더해져만 갔다.
“쪽!”
두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병승과 소희는 뒷좌석 등받이에 기댔다.
“후우.”
병승은 숨을 내쉬더니, 소희의 얼굴을 보면서 말을 꺼냈다.
“소희 씨, 왜 남자가 더 떤다고 그랬어?”
소희는 병승의 질문에 요염하게 웃었다.
“그것도 몰라? 여자는 항상 기대하고 있으니까.”
“뭐를?”
“키스.”
“헐!”
병승은 소희의 말에 기가찼지만, 그래도 소희와의 첫 키스는 너무나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조금만 더 할까?”
“병승 씨. 오늘은 여기서 그만.”
“왜?”
“몰라서 물어? 남자는 끝을 모르는 동물이니까. 그래서 안 돼.”
소희는 단호히 말했고, 병승은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