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장.
호텔 로비에서 혜정은 폰을 꺼내들었다. 이진영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진영 씨?”
“혜정 씨, 잘 잤어?”
“잠이야 잘 잤지만……. 메모 한 장 달랑 남겨두고 그냥 가 버려? 남자가…….”
“미안, 미안. 그게 말이야…….”
“됐어요. 진영 씨. 남자들 핑계는 잘 아니까 됐고, 오늘은 뭐할 거야?”
진영은 전화를 들고 생각에 잠겼다. 혜정이는 전혀 모르는구나. 내 생각대로 모든 게 잘 된 것 같은데…….
“오늘 저녁에 식사할까?”
“아니. 나 오늘은 회사에서 일이 많아. 아버지하고도 얘기할 것도 많고.”
“그럼 내일 볼까?”
진영은 최대한 혜정에게 잘 대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좋아. 내일 전화해.”
혜정은 전화를 끊은 다음, 호텔 프런트에 가서 택시를 불러달라고 했다.
호텔 밖에서는 가을비가 주륵주륵 내리고 있었다.
* * *
폰을 주머니에 넣은 진영은 소파에 앉아 있는 준영을 보았다. 준영의 얼굴이 심각하다.
“형, 왜 그래? 다 잘 됐잖아.”
준영은 한숨을 쉰 다음, 눈을 감아버렸다.
“형, 당분간 비밀이야.”
준영은 눈을 확 뜬 다음, 진영을 쏘아보았다.
“하란대로 하긴 했는데……. 이게 과연 얼마나 갈까? 일 주일, 한 달…….”
“형, 잘 들어. 형은 내가 선경 씨와 잘 되기를 도와주면 돼.”
“그 다음은?”
“내가 혜정 씨를 적당히 정리할 거야. 그때 형이 들어가는 거지.”
준영은 점점 질린 얼굴이 되어갔다.
“그래서?”
“형이 혜정 씨를 구워 삶든, 찜쪄먹든 그건 맘이고.”
“야, 혜정 씨는 너하고 잤다고 알고 있잖아. 그런 여자가 그 형하고 사귄다고? 그게 말이 돼?”
“형, 그때는 진실을 밝혀야지. 그래야 혜정 씨가 홀가분하게 형하고 만날 거 아냐. 안 그래? 난 전에도 안했지만, 앞으로도 혜정 씨하고는 선만 유지할 거야. 그래야 하고. 그럼 된 거잖아.”
“혜정 씨가 만약 노골적으로 유혹하면?”
“형,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여자……. 질리게 하는 거, 아주 쉬워.”
진영은 외출 준비를 하러 방으러 들어갔고, 준영은 멍하니 천장만 쳐다 보았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진영은 아직도 소파에 그대로 앉아 있는 준영을 보았다.
“형, 이제 그거 버려도 되지 않아?”
“뭐?”
“시계 말이야.”
준영은 선경이 선물로 준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계의 투명한 유리창에 선경의 얼굴이 나타나더니, 곧 그 얼굴은 손혜정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지난 밤 어둠 속에서 보았던 손혜정의 모습이었다. 준영은 머리를 흔들었다. 이윽고 마음을 먹은 준영은 손목에서 시계를 끌러서, 쓰레기통에 넣었다.
‘이제 이걸로 정해졌다.’
준영의 모습을 진영은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형은 안 나갈 거야?”
준영은 다시 한 번 쓰레기통의 시계를 바라보더니, 욕실로 향했다.
준영이 욕실 문을 닫자, 진영은 쓰레기통의 시계를 집어들었다.
* * *
가을 비가 내리는 토요일 아침.
“윤영아, 얘기 좀 할까?”
현석은 윤영을 불러서 자기 옆에 앉으라고 했다.
“너 말이야. 혹시 주변에 여자친구들 있지?”
“아니, 아빠, 대체 나를 뭘로 보고 그런 말을…….”
“왜? 내 말이 어때서?”
“왜 내가 여자친구들이 있어냐 하나고요?”
“너, 또 시작이구나.”
미현이 어느새 다가와 탁자에 과일 접시를 놓았다.
“엄마, 나는 남자에게만 관심이 있다우. 그리고 그게 정상이잖아.”
“웃기지 마라. 너같은 태권도 유단자한테 누가 따라붙겠냐?”
현석이 코웃음을 치자, 윤영의 얼굴에 분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네, 아빠, 왜 여자친구 이야기를 꺼냈어요?”
현석은 사과 한 개를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생각을 해보니, 진영이는 혜정이가 있는데, 준영이는 아무도 없다 이거다.”
“나보고 준영 오빠 선 자리 알아보라고?”
미현은 윤영에게 사과를 내밀었다.
“얘는……. 무슨 선이야? 소개를 해달란 거지.”
미현의 말은 부드러웠다.
“글쎄, 알아야 보겠지만, 내 친구들은 거의 다 운동하는 애들이라서…….”
“어쩌면 준영이하고 잘 맞을지도 모른다. 준영이도 운동 잘 하잖아.”
현석도 윤영에게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했다.
윤영은 혀를 내밀었다.
“그건 운동이 아니고 싸움이라네요. 그리고 여자들은 그거 안 좋아해요.”
* * *
점심 식사가 끝난 종환과 순화 그리고 선경은 부슬부슬 내리는 가을비를 보면서 빌라 거실에 앉아 있었다.
“엄마, 오늘따라 비가 슬퍼보여요.”
“너, 가을 타는구나.”
“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가슴이 뻥 뚫린 거 같애.”
종환이 선경을 쳐다보았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냐?”
“아빠, 이제 준영 오빠는 원래 자기 집으로 들어가겠지요?”
종환과 순화의 표정이 변했다.
“그건 모르지. 그렇지만 준영은 호적상 우리 식구야.”
종환은 조용히 말했고, 순화는 고개만 끄덕였다.
“준영을 키운 사람은 우리다. 우리가 준영의 부모야.”
종환은 선경에게 다짐을 하듯이 말했다.
“아빠, 나는 준영 오빠가 좋아.”
순화가 선경에게 다가앉았다.
“선경아, 너 이상한 생각하지 마라. 그건 안된다.”
순화가 딱 잘라 말했으나, 선경의 얼굴은 그렇지가 않았다.
“준영 오빠가, 다시 이준영이 되면…….”
“너 지금 무슨 말 하는 거냐?”
종환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아빠, 엄밀히 말하면 준영 오빠와 나는 친남매가 아니잖아.”
순화의 얼굴이 완전히 질린 표정이 되었다.
“선경아, 잘 들어라. 어릴 때부터 같이 살았으니, 친남매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종환의 말에 선경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선경의 머리 속에는 옛날의 약속이 다시 떠올랐다. 절대 헤어지지 말자는 그 약속.
* * *
“소희 씨, 여기에요.”
병승은 의자에서 일어나며 손을 흔들었다. 커피숍 문을 열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접으면서 김소희가 안으로 들어섰다.
“비가 많이 오지.”
“그래, 비가 많이 와.”
“왠지 오늘은 기분이 묘한 걸.”
병승은 비가 와서 그런지 괜스레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소희 씨, 그런데 레프트는 주로 뭘 추구해? 아니 뭘로 돈을 벌지?”
“우린 돈 안 벌어. 각자 자기 일은 따로 있어.”
병승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럼 소희 씨는 직업이 뭐야?”
소희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더니, 다시 살짝 웃었다. 그런 표정의 변화가 병승의 가슴을 더 뛰게 만들었다.
“아직도 그걸 몰랐구나. 내가 말해준 적이 없었지.”
병승은 고개를 끄덕끄덕했고, 소희는 핸드백에서 명함 상자를 꺼냈다. 그런데 이번 상자는 그냥 평범한 검은 플라스틱 상자였다.
병승은 소희가 건네주는 명함을 받았다.
“어, 기자였어?”
“그래. 우리 회사, 꽤 알려져 있지.”
병승은 포털 사이트에서 보던 그 회사 이름을 보자, 새삼스레 소희가 다르게 보였다.
“난, 정규직 기자는 아니고, 프리랜서 기자야. 지금은 여기랑 계약 중이고.”
“오, 그래? 주로 뭘 쓰는데?”
소희의 눈이 반짝거렸다. 드디어 자신의 주 전공이 나온 것이다.
“나는 주로 미래 사회의 트렌드에 대해서 기사를 써.”
병승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흥미로운 눈초리로 소희를 보았다.
“미래 사회의 모습이라던지, 예를 들면 자원 배분, 에너지 문제 그리고 지구 온난화 문제 등등, 그런 걸 써.”
“그럼 지금 현재 우리 인류의 가장 큰 문제는 뭐야? 지구 온난화?”
소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눈을 크게 뜨고 병승을 보았다.
“아무래도 가장 큰 문제는 돈 문제지.”
“뭐야? 그런 말은 나도 하겠다.”
병승은 실망스런 표정으로 말을 했으나, 소희는 더욱 진지해졌다.
“병승 씨, 이거 알아? 로마가 어떻게 그렇게 커졌는지? 그건 바로 노예 때문이었어. 미국이 어떻게 그렇게 단기간에 성장했는지 알아? 바로 흑인 노예 덕분이었어.”
병승은 잠자코 있었고, 소희는 더욱 열을 올렸다.
“병승 씨, 노예는 말이야. 돈이 안 들어. 그리고 노예는 계속 일을 해. 알겠어? 공짜로 일을 시킨단 말이야. 얼마나 많은 이윤이 남을지 상상이나 해봤어?”
병승은 그래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병승 씨, 지금도 우리는 노예제 사회에 살고 있어. 죽지 않을 만큼만 받으면서 계속 일만 하지. 그러다 쓸모가 없다 싶어지면, 버려져.”
병승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