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장.
“혜정 씨, 괜찮은 거지?”
진영은 혜정을 부축한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호텔의 최상층에 있는 스위트룸으로 가는 복도에 놓여 있던 소파에 혜정을 앉힌 진영은 숨을 한 번 골랐다.
혜정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더니,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진영은 카드키를 꺼내서, 룸 번호를 확인했다.
“혜정 씨,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 다 왔어.”
“으음……. 진영 씨, 나는 괜찮아.”
진영은 혜정을 다시 부축하여 몇 걸음을 걸었고, 이내 호텔 룸 앞에 왔다. 카드키로 문을 열고, 진영은 혜정을 안아들다시피한 채 침실로 들어가, 킹 사이즈의 침대에 혜정을 눕혔다. 혜정의 몸 밑에서 핑크색 원피스가 아무렇게나 구겨졌다. 진영은 혜정의 구두를 벗긴 다음, 바닥에 놓았다.
“휴, 이제 좀 낫군.”
진영은 혜정의 허리 밑에 손을 넣어 혜정을 침대의 가운데로 옮겨 주었다. 이불이 혜정의 몸 아래에 깔려 있었다. 진영은 이불을 당겨서 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혜정의 몸이 잠시 꿈틀거리더니,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잘 자. 혜정 씨.”
“음……. 지……. 여…….”
술이 과했는지 혜정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방안에 술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거실로 나온 진영은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카드키 홀더에 집어 넣었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호텔 스위트 룸 전체에 은은한 조명이 들어왔다. 진영은 거실만 남겨두고, 나머지 조명 스위치를 전부 껐다. 이제 혜정이 자는 침실은 커튼이 쳐져 있어서, 거리의 간판 조명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진영은 살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 진영의 전화가 울렸다.
“형, 나야. 어디까지 왔어? ……. 그래. 로비. 내가 갈께.”
진영은 다시 엘리베이터를 불렀다.
준영은 호텔 로비의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줄지어 있는 공간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잠시 후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진영이 나왔다.
“형, 저기로 가지.”
진영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1 층 바를 가리켰고, 준영은 선선히 진영을 따라갔다.
“위스키 두 잔.”
둘의 앞에 잔이 놓이자, 진영은 서둘러 술을 마셨다. 독한 술이 목을 넘어가자 인상을 찌푸린 진영은 준영의 어깨를 턱 짚었다.
“형,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야 해. 인생이 걸린 거야.”
준영은 진영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형, 아버지가 뭐라 하셔?”
준영은 진영의 질문에 어리둥절했다. 이건 그리 심각한 내용도 아닌데.
“나보고 농사지으라더라.”
“핫핫핫!”
진영은 그만 웃어젖히더니, 이제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역시 아버지다워. 농사라…….”
“농사가 어때서 그러냐? 난 좋더라.”
준영은 자기 앞에 놓인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뭔데 이렇게 뜸을 들이냐? 빨리 말해.”
준영의 재촉에 진영의 얼굴이 바짝 긴장을 하더니, 혀로 입술을 핥았다.
“형, 잘 들어. 이거 큰 일이거든.”
“…….”
“지금 손혜정이 이 호텔 스위트룸에 혼자 자고 있어.”
“뭐?”
“형, 나는 그 여자가 싫어. 그건 형도 알지. 난 그런 식으로 여자한테 쥐어 살고 싶지는 않단 말이야.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여자야. 손혜정은…….”
진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천장을 보았다.
“형, 나는 선경이가 좋아.”
“뭐라고?”
준영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눈치를 못 챈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진영이 나올 줄은 예상 밖이었다.
“선경이……. 선경이……. 형을 좋아하지?”
준영의 얼굴이 바짝 긴장했다. 주먹을 꼭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려고 한다.
“형, 우리 현실적이 되자.”
“너, 대체 무슨 생각이냐?”
진영은 반쯤 남아있던 위스키를 마시더니, 웨이터를 불렀다.
“여기 한 잔 더.”
“그만 마셔라.”
“형, 이건 맨정신으론 못 해. 형도 마셔. 그래야…….”
진영은 술잔을 들어 준영에게 권했고, 준영은 받아마셨다.
“한 잔 더 드릴까요?”
웨이터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준영은 고개만 끄덕했다.
위스키가 두 잔 다시 나오자, 진영은 그 두 잔을 들고, 바의 안쪽 자리를 가리켰다. 둘은 스탠드에서 일어나, 안쪽으로 옮겼다.
“자, 이제 아무도 없으니, 속마음을 털어라.”
“손혜정이 자고 있는 방으로 형이 들어가. 그럼 돼.”
준영은 눈을 부릅뜬 채, 진영을 바라보았다. 정말 제정신이 아닌 녀석이 분명했다.
“형, 나는 선경이랑 결혼하고 싶어. 혜정씨는 형이 결혼해. 그럼 둘 다 행복할 거야.”
준영은 벌컥 위스키를 마셔버렸다. 술기운이 몸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슬슬 이성이 마비되려 하고 있었다.
“나하고 형은 똑같은 사람이야. 혜정씨도 오히려 더 나을 걸. 내가 자기를 싫어한다는 걸 아주 잘 아니까. 혜정씨도 나를 싫어해. 자기 아버지가 억지로 우겨서 결혼하는 것 뿐이야. 나는 그 여자가 무서워. 솔직히 무서워.”
진영의 고개가 아래로 떨구어졌다.
“선경이가 형을 좋아하잖아. 형한테 여자가 생기면…….”
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서히 진영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형도 혜정 씨한테 관심있잖아. 내가 모를 줄 알고…….”
준영은 진영의 말에 그만 머리속에서 마지막 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손혜정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준영은 그 분위기에 빠져들고 말았었다. 준영의 눈앞에, 혜정을 처음 본 날, 혜정이 룸살롱 문을 열고 들어오던 그 순간이 생생히 떠올랐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던 준영은 가끔씩 그 순간을 떠올리곤 했다.
“형이 태화 투신 후계자가 되는 거야.”
진영의 속삭임은 마치 악마의 유혹처럼, 준영의 뇌리에 파고 들었고, 준영은 그 순간 자신도 철저히 악마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이야.
“참, 형, 이거.”
“뭐냐?”
“새벽에 혼자 먼저 나와야 해. 그리고 침대 옆 탁자에 이걸 놔 둬.”
진영은 준영에게 호텔 메모지를 내밀었고, 준영은 그걸 받아 넣었다.
* * *
“어이, 달링!”
“아이, 이이가…….”
진태는 정화를 보며 눈짓을 하더니, 거실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시계를 보았다.
“어째 혜정이가 안 오네.”
“아까 진영이와 함께 있다고 전화왔어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진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아직 그 정도는 아닌 줄 알았는데……. 진영이가 정신차렸나?”
“아빠, 뭘 걱정하세요? 누나가 놀러 다닌 게 어디 한 두번이에요? 뭐든지 자기 맘대로…….”
병승의 투덜거림을 뒤로 하고, 진태는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 * *
“아빠…….”
“엄마…….”
“선경아…….”
준영은 조용히 세 사람을 불러보았다. 세 명은 식탁에 오붓이 앉아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다들 입가에 웃음이 서려있다. 선경의 옆 자리, 빈 의자가 준영의 눈에 들어왔다. 그래, 저기가 내 자리야. 준영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진영이 준 메모지를 살짝 더듬어 보았다. 그래 여기까지 왔어. 내 선택이 아니야. 태어난 것도, 버려진 것도, 다시 만난 것도, 여자도……. 여자. 절대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 여자. 그 여자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 어디까지 가나 해 보자.
준영은 스위트 룸 문에 카드키를 댔다. 찰칵 소리가 나자, 준영은 문을 밀었고, 문은 천국으로 가는 길처럼 밝은 빛을 내뿜으며 열렸다. 거실등이 켜져 있었다. 준영은 벽의 키홀더에 꽂혀 있던 진영의 명함을 꺼내고, 거기에 손에 들고 있는 카드키를 집어 넣었다.
홀로 외로이 켜져 있는 거실등을 보면서, 준영은 망설였다.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어. 그러나 다시 종환과 순화 그리고 선경이 생각났다. 아버지가 날마다 출근하는 구청이 생각났다. 후줄그레한 양복을 걸친 종환이 힘빠진 걸음걸이로 터벅터벅 골목을 걸어 집으로 오는 모습이 생각났다.
준영은 고개를 흔들어 이 모든 것들을 지워버리고, 호텔 룸 안으로 들어갔다.
* * *
혜정은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머리가 멍했다. 눈을 몇 번 깜박거린 혜정에게 낯설은 천장이 눈에 띄었다. 여기가 어딜까? 술에 취한 여자들은 항상 이런 식으로 잠을 깨더라. 풋! 혜정은 자신에게 웃음이 나왔다. 가볍고 보드라운 하얀 이불을 덮은 채 혼자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을 깨달은 혜정은,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이제 이불을 들추고 몸을 볼 차례인가? 혜정은 이불을 들추었고, 역시 예상대로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은 자신의 나신을 발견했다. 손을 아래로 내려 다리 사이를 만져본 혜정은, 손가락에 닿는 이상한 감촉을 느끼자, 지난 밤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래, 한 거야. 진영 씨하고.
혜정은 이걸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기분나빠 해야 할지 몰랐지만, 어쨌든 자기가 자초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관없잖아. 결혼할 건데. 골치 아픈 것은 딱 질색인 혜정은 마음 편히 생각하기로 했다. 이 다음 남자들은 어떻게 행동하더라? 심리학 시간에 좀 더 배워둘 걸…….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키자,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원피스와 그 위에 있는 속옷들이 보였다. 하여간, 남자들이란……. 옷 좀 잘 개놓던지, 아니면 걸어두던지…….
침대 옆 협탁 위에 메모지가 절반으로 접혀져 있었다.
‘일이 있어서 먼저 갈께. 즐거웠어.’
혜정은 메모를 두 번 읽었다. 이름은 없었지만, 진영의 글씨가 분명했다. 메모를 구겨 휴지통에 던진 혜정은 기지개를 켜면서 온 몸을 쭉 폈다. 다리 사이가 은근히 아려왔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이제 샤워를 할 차례인가?”
혜정은 텔레비젼을 틀어 뉴스 채널로 돌린 다음,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욕실로 들어갔다.
‘당분간 술을 먹으면 안 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