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장.
“선경아, 너 말이야, 선 한 번 볼래?”
종환이 신문을 접어서 소파의 어깨에 걸쳐 놓았다.
옆에서 사과를 먹고 있던 선경은 아버지 종환을 보더니, 싱긋 웃었다.
“어디 좋은 남자 있어요?”
“우리 구청에 괜찮은 직원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선경은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에이, 난 공무원은 싫은데…….”
“왜? 공무원이 어때서?”
주방에서 순화의 소리가 들렸다.
“엄마, 난 그냥 회사원이 좋아요. 어디 얽매여 있는 건 싫어요.”
“허허, 그것 참…….”
“얘는……. 아빠도 공무원인데 어때서 그러냐?”
순화가 선경에게 다가오면서, 핀잔을 주었다.
“엄마, 그리고 나 아직 스물 넷 밖에 안 됐어요. 무슨 선을 본다고 그래요?”
선경은 샐쭉해졌다.
“야, 말도 마라. 요새 그러다 삼십 넘기는 거 시간 문제다.”
순화의 말에도 불구하고, 선경은 다시는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한 삼 년 있다가 본다면 몰라도…….”
“뭐?”
종환은 혀를 쯧쯧 찼다.
“아빠, 그리고 준영 오빠도 아직 안 했잖아. 그건 왜 생각 안 해?”
“너하고 오빠하고 같냐? 어째 생각하는 것이 그러냐?”
순화는 이제 선경의 옆에 털석 앉았다.
“어쨌든 난 싫어요.”
종환과 순화는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고, 선경은 사과를 입에 넣다 말고 생각에 빠져 들었다.
* * *
“오빠, 앞으로 어떡할 거야?”
“나도 모르겠다.”
“오빠, 집 나갈 거야?”
“그것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안 갈 거야?”
준영은 한숨을 쉬었다.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대체 누구이길래 나를 입양 보냈을까? 하는 생각이 하루 종일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그래서 나를 버렸을까? 아니면 무슨 힘든 일이 있었을까? 준영은 자기의 재혼에 아이가 거추장스러워 보육원에 맡기는 젊은 부모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 생각이 났다. 내 부모도 그랬을까? 내가 거추장스러웠을까? 나는 누구일까?
“오빠, 우리 헤어져?”
준영은 선경을 꼬옥 안았다. 준영의 품 안에서 선경은 눈을 감았다.
“아니. 절대 안 헤어져. 걱정마.”
* * *
“여기야, 여기”
진영은 호텔 커피숍으로 들어오는 손혜정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혜정은 오늘따라 화사한 차림을 하고 왔다.
“원피스 예쁘네.”
혜정은 핑크색 원피스 자락을 살짝 걷은 다음, 커피숍의 앤틱 의자에 다소곳이 앉았다. 하얀 스타킹을 신은 다리 아래로 하얀 구두가 돋보였다.
“진영 씨, 오늘 왠일이에요? 데이트 신청을 다 하고…….”
“하하, 그동안 내가 좀 무심해서…….”
혜정은 진영의 분위기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혜정 씨, 술 한 잔 할까?”
“좋아요. 그런데 우선 커피 한 잔 한 다음에.”
진영은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렀다.
“호호호, 진영 씨도 알고 보면 재밌는 사람이에요. 꺽… 왜 내가 그걸 몰랐지…….”
“그래가지고, 결국 그 사람은 못 죽었어.”
“난……. 그런데 그 사람 성격이 너무 못됐어.”
“그래도 오베라는 그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데……. 그 이웃집 아줌마를 도와주잖아.”
진영과 혜정은 [오베라는 남자]라는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진영은 남자가 세상을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그리고 그 남자가 얼마나 자기 부인을 사랑했는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혜정은 오베라는 남자의 그 까칠한 성격에 치를 떨면서 진영의 이야기를 들었다.
“진영 씨, 결국 오베도 여자가 유혹한 거잖아요. 그 부인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서……. 꺽….”
혜정은 슬슬 술이 올라오면서 자꾸 딸국질이 났다.
“혜정 씨, 손 줘 봐.”
“왜?”
진영은 혜정의 손을 당겨, 손바닥 한가운데를 검지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아아, 아파.”
혜정이 손을 빼려하자, 진영을 더욱 꽉 잡고 손바닥 가운데를 눌렀다.
“이러면, 체한 게 내려간데.”
“나, 안 체했어.”
“아니, 자꾸 딸국질하길래…….”
혜정은 다시 손을 빼려했으나, 진영은 혜정의 손을 잡은 채 가만히 있었다. 손바닥 한가운데를 누르던 손가락으로 이번에는 손바닥을 살살 간지럽힌다.
혜정의 어깨가 움찔움찔했다. 그녀의 눈빛이 촉촉해졌다.
“난 이 호텔이 좋더라.”
혜정은 진영의 말을 알아들었다. 드디어 이 남자가 마음을 정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할 남자가 유혹한다면, 넘어가 주는 것이 결혼할 여자의 의무, 아니 의무까지는 아니어도,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혜정은 살그머니 손을 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영의 눈이 커졌다.
“왜?”
“진영 씨, 여자가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일어나면, 묻지 않는 것이 남자의 매너에요. 알겠지요? 앞으로 그렇게 하세요. 꺽….”
혜정은 살짝 풀린 다리로 레스토랑을 나갔다.
진영이 뒷모습을 보니, 화장실로 가는 혜정의 모습이 보였다.
‘후후.’
진영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여기요. 소주 두 병 더 주세요.”
* * *
“여보, 아까부터 뭘 그리 생각하세요?”
정화는 거실에 혼자 있는 진태가 텔레비젼 채널만 이리저리 돌리고 있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 그게 말이야.”
진태는 후 하고 숨을 내쉬더니, 정화에게 손짓을 했다.
“당신 이리 와 봐.”
정화는 허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진태의 옆에 앉았다.
“음, 요염하군. 나이를 안 먹나 보네.”
“뭐요? 호호, 아이 좋아라.”
정화는 기분이 들떠서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진태는 정화의 허리를 슬쩍 찔렀고, 그러자 정화의 몸이 꿈틀거렸다.
“여보, 이제 기분이 업됐으니, 내가 얘기 하나 할께.”
정화는 진태의 얼굴을 보더니, 금방 긴장된 표정이 되었다. 이 남자가 하는 수법을 이제는 잘 알고 있는 정화이다. 분명히 엄청난 반전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혜정이 말이야…….”
정화의 얼굴이 바짝 긴장했다.
“진영이에서 준영이로 신랑을 바꿀까?”
정화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천둥벼락이 내리친 것만 같았다. 이 남자가 미쳤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보! 당신 미쳤어?”
“아니.”
“아니, 신랑을 바꾼다는 게 말이 돼?”
정화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주방에서 일하던 가정부들까지 깜짝 놀라 설거지를 멈추었다.
“왜 그래? 좀 조용히 해.”
진태는 입에 손가락을 댔다.
정화는 홱 돌아앉았다. 그리고 그런 정화의 어깨를 진태는 살살 주무르기 시작했다.
“여보, 잊어 버려. 내가 잠시 미쳤나 봐.”
정화는 다시 돌아앉아 진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진영이가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뭐에요?”
“내가 준영이를 만났거든.”
정화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뭐요?”
“만나보니까, 형제가 너무 달라. 어쩌면 혜정이한테 준영이가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보, 그건 말도 안 돼요.”
정화는 딱 잘라 말했고, 진태는 입맛만 다셨다.
“알았어. 이제 그 얘기는 다시 안 할께.”
딩동!
“병승이 오는 모양이네.”
주방 아줌마가 달려가 문을 열어주자, 병승이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정화는 병승의 가방을 들며, “저녁은 먹었니?” 하고 물었고, 병승은, “네, 소희와 먹었어요.” 라고 답했다.
“너, 요새 여자한테 너무 열 올린다.”
진태가 충고를 했으나, 정화는 오히려 더 좋아했다.
“병승아, 그 소희라는 아가씨, 나도 맘에 들더라. 잘 만나고 있지?”
“예.”
그러나 병승의 목소리를 점점 기어들어갔고, 진태는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너, 소희에게 맨날 당하고 있구나?”
병승은 진태의 옆에 철퍼덕 앉더니, 하소연을 시작했다.
“아빠, 난 여자의 속을 모르겠어요. 좋았다가 나빴다가, 신났다가 삐졌다가, 이거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할지…….”
“으하하하.”
진태의 커다란 웃음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너, 아주 제대로 만났구나. 이제 태화 투신을 운영할 준비가 된 것 같다.”
“네?”
병승의 눈이 동그래지자, 진태는 아들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여자의 그런 면을 요리할 수만 있다면, 회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알겠지? 아들.”
그러나 병승의 눈에는 온통 의심만 남아 있었다.
“병승아, 여자는 말이야. 말과 행동이 일치할 수가 없는 동물이거든.”
“뭐요?”
옆에서 정화의 발끈한 소리가 날아왔다.
“그리고 그 말과 행동도 거의……. 한 구십 퍼센트는 거짓이야.”
“뭐요? 이이가…….. 정말…….”
정화는 양손을 허리춤에 올렸다.
그러나 진태는 정화에 대하여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줄 아는 능력. 회사 사장이 가져야 할 필수 요소다.”
병승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아빠,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돼요?”
진태는 빙그레 웃었다.
“네 맘대로 하세요.”
진태의 뜻밖의 대답에 정화와 병승, 둘 다 깜짝 놀랐다.
“병승아,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려무나. 널 좋아하는 여자라면 스스로 들어온다. 기다림의 미학이지. 절대 여자는 끌어당긴다고 오는 존재가 아니야. 자기가 들어오겠다고 마음먹을 때까지 기다려.”
“아빠, 그러다 놓치면?”
진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네 여자가 아닌 거지.”
병승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야, 이런 날 뭐하냐? 술이나 한 잔 하자.”
진태는 병승을 재촉해 서재로 들어갔다. 말이 서재이지, 실은 미니 바였다.
“당신도 들어와.”
정화는 이십 년도 넘게 살아온 남자의 속을 아직까지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 * *
“먼저 땅부터 구매를 하자.”
“예. 회장님.”
현석은 준영의 대답을 듣자마자, 도면에서 고개를 들었다.
“준영아, 이제 아버지라고 해도 되지 않겠냐?”
준영은 현석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알았다. 마저 이걸 끝나자.”
“예.”
준영과 현석은 다시 도면으로 눈을 돌렸다.
“이백 평 정도의 대지 위에 건물을 올리는군요. 층 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대략 십 층 이상은 되야하고……. 집도 한 채, 아니 두 채 정도 필요하고…….”
“아니야. 집은 한 채라도 되지만, 대신 기숙사 건물이 있어야해.”
“아, 그렇군요. 그리고 부대시설 들어갈 자리, 정수장, 쓰레기 처리장 등등.”
“천 평은 있어야겠지.”
준영은 도면에서 고개를 들고 현석을 보았다.
“이건 아직 아무도 시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본 설계는 다 나와 있단다. 외국에서는 벌써 하는 데가 있지. 내가 이걸 해보고 싶다.”
“여기서 만들어진 농작물들을 아리랑에 공급한다 이거네요.”
“그래. 정말로 오염이 안된 식자재들로만 음식을 만드는 거야.”
“그런데, 아버지…….”
준영은 자신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아버지라는 단어가 나오자 흠칫 놀랐고, 현석은 슬쩍 웃었다.
“그래, 말해라.”
“아니요.”
“뭔데 그러냐?”
“이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해서 작물이 자랄까요?’
현석의 눈에도 고민이 떠올랐다.
“아마 처음 몇 년은 실패할 거야. 생산도 안 되고, 아마 다 썩어 들어갈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이걸 하고 싶다. 미래를 보고 하는 거야. 그리고 이걸 네가 해주기를 바란다. 아들아.”
현석과 준영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러나 둘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리리링!
“전화가…….”
준영의 전화가 울리자, 현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장실 자기 의자로 가서 앉았고, 준영은 입을 가리고 전화를 받았다.
“진영아, 왜?”
“어, 형…….”
“너 술 마셨구나.”
“형……. 여기 XXX 호텔이야. 4 층 중식당. 알지?”
“알기야 알지만……. 무슨 일이야?”
“형, 나 좀 데리러 와라.”
준영은 알았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현석이 쳐다보자, 준영은 진영이라고 말했다.
“그럼 어서 가봐라. 이 얘기는 아직도 더 해야 하니까.”
“예. 아버지.”
준영은 회장실을 나갔고, 현석은 그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