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장.
“어? 형? 아침부터 무슨 일 있어?”
준영이 베란다에서 양복의 먼지를 정성스럽게 터는 것을, 진영이 거실에서 보고 있었다.
“어, 이거. 오늘 누구 좀 만나려고.”
“취직하게? 면접 봐?”
준영은 손진태 태화 투신 회장과 만난다는 말은 안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해.”
진영은 준영이 제대로 말을 안 해주자,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왜 그래? 말해 봐.”
“나중에. 지금은 나, 나가야 돼. 참, 오늘 목요일이잖아. 안 나가냐?”
“나가야 돼. 그럼 저녁에 보자.”
* * *
“어서 와.”
준영은 비서의 안내를 받아 태화 투신 회장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거기 앉아.”
진태는 소파에 앉은 준영의 반대편에 앉더니, 싱긋 웃어보였다.
“낮술 한 잔 할까?”
미리 준비한 것이 분명했다. 진태는 소파 가운데의 탁자 밑에서 소주병과 잔 두 개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양복 안주머니에서 비닐에 싸여 있는 뭔가를 끄집어 내었다.
“안주는 오징어라네.”
준영은 탁자에 툭 던져진 오징어를 보았다.
“뜯어.”
진태는 두 잔에 소주를 따르더니 그 중 한 잔을 준영에게 주었다.
“자, 한 잔 마시자.”
진태는 커 하는 소리와 함께 소주를 한 번에 마셔버리더니, 준영이 뜯어 놓은 비닐 속 오징어 다리 한 개를 부욱 찢었다. 그걸 입에 넣더니 우물우물 씹어댄다.
‘나를 시험하는구나.’
준영도 질세라 소주를 마신 다음, 다른 다리 하나를 뜯었다.
“이봐, 준영이. 자네가 현석이 아들이라며?”
‘혜정 씨가 말했구나.’
“그러면 아리랑을 물려 받을 수도 있겠네? 안 그래?”
준영은 뜯고 있던 다리를 내려놓았다.
“아닙니다. 그건 진영이가 받을 겁니다.”
“확실한 거야?”
“그렇습니다.”
진태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소주를 다시 잔에 부었다.
“술이 들어가면, 비밀이 밀려 나온다는 말, 들어 봤지?”
준영은 다시 채워진 소주를 마셨다.
“아니요. 가방끈이 짧아서…….”
“하하하.”
진태가 갑작스레 웃어버리자, 준영은 더더욱 진태에 대한 의심이 깊어졌다.
‘왜 나를 불렀을까?’
“나는 누가 아리랑을 물려받든 상관 안 해. 그건 그 집 문제니까. 단지 내 관심은 내 딸 혜정이의 남편이 누가 될 것인가 하는 거야. 알아듣겠어?”
말을 마친 진태의 눈동자에서, 준영의 생각을 탐색하는 듯한 빛이 감돌았다.
준영은 진태의 그 눈길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딱 한 번 보았던 사채업 회장의 눈빛과도 비슷해 보였다.
‘이 사람은 무섭다.’
“준영아, 자네는 돈 벌고 싶지 않나?”
준영은 마음을 정했다. 일단 부딪쳐 보자는 심산이었다.
“벌고 싶습니다. 이왕이면 재벌도 되고 싶습니다.”
“하하, 그래야지. 자고로 남자가 인생에서 그런 욕심도 가져봐야지, 안 그래?”
“그렇습니다.”
진태는 다시 소주잔을 채웠다.
술이란 참 이상한 음식이다. 평소대로 마신다면, 소주 두 세 병도 너끈히 먹어치우는 준영이었지만, 아침도 안 먹은 데다가, 더구나 거물 앞에서 마신다고 생각하니, 너무 긴장을 했고, 그래서인지 준영은 소주 두 잔 째에 벌써 머리가 흔들흔들거렸다.
‘저걸 마시면……. 잘못하면 실수한다.’
진태는 다시 준영 앞으로 잔을 밀어주었다.
“힘들면 안 마셔도 된다.”
그러나 준영은 다시 석 잔 째의 소주를 한 번에 마셔버렸다. 술이 목을 넘어가서 위로 들어가는 것이 느껴지자, 뱃속에서 싸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오징어가 두 마리로 보이려고 하자, 준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준영아, 혹시 내가 도와줄 거라도 있으면 언제라도 말해라.”
“알겠습니다.”
진태는 바닥을 보이는 소주병을 들더니, 병째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 하면서 마지막 잔을 마신 진태는 오징어 몸통을 잡더니 반으로 찢었다.
“요건 마요네즈에 찍어 먹으면 맛있는데…….”
* * *
“여보, 당신이 이 시간에 무슨 전화에요?”
미현은 현석이 점심 시간도 되기 전에 집으로 전화를 하자 놀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실은 준영이 문제야.”
“예? 무슨 일 있어요?”
미현은 준영이 말만 나오면 심장부터 벌렁거렸다. 지난 번 호텔에서 한 번 본 이후로, 아직 준영을 더 본 적이 없는 미현으로서는 그저 야속할 따름이었다. '내 손으로 안 키워서 정이 없나?' 하는 생각이 요새 부쩍 든 미현은 매사에 안절부절하는 습관이 생겼다.
“준영이를 말이야. 시골로 보낼까 하는데…….”
“예?”
미현은 현석의 말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우리 아리랑에 채소나 과일 같은 것을 공급하는 회사를 하나 세워서, 그걸 준영이에게 줄까 생각해 봤거든.”
“준영이에게 회사 차려주게요?”
미현은 다른 건 다 잊어버리고, 그저 준영이에게 회사를 하나 준다는 말에, 남편 현석이 그저 고맙기만 했다. 벌써 시골 이야기는 까맣게 잊어버린 미현이었다.
“그래주면 정말 좋겠어요. 꼭 그렇게 해줘요.”
“그럼, 당신도 찬성이군. 좋아. 저녁에 봐.”
전화를 끊는 미현을 보며, 윤영이 말을 걸었다.
“엄마, 아빠가 뭐래?”
“응, 준영이한테 회사 하나 해준데.”
“오우, 회사! 그럼 준영 오빠가 사장되는 거네.”
“그래. 이제야 뭐가 제대로 돌아가는구나. 내 당장 준영이를 만나러 가야겠다.”
윤영은 자리에서 일어서는 미현의 손을 잡았다.
“엄마, 그러지 마세요. 그러다 또 일 나는 수가 있어요.”
미현은 다시 자리에 앉아서 가슴에 손을 얹었다.
“휴, 심장 뛰는 거 봐라. 내가 준영이 땜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너는 모른다. 그날, 그날 아기 침대에서 네 아빠가 준영이를 안아 들고…….”
“흑흑흑.”
끝내 미현은 울음을 터뜨렸고, 윤영은 그런 엄마를 살며시 안았다. 미현은 아직도 그날, 준영을 현석이 데려가던 날, 그 날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어느 엄마가 그 장면을 잊을 수 있을까?
* * *
“최선생님, 전화요.”
교무실에서 한참 학생들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최선경은 전화가 왔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얼른 자기 앞 전화기의 버튼을 눌러 통화를 연결했다.
“최선경입니다.”
“선경 씨. 나 진영이.”
“아, 진영 오빠, 무슨 일이에요?”
“오늘 저녁에 볼까? 지난 번 같던 데 말고, 오늘은 다른 데 예약했거든.”
진영은 지난 번 선경과의 식사 때, 말을 놓을까 물어보았고, 선경은 그러라고 했다.
“진영 오빠, 오늘은 안 돼요.”
“왜? 뭔 일 있어?”
“아니. 그냥 안 돼요.”
전화가 조용해졌다. 잠시 후 다시 진영의 목소리가 나왔으나, 이번에는 힘이 쭉 빠진 목소리였다.
“거절하는 거야?”
선경은 확실하게 정리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래요. 거절이에요.”
“알았어. 그럼 이만 끊을께.”
선경은 진영의 전화가 끊어진 다음에도 잠시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구나. 그러나 안 돼.’
* * *
덕수궁 돌담길을 병승과 소희는 걷고 있었다. 아직은 환했지만, 조금만 더 있으면 해가 질 것이다. 10 월의 가을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병승 씨, 이런 얘기 알아요?”
“글쎄요.”
“하하, 뭐에요? 아직 말도 안 했는데…….”
소희는 병승의 어깨를 툭 쳤다. 상당히 강해보이는 몸짓이었다. 병승도 덩달아 무척 아프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희 씨, 말, 해봐요.”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데요.”
소희의 두 눈이 반짝거리면서 병승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자 병승은 자기가 소희에게 팔짱을 꼈다.
“이럼 헤어지지 않지요.”
“피이, 그런 게 어딨어요?”
소희는 병승의 팔짱을 풀더니, 이제 자기가 병승에게 팔짱을 꼈다.
“나는 말이에요. 소희 씨. 그런 미신 같은 거는 하나도 안 믿어요.”
“호호, 그럼 뭘 믿어요?”
“나는 나 자신을 믿어요. 이렇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 나 자신.”
소희는 병승을 다시 보았다.
“그럼 그림은?”
“그림은 남겨지는 것들이잖아요. 음악은 허공 중에 흩어지지만, 그림은 영원히 남아요. 난 그게 좋아요.”
“그럼 문학은?”
병승은 눈살을 찌푸렸다.
“문학은 읽어야 되잖아요. 그러나 그림은 편하게 그저 바라만 보면 되요.”
“아, 그래서 병승 씨는 그림을 좋아하는군요.”
“소희 씨는 뭘 좋아합니까?”
소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의미라면, 아마 나는 문학이 좋은 것 같아요. 문학은 읽는 것만 아니라, 생각도 하게 해주거든요.”
“아, 맞다. 소희 씨는 레프트였지.”
소희는 이제 팔짱을 풀었고, 병승은 아쉬운 감정이 남았다.
“남자들은 여자가 팔짱을 5 분 이상 끼면, 바로 그 생각을 한데요.”
병승의 눈이 화들짝 놀랐다.
“난 그런 생각 안 했어요.”
소희는 병승의 눈 앞에서 왼손 검지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마치 터미네이터가, "이젠 총알이 없지?" 하는 것만 같았다.
“걸렸다! 무슨 생각을 안 했을까?”
병승의 얼굴이 점점 빨개져갔다.
* * *
선경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왔다.
순화가 선경의 얼굴을 살피더니 걱정스런 낯빛이 되었다.
“선경아,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니?”
“아니에요. 엄마.”
“그런데, 얼굴이 왜 그래?”
선경은 핸드백을 주방 식탁에 올려놓았다.
“엄마, 실은 말이야…….”
“뭔데 그러냐?”
“진영 오빠 알지? 준영 오빠 동생.”
“그래 알지. 왜 진영이가 뭐라 하던?”
“학교에 찾아오지를 않나, 자꾸 전화를 하지를 않나…….”
순화의 얼굴이 변했다.
“혹시 진영이가 너 좋아하는 거 아니냐?”
“엄마, 진영 오빠는 정혼자가 있잖아. 그 부자집 딸.”
“너도 좀 앉아라.”
순화는 아예 의자에 앉아 버렸다.
“너 진영이랑 행여나 무슨 생각하지 마라.”
순화는 엄한 목소리로 선경에게 주의를 주었다.
“엄마, 걱정 마. 나는 아무 관심도 없어요.”
띵동!
그때 문에서 벨이 울렸다.
“아버지 오시는 모양이다. 너,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선경은 핸드백을 들고 다시 일어났다.
“아빠, 오셨어요.”
“선경이도 왔구나. 여보, 저녁은?”
“금방 돼요. 씻으세요.”
종환의 얼굴이 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