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장.
딩동!
빌라의 현관에서 벨이 울리자, 준영은 문을 열어주러 나갔다. 아까 송영구 변호사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한 번 보자는 거다. 준영은 좋다고 대답했고, 밖에서 보냐고 하니까, 영구는 빌라로 온다고 했다.
“어서 오세요. 실장님.”
“하하, 준영 씨, 혼자 지내기가 힘들지요.”
준영과 영구는 서로 인사를 나눈 다음, 주방의 식탁에 앉았다. 준영이 시원한 물 한 잔을 권하자, 영구는 기분좋게 마셨다.
“크으!”
“역시 물이 시원하고 좋아요.”
영구는 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로 보자고…….”
준영이 말하자, 영구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아, 별 거 아니에요. 그냥 얘기나 하고 싶어서요.”
영구는 담배를 준영에게 권했고, 준영은 빌라의 거실 창문을 열어제쳤다. 그렇게 둘은 조용히 담배를 피웠다.
영구는 재털이에 담배를 끄더니, 준영을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준영 씨, 어떻습니까? 갑자기 인생이 바뀌니까.”
준영은 영구에게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게 아직은 실감이 잘 안 납니다. 친부가 그렇게 부자인 줄도 몰랐으니까요.”
“이제 시간이 흐르면 점점 더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럴까요?”
“제 얘기를 좀 할까요?”
영구는 준영의 속을 떠보았고, 준영은 그런 영구의 속내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저는, 상무님, 그러니까, 준영 씨 동생되는 진영 씨도 그렇지만, 저 역시 무척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준영은 자세를 바로 하고 영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반농반어라고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조그만 어촌에서 태어났습니다. 농사지을 땅도 별로 없고, 그렇다고 바다가 넓은 것도 아닌 그런 데. 농사도 조금 짓고, 바다에서 물고기도 잡고, 해산물도 따고, 뭐 그런 데입니다. 그저 밥만 먹고 살았지요.”
“그러셨군요.”
“공부는 꽤 했습니다. 시골에서 가난을 벗어나려면 그 길 밖에는 없었으니까요. 저는 서울대 갈 점수도 받았습니다.”
여기서 영구는 살짝 미소를 지었으나, 그 미소에는 왠지 모를 쓸쓸함이 깃들어 있었다.
“등록금이 없어서, 저는 서울에 있는 중간 대학의 법대를 들어갔습니다. 정말 4 년 동안 한 푼도 안 내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1 학년 때부터 고시반에 들어가게 되었고, 학교에서 다 대주었지요. 4 학년 때 사시 1 차에 붙고, 졸업하자마자 바로 2 차에 붙었습니다.”
준영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대단합니다. 그 어렵다는 사법 고시를…….”
“군대는 법무관으로 갔다온 다음, 연수원에서 2 년 배웠습니다. 솔직히 검사가 되고 싶었으나, 최소한 20 년 이상 근무해서 부장검사가 되고, 그 다음 변호사 개업이라도 해야, 돈 좀 만져볼 수 있다 싶었습니다.”
이번에는 준영이 담배를 꺼내 영구에게 권했고, 둘은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영구는 한 모금을 피우더니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바로 변호사로 개업을 했습니다. 세상과 한 번 부딪쳐 보고 싶었습니다. 한 2 년 정도 했는데, 그리 돈은 많이 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현석 회장님을 만났습니다.”
준영은 친부의 이름이 나오자 약간 긴장했다.
“회장님은 저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나는 재벌이 되고 싶다. 그대가 나를 도와달라. 그래서 저도 제안을 했지요.”
“뭐를 제안했습니까?”
“연봉을 많이 달라고 했습니다.”
영구는 이 말을 하면서 웃었고, 준영은 그 솔직함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제가 회장님과 일한 지는 아직 1 년도 안됐습니다. 그런데 그 1 년 동안 아리랑은 엄청나게 성장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준영은 영구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런데,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러 오신 건 아니잖습니까?”
준영의 말에 영구의 눈빛이 반짝하고 빛났다.
“역시 감이 있으시군요. 그렇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저 역시 잘 살아보고 싶습니다. 준영 씨도 이제 잘 살아보는 것이 어떨까요?”
“…….”
“힘들 때,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자 이겁니다. 별 거 아니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마 회장님이 준영 씨를 부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뭔가를 맡기지 않을까요? 거기에도 아마 법무팀이 필요할 겁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다른 변호사를 부르지 말고, 저에게 상의를 해 주십시오. 제가 잘 도와드리겠습니다.”
이제야 준영은 영구의 방문이 확실히 이해가 되었다.
‘아버지가 뭐라고 언질을 주었구나. 이제 나에게 일을 맡기실 생각인 거야. 그래서 이 사람이 밑밥을 까는구나.’
“그런데 실장님은 아리랑을 맡고 계신데, 제 일까지 어떻게…….”
“하하, 걱정마세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하면 됩니다.”
‘아버지하고 얘기가 다 되었구나.’
준영은 상류사회 사람들의 사고와 그 행동하는 방식에 대하여 새삼 보통 사람들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얘기가 그렇게 돌아가는구나.’
준영은 이쯤에서 화제를 돌리고 싶어졌다.
“실장님은 결혼 안 하세요?”
준영의 뜻밖의 질문에 영구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영구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솔직한 자리니까……. 저는 부자집 딸과 결혼을 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야 말 안 해도 아시겠지요?”
준영은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이 사람은 야망이 있구나.’
* * *
은색 벤틀리 한 대가 XX 중학교 교문 앞에서 멈추더니,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 남자는 선글라스를 벗고 수위실로 다가갔다.
“저, 최선경 선생님을 뵈러 왔습니다.”
수위실에서 나이 지긋한 수위가 창문을 열더니, 진영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신지요?”
“아, 점심 시간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잠시 기다리세요.”
수위는 책상 위에 있던 전화기를 들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예, 정문입니다. 최선경 선생님 손님이 왔습니다.
진영은 다시 선글라스를 껴고, 학교 운동장 안을 바라보았다. 남녀 중학생들이 모여서 체육 수업을 하고 있었다.
“들어가세요. 저쪽으로 가서 저기다 주차하세요.”
수위는 손가락으로 운동장 한 켠을 가리켰고, 거기에는 벌써 석 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진영은 교문 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 마지막 차 옆에 주차를 했다. 다른 차들과 확연히 비교가 되었다. 체육을 하던 중학생들조차 운동을 잠시 멈추고, 진영과 진영의 차를 보고 있었다.
“훗!”
진영은 손을 들어 햇빛을 가리면서, 어디가 교무실일까 찾아보았다.
접견실 문이 드르륵 열리며 선경이 들어오자, 진영은 의자에서 일어서며 미소를 지었다.
“오빠, 어쩐 일이에요? 학교에 다 오고…….”
“선경 씨 보고 싶어서 왔지요.”
“혹시 저 은색 차 몰고 왔어요?”
선경은 접견실 창 밖을 손으로 가리켰고, 진영은 별 거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렌트한 거에요. 오늘 기분 좀 내보려고.”
“아!”
“점심 먹으러 가요. 내가 예약해 놓은 데가 있으니까.”
“예?”
선경은 진영의 방문에 너무 놀라기는 했으나, 그리 싫지도 않았기에 승락을 했고, 진영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흘렀다.
* * *
송영구 변호사는 점심 약속이 있다고 가 버리자, 준영은 다시 빌라에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 배가 살짝 고프기도 했지만, 어쩐 일인지 점심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래,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나를 떠보는구나. 그래, 나도 뭔가를 하기는 해야겠지. 그런데 어디까지 원해야 하지?”
준영은 고민에 빠졌다. 지금까지 자신의 삶은 미래가 없는, 아니 미래에 대하여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되는 대로 막 살아온 인생이었다. 돈 좀 모아서 결혼도 하고, 그러다 애도 생기고, 또 집도 사게 되고, 그러면서 나이를 먹어 가게 되고……. 사채업자 밑에서 일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벌이는 그런대로 되었고, 기분 내키는 대로 살 수 있었으니까. 맘에 안 들면 때려주면 그만이었다. 얻어맞기도 했지만, 그건 아주 과거의 이야기이고, 이제는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았으니까. 다른 패거리들하고도 그런대로 잘 지냈고, 그들도 최준영 이름 석자에 대해서 함부로 굴지는 않았다. 준영은 손을 들어, 손목에 차고 있는 오리엔트 시계를 보았다. 시계의 투명한 유리창 위로 선경의 얼굴이 지나갔다. 준영은 오른손으로 시계의 창을 문질렀다.
‘그렇게 해야겠다. 내가 먼저…….’
* * *
2 호선 삼성역에서 내린 최준영은 테헤란로를 걸어갔다. 스마트폰 지도를 보면서 아리랑 회사를 찾아가는 길이다. 저 앞에 높다란 빌딩이 보였다. 15 층 짜리 빌딩의, 12 층부터 15 층까지, 아리랑은 4 개 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준영은 배에 힘을 꽉 주었다. 그러자 온 몸에 긴장이 흘렀다. 준영은 힘차게 걸어서 건물 정문으로 들어섰다. 벽에 붙어 있는 사무실 정보를 보니, 아리랑 회장실은 15 층에 있었다. 준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5 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바로 정면에 안내 데스크가 보였고, 거기에는 정복을 입은 여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그녀들은 준영을 보자 반갑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서 오세요.”
“저, 이현석 회장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준영의 말에 두 아가씨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회장님을……. 약속하셨나요?”
“아니오.”
준영은 일부러 거칠게 말했고, 두 아가씨들의 얼굴은 더욱 더 굳어갔다.
바로 그때, 안내 데스크 바로 옆에 있는 유리문이 열리면서, 이현석과 또 다른 남자 두 명이 함께 나왔다.
“준영아!”
현석은 준영을 보자마자 이름을 불렀다.
안내 데스크의 두 여자들은 회장이 젊은 남자를 알아보자, 완전히 굳어버렸다.
“준영아, 왠일이냐? 혼자 왔어?”
“예.”
현석은 좌우의 두 남자들을 쳐다보더니, “점심 후 봅시다.” 하고 말했다. 그리고 두 남자들은 현석에게 인사를 한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너, 점심 먹었냐?”
“아니요.”
“미스 황, 나 식사하고 올 건데, 아마 좀 늦을 거야. 박 비서 오면 그렇게 얘기해.”
“알겠습니다. 회장님.”
두 아가씨들은 현석에게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준영아, 내려 가자.”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다시 올라왔고, 둘은 거기에 탔다. 엘리베이터의 지하층을 누른 현석은 준영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잘 왔다. 내 그렇잖아도 할 얘기가 있었는데…….”
“송영구 씨가 찾아왔었습니다.”
“그래?”
그러나 현석의 얼굴에는 그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았고, 준영은 그 점이 약간 의아했다.
“여기 괜찮지? 가끔씩 입맛 없으면 와서 먹곤 하지.”
현석은 된장찌개를 마지막으로 떠 먹더니 숟가락을 놓았다.
준영도 된장찌개를 좋아했다.
‘입맛도 유전되나?’
“그래, 찾아 왔으니 할 말이 있을 거 아니냐? 해 봐라.”
“사무실에 가서 하면…….”
“아, 거기는 또 회의가 있어서 곤란해. 차라리 저녁에 집으로 올래? 성북동 알지?”
“예. 알기는 압니다만…….”
“그냥 속 시원히 말해. 애비한테 못 할 말이 어딨냐?”
준영은 현석의 ‘애비’라는 단어에 속이 뜨끔함을 느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석은 의자에 편하게 뒤로 기댔다.
“빌라에서 하루 종일 놀기도 지쳤습니다. 뭐라도 하고 싶어요. 도와주시면 좋겠고, 아니면 다른 일을 찾아보겠습니다. 택배를 다시 해도 되고요.”
현석의 얼굴에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 떠오르더니, 그 표정은 곧 밝은 표정으로 변했다.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잘 되었다. 내가 서류를 준비해 놓을 테니까, 내일 회사로 와라. 음, 어디 보자……. 그래, 아침 열 시에 보자.”
준영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이 지나갔다.
‘그래도 나를 생각하고 있었어.’
“어쩌면 너한테 맞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그런 거 생각말고, 한 번 해보자. 어때?”
“예. 지금은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혹시 진영이와 함께 하는 겁니까?”
현석은 준영을 보면서 다시 웃었다.
“아니다. 진영이는 아리랑을 맡을 것이야. 너는 다른 거 준비하고 있단다. 물론 아리랑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야. 준비가 되면 내가 부를 터이니, 그때 얘기하자.”
“예.”
준영은 현석에게 아버지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석의 마지막 말이 귀에서 맴돌았다.
‘진영이는 아리랑을 맡을 것이야.’
* * *
다시 삼성역 안으로 들어선 준영의 전화기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으나, 준영은 그냥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최준영 씨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준영은 거만한 목소리로 "누군데?" 이런 식으로 반말부터 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진 준영이다.
“나, 손혜정이 아빠 되는 사람이오. 아시겠소?”
“예, 알겠습니다.”
준영의 가슴이 벌떡벌떡 뛰기 시작했다. 심장이 아드레날린을 뿜어 올렸다. 대체 왜 손진태 회장이 나에게 전화를 했을까?
“우리 한 번 만날까?”
손진태는 한 번도 안 본 준영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고, 준영은 그것이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무슨 일이신지요?”
“사람이 무슨 의심을……. 어른이 한 번 보자고 하면 보는 거지.”
“예. 알겠습니다.”
“목요일 정도 어떨까?
“예. 알겠습니다.”
준영은 전화를 끊고, 손혜정의 얼굴을 떠올렸다. 감히 만질 수도 없을 것 같은 분위기의 여자가 거만스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준영은 주먹을 꽉 쥐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