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장.
손혜정은 태화 투신 본부장실의 자기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창밖에서는 늦가을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혜정의 눈에서는 눈물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오히려 혜정은 두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 지금 혜정의 머리 속에서는, 이미 벌어진 일들을 어떻게 하면 자기에게 유리하게 수습할 것인가 하는 오직 그 생각 뿐이었다.
‘이 아기의 아빠는 최준영이다. 그리고 나는 이 아기의 엄마다. 이진영은 이제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최준영 문제는 천천히 해결하기로 하고, 먼저 이진영에 대한 문제를 처리하자.’
혜정은 결론을 내렸다.
‘아이는 낳을 것이다. 이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나는 엄마로서 아이를 낳을 의무가 있다. 그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이런 일을 벌인 이진영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복수의 단맛을 느끼고 싶다. 그 단맛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진영이 느끼는 쓴맛은 더 커지리라.’
혜정은 스마트폰에서 연락처를 찾은 다음, 책상 위의 전화기를 들었다.
“야! 혜정! 오랜만이다.”
전화기에서는 반가운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래, 어쩐 일이야? 전화를 다 하고……. 그것도, 회사 전화네.”
혜정의 고등학교 때 친구, 이제는 산부인과 의사가 된 친구 양준희였다. 이름이 준희여서, 남자 이름이라고 놀림도 받았지만, 성격 하나는 남자처럼 화끈했다.
“준희야, 너 개업하고 나서 병원은 잘 되니?”
“하하, 잘 되기는……. 사람들이 애를 낳아야지 말이지……. 남자 여자들이 밤에 뭐하나 몰라?”
“너, 똑같네. 그런데, 일단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말할께.”
혜정의 목소리가 심각해지자, 준희의 말도 없어졌다.
“나, 임신했어.”
“뭐라고? 천하의 손혜정이 임신을 했단 말이야?” 이거 놀랄 일이군.”
“그래. 나도 지금 놀라 자빠질 판이거든.”
준희는 이제 혜정의 다음 말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 일은 세상에 비밀이야. 오직 너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해. 나, 지금 거기로 갈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와라. 와서 얘기하자.”
혜정은 전화를 끊은 다음, 모니터에 떠 있던 결제서류에 사인을 했다. 그리고 인터콤을 눌렀다.
“예, 본부장님.”
“나, 지금 퇴근할 거니까, 일이 생기면 메시지를 보내요. 알겠지요?”
“네. 그런데 회장님이 찾으시면 어떻게 할까요?”
“……. 그러면, 병원에 갔다고……. 아니, 나한테 메시지를 보내요. 그리고 급한 용무로 누굴 만나러 갔다고 둘러대요.”
혜정은 서두르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아빠 손진태가 찾으면 대단히 곤란해진다. 핸드백에 필요한 물건들을 전부 챙긴 다음, 자동차 열쇠를 서랍에서 꺼냈다. 평소에는 절대 운전을 하지 않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차 키를 꼭 쥔 혜정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 * *
현석은 영구를 찬찬히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송 실장 말은 당장 백 억은 융통이 가능하다 이거군.”
“네, 회장님. 그렇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영구는 혀로 입술을 한 번 핥았다.
“한 달 기한이고, 이자는 십 퍼센트입니다.”
현석은 깜짝 놀랐다.
“이자만 십 억이로군. 너무 비싼데…….”
영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을 이었다.
“회장님, 모든 것은 회장님의 선택입니다. 지금이라도 전화를 걸면, 바로 취소할 수 있습니다. 아마 그쪽에서는 지금 백 억을 모으느라 동분서주하고 있을 겁니다.”
“자네 사채를 끌어들이는 건가? 난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한 달 뿐입니다. 회장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돈이란 필요할 때 있어야 쓸모가 있는 법이라고요. 지금 이자가 문제가 아닙니다.”
현석의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좋아. 그럼 언제까지 가능한가? 일단 백 억이 들어오면, 가맹점들에게 보증금을 즉시 반환할 생각이니까. 벌써 가맹점에 필요한 내용을 다 알려주었다네. 팔십 퍼센트 정도의 가맹점들이 회사의 직원으로 들어와서 같이 일을 하기로 했어.”
“나머지는?”
영구는 왜 백 퍼센트가 아닌지 의아해졌다.
“그 사람들은 오래 한 사람들이야. 대부분……. 이제 다들 은퇴하고 싶어하지. 상관없어. 보증금 내주면 다들 알아서 할 사람들이니까.”
“은행 쪽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현석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은행은 더 이상 안 된다네.”
영구의 얼굴에 걱정스런 빛이 가득했다.
“회장님, 태화 투신 쪽에도 말씀을 하셨습니까?”
“말은 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군요. 회장님, 저한테 방법이 있습니다.”
현석이 의자 등받이에서 몸을 내밀었다.
“경영권을 담보로 제공하십시오. 빌리는 금액만큼 주식을 담보로 하면 어떨까요?”
“나쁘지는 않지만……. 그게 가능할까?”
“손진태 회장님 마음먹기 아닙니까? 그리고 거기는 친구 사이니까,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아니, 아니. 내 말은 그러다 경영권이 넘어가면 어떡하느냐 이거야. 아무리 친구라지만, 사업은 사업이거든.”
“회장님, 그러면 이 모든 일을 지금 그만두시면 됩니다.”
영구는 딱 잘라 말했고, 현석은 그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 평생의 소망이 이제 시작하느냐, 시작도 못하고 사라지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다.
“좋다. 주식을 담보로 제공하지.”
* * *
혜정은 지하주차장에 차를 댄 다음,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손으로 배를 살살 어루만졌다.
‘아가야, 엄마를 믿어라. 내가 너에게 꼭 이 세상 빛을 보게 해주마. 엄마는 강한 사람이다.’
드디어 마음을 정한 혜정은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로 갔다. 3 층에 내린 혜정은 [양준희 산부인과] 라고 쓰인 병원 이름을 본 다음, 문을 밀고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처음이신가요?”
“원장님 만나러 왔습니다.”
그러나 접수대의 간호사는 혜정의 말을 무시하고,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여기에 이름과…….”
“원장님 만나러 왔다니까.”
혜정의 차가운 말투에 간호사는 고개를 들었고, 거기에서 거부할 수 없는 분위기를 느꼈다. 그녀는 옆에 앉아 있던 어린 간호사를 툭 쳤고, 벌떡 일어난 어린 간호사는 병원 안쪽으로 성급히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양준희가 하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야, 왔구나.”
원장과 처음 보는 여자가 서로 아는 사이임을 보자, 두 간호사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말았다.
“김 선생, 이 분은 나를 만나러 온 거에요. 진료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예, 원장님.”
간호사들은 내용을 짐작한다는 듯, 미소로 혜정을 보았고, 혜정은 준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 남은 간호사들의 얼굴은, 어느 부자집 딸내미가 원치 않는 임신을 해서, 비밀리에 처리하려고 한다는 것쯤은 알고도 남는다는 표정들이었다.
“앉아라.”
혜정은 준희의 앞에 앉았다.
“그래, 얼마나 된 것 같아?”
“삼 사 주 정도.”
“테스트는 했어?”
혜정은 핸드백에서 빨간 선이 두 개 선명히 나 있는 플라스틱 막대를 꺼내, 준희에게 건넸다.
준희는 그걸 보더니 고개만 끄덕였다.
“오케이. 아빠는 누구지?”
그러나 혜정의 굳은 얼굴을 본 준희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설마 모르는 건 아닐 테고……. 말할 수 없다 이건가? 이진영 아냐?”
“…….”
준희는 팔짱을 끼고 의자를 뒤로 제꼈다.
“그래도 내가 의산데, 나한테 과정을 얘기할 수는 있잖아?”
그래도 혜정은 아무 말도 안했다.
“혜정아, 지우러 온 거 아니야?”
“아니. 낳을 거야. 네가 받아줘.”
준희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팔짱을 풀고 책상에 팔꿈치를 얹었다.
“이진영이 아이는 아니고……. 아이 아빠는 비밀이고……. 지울 거도 아니고……. 좋아. 그러면 기록은?”
“의료 기록은 남겨야 해. 이 아이는 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아이가 아니야.”
“너, 분명 무슨 일이 있구나. 나한테 말 못해?”
준희의 호기심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직은……. 좀 참아 줘. 그렇지만 너한테는 나중에 가장 먼저 알려줄께. 약속.”
준희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으나, 혜정의 완강한 태도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나가서 차트 작성하고, 일단 초음파부터 하자. 그럼 되지?”
“고마워.”
혜정은 준희에게서 임신 테스터기를 받아, 다시 핸드백에 넣었다.
* * *
혜정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있던 진태가 벌떡 일어났다.
“여, 본부장님, 이제 오세요?”
“아빠, 비꼬지 마세요.”
“왜?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었을까나? 퇴근도 맘대로 해 버리고.”
혜정은 핸드백을 소파에 던지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아빠, 딱 하나만 얘기할께요. 그리고 자러 갈 꺼에요.”
정화가 주방에서 나오면서 혜정을 보았다.
“너, 무슨 일 있었냐?”
“이진영과의 결혼을 재고해 주세요. 당분간 진행하지 않는 걸로 해 주세요.”
진태와 정화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래졌다.
“뭐?”
“아무 것도 묻지 말고 그렇게 해 주세요.”
혜정은 말을 끝내자 바로 이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남은 진태와 정화는 서로를 쳐다보며 어리둥절해 했다.
“음, 기어코 진영이가 문제를 일으킨 모양이군. 허, 둘은 그렇게 안 맞는 사이인가?”
“여보, 내가 살살 물어볼까요?”
정화의 말에 진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그냥 모른 체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일단 시간이 필요해.”
“어째 병승이는 잘 되어 간다 했는데, 이제 저것이 속을 썩이네.”
정화는 혀를 쯧쯧 찼다.
“술이나 한 잔 줘.”
진태는 다시 신문을 집어들더니, 거기에 빠져들었고, 정화는 주방으로 가서, 술잔과 술병을 챙기기 시작했다.
* * *
“어, 준영이구나. 잘 왔다. 요새 바쁘지?”
종환은 반갑게 준영을 맞이했고, 순화 역시 너무나 기쁜 얼굴이었다.
“회사는 잘 다니지?”
“예. 엄마.”
준영은 종환과 순화를 보면서도, 연신 거실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준영아, 왜 그러냐?”
순화가 묻자, 준영은, “선경이는 안 왔어요?” 라고 물었다.
“아, 제 방에 있단다. 가 보렴.”
준영은 선경의 방 앞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아무 말도 없다. 준영은 다시 문을 두드렸고, 그러자 문이 열렸다. 문 안에서는 외출 준비를 마친 선경이 서 있었다.
“엄마, 아빠, 잠깐 나갔다 올께요.”
“왜? 이 밤에.”
순화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오빠하고 할 얘기가 있어요. 나쁜 일 아니에요.”
선경은 방긋 웃어보였고, 종환과 순화는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다.
“요 앞 카페에 갔다 올께요. 오빠, 가자.”
선경은 준영의 팔짱을 끼고 현관으로 끌었고, 준영은 힘없이 끌려갔다.
“오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선경의 눈에 분노와 절망 그리고 실망까지 모두 들어 있었다.
“뭐 말이냐?”
준영은 일부러 딴전을 피웠다.
“어떻게 나를 진영 오빠에게 넘길 수가 있지? 내가 물건인가?”
준영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선경아, 차분히 생각해 보자. 우리가 어릴 때 했던 그런 이야기들은, 진짜 어려서 한 얘기야. 현실을 전혀 모르고 한 얘기들이야.”
“오빠, 그건 문제가 안 돼. 법적으로도 가능하다고 진영 오빠가 그랬어.”
“뭐? 진영이가?”
준영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 너는 그래서 진영이를 따라 호텔 방에 들어갔냐? 난 줄 알고? 나하고 자려고?”
선경의 얼굴이 벌개졌다.
“오빠, 그게 무슨 잘못이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려고 하는 게 무슨 잘못이지?”
“좋아. 그건 잘못이 아니다.”
준영은 선선히 선경의 의견에 동의했다.
“오빠, 나는 나를 둘이서 속이려고 했다는 것에 화가 나. 진영 오빠가 나를 좋아할 수도 있지. 그런 건 기분 안 나빠.”
“왜 너를 속이려 했냐 하면…….”
“그래. 그 얘기를 해 봐.”
그러나 준영은 진영이 처음에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는 걸 말할 수 없었다.
“그건 말이야…….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나나 진영이나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난 진영이가 이해가 돼. 너를 얼마나 맘에 들어했으면…….”
“오빠, 그건 말이 안 돼. 내가 좋으면, 나한테 말하면 되지? 그걸 다른 사람으로 속이려 들다니…….”
준영은 ‘네가 나를 좋아하니까, 나하고 사고칠 결심까지 하니까 그렇지.’ 라고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너, 앞으로 진영이 안 볼 거냐?”
“그걸 말이라고 해. 나를 강제로…….”
선경은 그 다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준영은 충분히 선경이 이해가 되었다.
“좋다. 진영이는 안 본다고 치자. 그렇게 해.”
준영도 이렇게까지 된 바에는 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그럼 오빠는 그 여자, 혜정 언니하고 어떻게 할 거야?”
“손혜정?”
“오빠가 좋아한다며?”
준영은 혜정이 빌라에 와서 모든 것을 알고 가 버린 장면이 떠올랐다. 혜정은 임신을 했고, 아이의 아빠는 자기인 것이다. 이것까지 선경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빠, 혜정 언니도 오빠를 만난다고 했어?”
“모르겠다. 솔직히 아무 것도 모르겠어.”
선경은 이제 준영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