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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티 Oct 08. 2021

통번역 대학원 다니면 영어 잘하겠네요?

통대는 영어 괴수들만 모아논 곳?

이런 질문을 가장한 칭찬을 받으면 나는 최대한 겸손해 보이는 표정을 장착하고 한사코 아니라고 한다. 물론 평소에 칭찬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온몸이 오그라들고 분명 기분 좋은 일인데도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칭찬받을 일도, 이례적인 일도 아닌 거라고 생각해서기도 하다.


실제로 내가 다니고 있는 호주 맥쿼리 통번역 대학원 재학생들 모두 영어를 잘한다. 개인 편차는 있지만 다들 수업, 에세이, 통역, 번역을 영어와 한국어를 넘나들며 해내고 있고 그냥 인풋, 즉 독해와 듣기만 할 줄 아는 게 아니라 아웃풋, 말하기와 쓰기 실력도 갖추고 있어 시쳇말로 '영어 굇수'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통번역 대학원(이하 간단하게 통대) 재학생이라고 하면 간혹 영어를 '어느 정도' 잘해야 하냐고 묻는 사람도 많다. 굉장히 섬세한 질문이 아닐 수 없고 질문자가 영어 실력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거나 통번역 대학원에 관심이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는데, 일단 학교에서 요구하는 서류상 영어 실력은 아이엘츠(IELTS) 오버롤 6.5다.


여기서 저 요상한 오버롤이라는 단어는 overall, 즉 평균 점수를 말한다. 호주에서 이민 및 유학 시 쳐야 하는 영어 시험인 아이엘츠는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 등 밴드가 4개로 각 밴드 점수 외에 평균인 오버롤 점수가 나오는데, 내가 다니는 맥쿼리는 통대 최저 입학 점수가 오버롤 6.5에 각 밴드가 최소 6이 나와야 한다.


그러면 아이엘츠 아카데믹 모듈로 봐서 6.5가 나온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일까? 호주에서 아이엘츠 시험 준비를 포함해 성인 영어 과외로 입에 풀칠한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6.5는 충실한 기본 실력에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단어를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는 정도고 응시자가 그래도 영어를 어느 정도 깊이 있게 해야 나올 수 있는 점수이다.


문제는 영어를 '어느 정도'만 한다는 건 본인의 영어 실력이 막연하다는 것이다. '막연하다'를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아득하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렴풋하다'라고 나온다. 그러니까 최저 점수만 맞춰서 입학하면 마치 으슥한 새벽에 가로등도 없고 안개가 자욱하게 껴서 의지할 것이라고는 달빛 밖에는 없는데 운전하는 것과 비슷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이건 절대적인 영어 실력보다도 사실 더 큰 문제이고 통번역에 있어서 마치 암과 같다. 특히 통번역 공부는 교수님과 동기들이 주는 비평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원체 마음이 약하거나 속된 말로 '깡'이 부족하면 무척 힘든데, 애초에 본인의 영어 실력에 자신이 없어서 인풋이나 아웃풋 시 갈팡질팡 하면 당연히 거기에 대한 크리틱이 따라올 수밖에 없고 이게 반복되면 자존감이 바닥을 치게 될 수도 있다. 원래 나도 아주 잘 아는 내 치부를 남이 자꾸 들추면 평소보다 배로 기분이 상하기 마련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통번역 공부한다면 '어느 정도'의 실력 가지고는 부족하다. 나 스스로 영어실력에 자신할 수 있어야 한다. 전 세계 영어가 쓰이는 나라라면 어디든 떨궈놔도 꿋꿋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면, 길 가다 외국인이 영어로 말 걸었을 때 웃으면서 말할 수 있다면, 언짢은 일이 있을 때 기에 눌리지 않고 한마디 할 수 있다면 준비된 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단순히 입학 조건을 맞추기보다는 자신이 생길 때까지 공부를 하고 통대에 들어오는 게 좋다. 어차피 내가 아는 표현을 있어 보이게 다듬는 건 통대 다니면서 지겹게 할 것이기 때문에 누구 앞에 가서도 꿀리지 않고 영어를 쓸 수 있다는 마인드를 챙기는 게 더 중요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6.5 딱 맞춰서 들어오면 안 된다고 오해하지 마시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단순한 시험 점수보다는 나에 대한 믿음, 자신감이 실제로 공부할 때는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집 요강에 나와있는 입학 조건을 만족했다면 이런 숨은 입학 조건도 충족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데 진짜 무서운 건 영어가 어느 정도 됐다고 생각했을 때 한국어가 어퍼컷을 날린다는 점이다. 아, 이 지긋지긋한 공부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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