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애나 만들기 Inventing Anna"
맥쿼리 통대 첫 학기에 듣는 이론 수업에서 마크 교수님이 한 말이 생각난다. 어디 가서 직업이 통역사(interpreter)라고 하면 대번에 "아~~~~ 번역가시라고요?(Oh, you mean you're a translator!)"라고 친히 고쳐준다고 했는데, 한국에서는 나름 외국어를 쓰는 세련된(?) 전문직 이미지가 통역에 있기 때문에 이런 오해를 쉬이 듣지는 않지만, 외국에서는 자기 일 외에는 관심이 거의 전무한 경우가 많아 저렇게 헷갈려하는 경우가 많다.
나야 아직 통역은 전문적으로 하지 않아서 평소에 번역 프리랜서이자 통대 학생이라고 나를 소개하기 때문에 저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지만, 이번에 새로 나온 넷플릭스 시리즈인 "애나 만들기"를 보면서 나름 동종업계 종사자라고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애나 만들기" 8화를 보면 비비안이 애나의 과거를 알아보기 위해 독일로 떠나는데, 잡지사에서 주선한 출장이라 숙식은 물론 번역가(!) 양반도 한 명 구해준다. 그런데 8화를 쭉 보다 보면 이 양반이 하는 일은 번역이 아니라 통역, 더 정확히 말하면 수행 통역이자 대화역이다. 번역은 글을 글로 옮기는 것을 말하고 통역은 말을 말로 옮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더 골 때리는 것은 이 "번역가" 양반이라는 사람이 통역하면서 저지르는 일인데 제일 말도 안 되는 부분은 3인칭을 쓴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아니 통역은 무조건 1인칭으로 해야 한다. 말하자면 발화자가 되어 얘기하는 것인데 아래 대화를 보시라.
3인칭)
A: 그게 무슨 말인지...
통역: She doesn't know what you mean.
1인칭)
A: 그게 무슨 말인지...
통역: I don't know what you mean.
이렇다 보니 통역 수업 때 제일 처음 배우는 것도 1인칭의 쓰임이고 전문 통역사와 비전문 통역사를 알아볼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뜨악스러운 건 드라마 속 번역가 양반의 개입이었다. 통역은 번역과 마찬가지로 삼 無가 있다. 바로 無 누락(omission), 無 첨언(addition), 無 왜곡(distortion)인데 통역을 하다 자기 생각을 첨언하거나, 자기 생각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꺆!!!!!!! Big cringe!!!) 누락하거나, 어떤 이유로든 의미가 왜곡되면 안 된다.
그런데 8화를 보면 번역가 양반이 비비안을 도와주기 위해 하라는 통역은 안 하고 애나의 아버지를 설득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주 기본적인 통역 수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code of ethics, code of conduct(직업윤리, 행동강령)를 어겼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장면으로 인해 통역사에 대한 잘못된 통념이 생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통역사는 협상가(negotiator)가 아닌 조성자(faciliator)이다. 통역사는 다른 언어를 하는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게 말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대화를 진전시킨다거나 누구 하나 편에 서서 상대방을 설득하면 안 된다. 이러면 대화의 균형이 무너지고 객관적인 사실이 오가는 환경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애나 만들기"의 제작자는 "그레이 아나토미"를 만든 유명한 스타 제작가 숀다 라임스인데, 물론 드라마 전개상 크게 중요한 디테일은 아니지만 본인이 다양성(diversity)이라는 어젠다를 작품에서 숨기지 않는 만큼 다양한 직업 세계도 정확하게 반영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