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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마디 Apr 17. 2024

도쿄역 .기관사 : 신호를 만들다

도아가 시아리마스 (문이 닫힙니다)

은하철도 999 (1979년 작) (출처: 구글)
아키라 (1988년 작)(출처 : 구글)


1.

일본은 철도의 나라다. 아득한 은하를 가로지르는 고독한 증기기관차, 타락한 도시에서 굉음이 폭주하는 화려한 공중 다리가 어디서 나왔는지 - 도쿄에 진입하자마자 알았다.  

도쿄 나리타 공항은 말이 도쿄지 도쿄 도심에서 70km나 떨어진 외딴곳에 있다. 공항을 나와 3만 원짜리 도쿄행 쾌속 열차를 타면 배추밭 풍경에서 시작해서 하늘까지 빼곡한 그리드로 쌓아 올린 번쩍이는 빌딩까지 - 1시간 동안 열차 창밖으로 일본 역사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2.

찰흙을 주물러놓은 듯한 기다란 일본 본토는 남서 끝 가고시마에서 북동 끝 삿포로까지 신칸센이 시원하게 관통한다. 200개의 잘게 쪼개진 신칸센 역 주변으로는 지방 도시마다 사철이, 대도시마다 지하철 노선도의 광역 철도망이 촘촘한 그물을 만들어 열도를 꽉 잡고 있다. 도심에 가까워질수록 색색이 다른 열차가 맞은편에서 달려왔다. 쨍하지 않고 조금씩 톤 다운 된 빈티지한 일본 감성이 11월에도 따뜻한 도쿄 햇살에서 왔구나. 우아한 광택이 내 옆으로 선을 쫙 그으며 지나갈 때 내 고개도 자꾸 돌아갔다. 홀린 듯이 얼굴을 차창에 박고있다보니 반짝이는 광선 끝으로 도쿄가 등장했다.


3.

기품을 뽐내던 첫인상과 다르게 도쿄의 철도는 사실 타기 힘들기로 악명이 높다. 일본은 전국적으로 상당 부분 철도가 민영화되어 있다. 하루 600만 명이 이용하는 도쿄의 지하철 역시 민영 지하철 9개 노선과 시 운영 노선 4개, 총 13개 노선으로 쪼개져 있다. 서울의 공영 전철은 들어갈 때 카드 한번 찍고 자유롭게 갈아타다가 나올 때 한 번 찍고 나가는 시스템이다. (신분당선처럼 민영노선이 생기고 있다) 그러나 민자 노선이 많은 도쿄에서는 운영회사가 다른 노선으로 갈아탈 때 표를 다시 사서 들어가야 한다. (A노선 안에서 이동할 구간을 지정해 표를 사서 열차를 타고 내린다 > 갈아타기 위해 개찰구를 나온다 > B노선의 표 판매기를 찾아가 B노선에서 이동할 구간을 지정해 표를 산다 > B노선의 개찰구로 들어가서 열차를 찾아 탄다)


 노선 이름도 서울처럼 1, 2, 3, 4호선이 아니라 긴자선, 야마노테선, 아사쿠사선 등 전부 지역 이름이라 초행길인 나는 역 이름도 헷갈리고 노선 색도 헷갈려서 매번 환승역에서 길 찾는 데만 30분 1시간씩 버리곤 했다. 전철 통합권을 팔긴 하지만 나리타 공항에서 줄 서는데 진력나서 안 샀더니 역에 갈 때마다 티켓을 사고, 갈아탈 때마다 또 사야 했다. 그것도 현금으로. 현금이 없으면 ATM을 찾아 돈을 뽑아야 했다. 역까지 잘 왔다 해도 밖으로 나오는 길은 또 얼마나 복잡한지. 한 예로 신주쿠역은 출구가 계속 늘어나 지금은 159개나 된다.


지상의 도로는 멀끔하게 정돈되어 차분하게 운전하고 차분하게 걸어 다니던데. 지하에서는 수 많은 입구와 출구가 화살표를 계속 찍어내는데도 광장엔 신호등 하나 없고 나는 여기가 지하 몇 층인지도 모른 채 내 길을 못찾아 내려갈 수도 올라갈 수도 없었다.


4.

도쿄에서 3일째, 지하에 조금 익숙해질 무렵. 친구들과 도쿄역 플랫폼에 앉아 다음 열차를 기다리던 중 근무 교대하는 기관사를 보았다. 열차 맨 앞 칸 기관실에서 일을 마친 기관사가 내렸고, 마중 나온 기관사와 악수로 인사 후에, 새 기관사가 한사람 크기의 좁은 기관실로 쏙 들어갔다.


내린 기관사는 바로 떠나지 않고 플랫폼에 서서 사람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열차가 여느 역보다 좀 더 오래 정차하는 동안 탈 사람들이 다 타고, 떠날 사람들은 기차 문을 다 떠나는 사이 - 인파의 덩어리가 둘로 떼어지는 그 사이에 기관사가 있었다.


그가 서있는 자리에서 비로소 이 복잡한 지하의 신호를 보았다. 단 하나의 신호. 지상의 신호가 빨강, 초록, 노랑이라는 색과 함께 온갖 문자 숫자 그림을 조합한 화살표였다면, 지하는 자동문 하나로 신호를 만들고 있었다. 기차가 지하의 긴 터널을 지나 플랫폼에 멈추면, 자동문을 열어 열차의 승객을 땅으로, 땅의 승객을 열차로 넘겨준다. 덩어리가 둘로 완전히 분리되면 다시 자동문을 닫아 넘어간 승객은 지상으로 올려보내고, 열차 칸으로 들어온 승객은 다음 역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넘어간 이들을 뒤로하고 열차는 문을 걸어 잠그겠다며 출발신호를 보냈다. 다시 깜깜한 터널 속으로 들어가는 열차의 뒷 모습을 향해 그때까지 철길의 그림자처럼 서 있던 기관사가 거수경례 했다. 열차의 꽁무니를 다 보내고 나서야 그는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뻥 뚫린 지하의 공기를 잡아 끌며 절도있게 기차 칸 끝까지 걸어가서 계단을 올랐다.



5.

플랫폼을 제공하고 관리하는 일이 그렇다. 신호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혼잡한 길에서도 관리자는 손 끝으로 신호를 만들어 인파가 흐르게 한다.


어디론가 가고, 어디에선가 떠나와 또 이 곳을 떠나는 사람들의 여정이 이들의 거수경례에서 시작한다. 그들의 하루가 직장으로, 학교로, 만남으로, 혹은 홀로되기 위하여 도시를 가로지르는 일에 신호를 만드는 관리자의 조용한 엄격함이 있다. 열차가 가다 멈추고 가다 멈추고 하듯 기관사 역시 대를 이어 들어오고 나가며 비좁은 자리를 지킬 뿐이지만, 그 열차가 멈추지 않고 끝까지 가도록, 집 떠나온 이의 의지가 철길 따라 흘러 - 태평양 연안에서 사계절 꽃을 피우는 가고시마에서부터 북극의 차가운 바닷바람이 처마 밑까지 눈을 쌓아 올리는 삿포로까지 이어지도록, 기관사는 만질 수 없는 신호를 만든다. 시침 분침 앞에서의 조용한 기다림, 뒷모습 뒤에서 보내는 조용한 인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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