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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마디 Sep 14. 2024

황궁. 시각장애 가이드 러너

돌파하다

1. 황궁런


됴쿄 황궁은 러너들에도 인기 코스이다. 황궁런 (황거런)이라는 이름으로, 황궁의 높은 담벼락 밖으로 깊게 파인 해자를 따라 한 바퀴 도는 약 5km 거리의 코스이다.


나는 하루키 아저씨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로 글짓기와 달리기를 배웠다. 서른둘. 공교롭게(?) 딱 같은 나이에 러닝을 시작한 서른둘의 하루키와 나. 젊은 하루키가 이른 아침 기지개를 켜는 도시를 달리는 모습이 나에게 도쿄 이미지가 되었고, 상상 속 도쿄에서 하루키 아저씨가 뛰어봤을 만한 거리를 나도 두 발로 뛰고 싶었다. 황궁런을 찾아냈고 일부러 황궁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후지산 캠핑을 마치고 시즈오카에서 도쿄로 돌아온 밤. 숙소로 가는 차에서 황궁을 따라 뛰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러닝크루가 어디선가 우르르 뛰어와 신호등에서 잠시 우르르 멈췄다가, 초록불로 바뀌면 다시 우르르 건너가서 일행을 챙겨 모은 다음 황궁 담벼락에 붙어 다시 줄줄이 뛰어갔다. 11월에도 싱글렛과 쇼츠만으로 괜찮은 열기. 내일의 나를 상상하며 창문을 빼꼼 열어 간바떼! 간바떼!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초록 불이 깜빡일 때 어디선가 단 두 명이 뛰어와 횡단보도를 뛰어 건넜다. 한 명은 연두색, 한 명은 주황색 조끼를 입었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지만 난 그들 손에 있는 검은색 끈을 볼 수 있었다. 저 팀이 시각장애 러너와 가이드 러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뛰는 러닝 크루의 한 친구가 저 가이드 러너 활동을 해서 도쿄에도 네가 있다며 사진을 찍어 보냈다.

곧 신호가 바뀌고 나는 숙소로 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내가 황궁을 뛰고 돌아올 때까지 그 두 형광조끼가 계속 생각이 났다.   


2. 처음  


마라톤은 5, 10km와 하프 21km, 풀 42.195km가 전부 다른 운동 같다. 5, 10km는 단숨에 힘껏, 빨리 주파하는 운동이지만, 나에게 하프는 무엇보다 지루함을 넘는 운동이었다. (풀 코스는 아직이다) 훈련 없이 첫 하프를 뛰었던 6월의 푹푹 찌던 마라톤이 생각난다. 전반 10km 구간은 ‘이 거리를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간을 보며 달렸지만 막상 15km쯤, 절반이 확실히 지나니까 힘들고 괴로운 것도 다 지루해져서 그때부터는 그야말로 지루함과 싸우며 달렸다.


러너스 하이는 무슨. 머릿속으로 잡생각을 얼마나 했던지 그날 환기했던 방법을 14개나 기억해 왔다.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제1의 방법은 그냥 고개 들어 먼 풍경을 보는 것이다. 이 방법은 오르막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때 유용했다. 45도 아래 땅을 볼 때 거슬리던 무너진 자세와 무거운 호흡에서 주의를 돌려 - 나와 상관없이 평온한 물과 나무, 구름과 공기를 내 안으로 들여왔다. 그래서 내 안에서 한강 물이 흐르고, 구름이 떠가고, 그 구름의 엉덩이를 토닥이는 바람을 타고 한강을 찾은 여름 철새가 비행하는 것을 눈에 담으며 철새의 다음 계절은 어디일까 상상하다 보면 어느새 나의 호흡은 내리막에서처럼 가벼워져 있었다. 그러고 나면 가슴과 허리와 고개를 풀어줄 여유를 얻었다.


3. 아득함을 돌파하는 일


18km쯤. 온갖 방법을 생각해 내서 환기를 해봐도 버티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워치를 보면 ‘아직도 이만큼 남았어?” 진력이 났다. 한눈파는 것도 이젠 소용이 없고 무엇으로 이 시간을 지우지? 내 몸이 나에게 힘들다고 죽겠다고 제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그 시간을 나와 다른 평안한 세상으로 최면을 걸지 않고서 무엇으로 이 고비를 넘긴단 말인가. 아득한 3km가 길을 잃고 더 아득해졌다.


아득한 러닝. 아득한 피로함. 아득한 괴로움…  아득함 속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내 안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밖에 없겠다. 내 상태가 얼마나 나쁜지 알면 무너지려나. 그러나 더 이상 세상이 주는 힘을 받을 힘도 없을 때. 그때야말로 내 안에서 힘을 만들어낼 때였다.

내 몸의 끝단. 숨소리만으로, 내 두 발바닥이 착지하는 지면의 감각만으로 어깨에 쌓인 피곤을 자꾸자꾸 물리치고 무너지는 허리를 다잡으며 아득함을 주파할 수밖에 없겠다. 내가 먼 곳의 풍경을 두 눈으로 잡아 와 내 안에 퍼뜨려 감각을 지웠던 것과 반대로, 아득함 속에서는 내가 나의 그림자가 되어 오르막을 오르고 또 오르는 수밖에.

그때부터는 속도도 거리도 잴 필요가 없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단 하나, 내 몸. 팔꿈치와 골반과 무릎을 기계적으로 움직여 끝까지 갔다.




4. 규칙


나의 러닝과 저 팀의 러닝이 다른 점은 저기는 팀이라는 것이다. 둘 사이를 잇는 검은 줄이 ‘나는 곧 팀’이라고 말해준다. 시각장애 러너 손목에 끈 한쪽을 묶어 걸고, 가이드 러너는 손에 움켜쥔다. 당시 나에겐 없던 것, 공동의 규칙을 두 사람은 항상 머릿속에 띄워놓는다.


한 블로그를 보니까 가이드 러너의 요령이 28개나 있다고 한다. 크게 분류하면 시각장애 러너에게 위험과 주행 신호를 시각 언어에서 소리로 통역해 주는 일, 그의 컨디션을 항상 체크해 필요 사항을 적시에 채워주는 일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가이드 러너 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그가 전해주는 시각장애 러너와 가이드 러너가 합을 맞춰가는 방법을 듣는데 6월의 바람이 싱그러웠다.  


    속도는 시각장애 러너에 맞춘다. 페이스도 걸음도 우리는 나란히 간다  

    내 팔에 당신의 팔이 섞이지 않게 하기 위해 당신의 오른발에 나는 왼발을 뛴다.   

    “속도방지턱이 있으니 속도를 줄일게요, 신호등이라서 기다렸다가 갈게요”   


그리고 빛이 비치는 건 발에 채는 장애물이 아니라 세상이니까. 그가 아득할 때는 내가 눈이 되어준다.  “지금 논밭을 지나요. 비닐하우스예요. 내천을 지나요. 청둥오리도 있네요. 이제 햇빛이 나와요” 당신이 경험해 본 세상. 지금은 상상 속 도로가 된 그 세상이 지금도 당신 곁에 있다고.


이 모든 규칙의 목표는 하나. 시각장애 러너의 완주. 내 동반자가 나에게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에게 의지하지 않고 독립하기 위해서. 가이드 러너에게는 시각장애 러너가 나에게 모든 걸 맡기고 의지해줄 거라는 믿음, 시각장애 러너에게는 가이드 러너가 나와 뛰는 즐거움을 나눌 거라는 믿음이 둘의 손에 단단한 검은색으로 묶일 때, 끈이 느슨해지고 순간 정적이 흐른다고 했다.


5. 사이클

얼렁뚱땅 하프 마라톤을 뛴 이후, 순서가 거꾸로 되었지만 21km 역시 이전의 5km, 10km 훈련이 그랬듯 구간별 거리와 시간을 내 몸으로 익혀가면서 훈련하고 있다. 혼자, 때로는 사람들과 함께.

사이클을 반복하는 일이 그렇다. 주, 분기와 반기, 연 단위 일정을 짜서 매번 같은 스텝으로 굴리는 일. 이런 반복되는 업무는 보통 일선에 있는 사람을 지원해 주는 일이므로 업무평가에서는 B0를 넘기기 힘들겠지만, 그것은 남의 평가이고 처음은 누구에게나 실전이다. 처음 닥친 일이 얼마나 큰지 작은지 모르니까 모든 일에 남은 힘을 쥐어짜서 하고 본다. 그러고도 이마를 탁! 이불을 뻥! 해가면서 가느다란 규칙을 하나둘 움켜쥘 수 있으면, 그것으로 나의 바큇살을 만들며 일을 굴러가게 할 수 있고, 나만의 축이 생기면 여러 일을 동시에 굴려 나를 따라오게 할 수 있다.


6. 선배

첫해의 업무노트가 오답 노트처럼 까매지고 이듬해 노트를 받았을 때 숙련자가 될 수 있고, 오답 노트를 버려도 일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선배가 될 수 있다.

남들은 그 사이클을 알고 끝도 아는데, 처음인 나는 당장 내일 눈 뜨기가 두려울 때. 일은 달라도 그 마음을 알기 때문에 신입을 도와줄 수 있다. 나의 규칙을 너의 바퀴에 대입해 보길 바라면서. 내게 팀이 되어주었던, 내가 완주하기를 팀이 되어 지탱해 주었던 선배가 생각난다.


학기 마무리를 앞둔 어느 겨울밤, 뒤풀이 치킨집. 첫 만남에서 내 작업을 보고는 “내가 네 책 내줄게!” 하던 순간이 아직도 꿈결같이 느껴진다. 누군가 자신 있게 그런 말을 내게 해주었다는 것이.


“방법을 아니까.” 세상엔 수많은 방법이 있지만 자신이 잘 아는 방법이 하나 있으니 도와주는 것뿐이라던 그분. 곧 공모전을 하나 정해서 팀으로 응모할 계획을 세웠다. 이후로 2주에 한 번씩 나를 작업실로 불러 작업 과정을 자세히 물어봐 주시고, 이런저런 잡담 속에서 내 사고방식의 막힌 곳을 건드려주시면 자연스럽게 다음 방향이 잡혔다. 원래라면 꽁꽁 싸맸을 겨울 내내 나는 그 선배 앞에 온갖 작업을 다 꺼내 보였다. 당시 이런저런 기준에 맞추느라 길을 헤매던 시절에 그 선배는 내 그림 속에서 비율이 다 틀린 자유로운 지점을 찾아내 주었다. 막바지에 내가 정리를 못해 공모전 성과는 없었고 선배도 곧 서울을 떠나 섬으로 내려갔지만, 그 봄부터. 나는 나의 자유로운 감각을 조금씩 감지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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