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평안한 죽음
제주도에서 여자는 꿈과 같은 거야
제주도 택시기사님이 말씀하셨다. 도통 문장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당시, 꿈*이라는 추상 명사에 집중한 나머지 미문으로 읽혔다.
2025년 1월 26일 PM 8 : 45
92세의 나이로 할머니가 영원히 잠들었다.
2025년 1월 27일 AM 11 : 40
외할머니 장례식을 위해서 온 가족이 제주도 외가댁에 모였다. 김포공항에서 제주공항까지, 제주공항에서 할머니 집인, 대정까지 가는 길에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 할머니의 외로웠을 생을 도무지 헤아릴 길이 없다.
좋은 애도방법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장례식부터 49제 기간 동안 글을 쓰기 시작한다. 할머니는 생전 글을 읽고 쓸 줄 몰랐기에 좋아하셨으면 좋겠다.
1. 일제강점기 (1935년생, 유년기 시절)
1935년(실제로는 1934년으로 추정) 8남매 중 7번째 딸로 태어났다.
제주도는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고, 할머니의 고향인 모슬포는 일본군의 군사 기지로 활용.
일제의 통치하에서 한국어 사용이 금지되던 시기 지만, 그녀는 여성 교육권이 배제되어 일본어는 물론 한국어도 평생 읽고 쓰고 읽을 줄 몰랐다.
그러나 일본어 단어를 상당수 섞어서 사용했다.
펭키 (ペンキ : 페인트) 가져와
,
도민들은 식량 수탈과 노동력 착취에 시달렸고, 할머니의 가족이 지역 유지여서 비교적 덜 힘든 생활을 했을 수도 있지만, 그 시대의 억압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못했을 걸로 예상한다.
일례로 할머니는 어릴 때 일본군의 장화소리가 들려서 항아리에 들어가서 몸을 숨겼던 적이 있었다고 전했다. 이 사건을 계속 회자했던 건 본능적으로 느껴졌던 생명의 위협이었으리라.
항아리에 몸을 숨긴 일화로, 할머니가 순간 상황판단력이 좋은 사람이었다고 짐작한다.
2. 해방과 한국전쟁 전후 (1945~1953, 청소년기 및 초기 성인기)
10세가 되었을 때(1945년), 해방을 맞이했지만, 이후 한국전쟁(1950~1953)이 발발.
제주도는 전투지역이 아니었지만 피란민이 몰려들고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음
1948년 제주 4.3 사건이 발생. 당시 그녀의 나이는 13세, 유복한 집안이어서 당시 사회적 변화 속에서 재산을 보호하거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려움을 겪었을 수도 있으리라...
반면 할아버지는 이 사건을 피해서 통제가 덜 미치는 현재의 대정골 집으로 이사했음
3. 결혼과 가정생활 (1955~1960년대, 성인기 초기)
20세가 되는 시점(1955년 전후) 제주도는 한국전쟁 이후 극심한 경제적 빈곤에 직면.
여성들도 해녀 일을 하거나 농업에 종사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등 사회활동 참여가 보편화됨.
할머니도 실제로 결혼하기 전까지 물질(해녀일)을 했음.
4. 첫째 아이의 유산 (어머니로서의 상실감)
1957년, 첫째 아이가 사망한 사건은 그녀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다. 당시 영아 사망률이 높았고 보건행정이 발달될 수 없었던 시기여서 어떤 이유로 때문에 아이가 사망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듬해 나의 어머니를 출산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할머니는 자신이 열 달 품어 낳은 아들을 잃었던 충격이 깊게 각인되었는지 본인의 자녀가 (돌아가신 자녀포함) 다섯 명이라고 대답했다.
그녀가 강한 모성애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어머니를 낳은 후 세 자녀를 더 출산한다.
그러나 둘째 외삼촌을 낳은 후, 시댁의 개입으로 소박을 맞았다. 그렇게 양육비를 지원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 남매를 책임진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27세였다.
이 부분은 살아계신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며 번외 편으로 조명하겠다.
택시기사님은 말씀하셨다.
제주도 여자들 정말 강하고 부지런해
그중에 모슬포 사는 여자들이 특히 강인해.
거기 비바람이 얼마나 부는지 알아?
그렇게 택시 기사님과 전통적인 제주도 여성의 강인함을 리스펙하며 할머니를 떠올렸다. 사실 사람의 생존력이란 이분법적 분류로 나눌 수는 없다는 걸 알지만, 척박한 땅에서 홀로 자식들을 온전하게 사회로 내보내고 (지금은 49제 기간이니깐?) 현재 구천을 떠도는 할머니가 매우 존경스러웠다.
아이구 나딸 ~~~♡♡♡
내가 육지에서 내려오면, 할머니가 건네는 웰커밍 인사는 늘상 이 말이었다.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면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아졌다. 이 말을 제외하면 거진 못 알아듣는 제주도 방언의 연속이었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할머니는 비속어를 많이 사용한다고 했다. 무슨 욕인지는 당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나 또한 세상 살면서 간혹 Shipal을 외치지 않으면 감정이 게워지지 않을 때가 있어서 그녀가 받은 감정의 고통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할머니의 말은 제주도 방언이라 절반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의 속마음) 제가 게을러서 큰일이에요... 모진 환경에도 자생할 수 있도록 건강한 기운을, 어떤 풍파에도 생존하는 지혜를 나눠 주세요... 네?
그러면 할머니는 대체로 이렇게 대답하셨다.
"dんkっdっjdkshsんぃmsっっj"
나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지나가던, 이불빨래하던 어머니가 통역하셨다.
빨리 시집이나 가래. 너 노처녀래;;;;;
어머니는 이어서 통역하셨다.
요즘 애들 결혼을 안하거나 늦게 하긴 하더라.
시집살이 할거면 시집가지 말래. 노인네 참 별말을 다 하네~
이 대화를 통해서 할머니가 멋진 여성이라고 통감했다. 자신의 도덕을 설파하기란 쉬워도 몸소 실천하며 사는건 어렵다. 하지만 할머니는 실제로 제주도에 계신 외삼춘이랑 며느리 고생 안시키려고 40-45km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홀로 독립 생활을 영위하셨다. 또한 자신의 세대와는 달라졌다는 걸 인식하고 손녀딸의 생활 방식을 쿨하게 인정하셨다는 점에서 보통 어르신들과는 참 다르다고 느꼈다.
나는 김순이 시인을 '순이삼춘'이라고 부른다. 제주도에선형님,누님,아주머니,아저씨,할머니.할아버지 같은 호칭은 엄격하게 자신의 진짜 살붙이에게만 쓰고 남을 부를 때는 모두 삼춘(삼촌)이라고 한다. 현 기영 소설 「순이삼촌」의 주인공은 순이의 삼촌이 아니고 순이라는 이름 을 가진 아주머니를 말한다. 김순이 시인은 언제나 그랬듯이 흔쾌히 내 청에 응해 우리 학생들에게 제주어로 조곤조곤 얘기를 풀어갔다.
,
"본향당이란 제주사람들, 특히 제주 여인네들 영혼의 동사무소, 요즘 말로 하면 주민센터예요. 제주 여인네들은 자기 삶에서 일어난 모든 것 을 본향당에 와서 신고한답니다. 아기를 낳았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사고가 났다, 돈을 벌었다, 농사를 망쳤다, 육지에 갔다왔다. 자동차 를 샀다, 우리 애 이번에 수능시험 본다, 우리 남편 바람난 것 같다, 이런 모든 것을 신고하고 고해바칩니다. 제주신의 중요한 특징은 신과 독대 한다는 점입니다. 제주의 신을 할망(할머니)이라고 해요. 할머니에게는 모든 것을 다 들어주는 자애로움이 있잖아요. 어머니만 해도 다소 엄격한 데가 있죠. 여성은 소문 내지 않고 자기 이야기와 고민을 들어줄 사람을 필요로 하는 심리가 있거든요. 답을 몰라서가 아니죠. 그런 하소연을 함으로써 마음의 응어리를 푸는 겁니다.
모진 자연과 싸우며 살아가는 제주인들에겐 이런 할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죠. 심신의 카운슬링 상대로 할망을 모시는 것이라고 생각 하면 됩니다. 나의문화유산답사기_제주편_돌하르방어디감수광_유홍준 저
설문대할망은 제주의 창조 신이다. 할망은 키가 엄청나게 커서 한라산을 베개 삼고 누우면 다리는 현재 제주시 앞바다에 있는 판단섬에 걸쳐졌다. 빨래한 때는 완판점에 빨래를 놓고, 팔은 한라산 꼭대기를 짚고 서서 발로 빨래를 문질러 빨았다고 한다. 앉아서 빨 때는 한라산에 엉덩이를 걸치고 한 다리는 마라도에 걸치고 우도를 빨래판 삼았다고 한다. 할망이 치마 폭에 흙을 담아 나를 때 치마의 터진 구멍으로 조금씩 새어나온 흙더미가 오름이며, 마지막으로 날라다 부은 게 한라산이다.
,
이 할망에게는 아들이 500명이나 있었는데 흉년이 들어 먹을 게 없자 아들을 위해 큰 솥에 죽을 끓이다가 미끄러져서 할망이 솥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그것도 모르고 아들들은 죽을 맛있게 먹었다. 늦게 온 막내 아들이 죽을 푸다 사람 뼈를 발견하자 비로소 어머니 설문대할망이 빠져 죽은 걸 알고 형들을 떠나 서쪽 바다로 가서 차귀도의 바위가 되었고 다른 형제들은 잘못을 뉘우치고 목숨을 끊어 오백장군바위가 되었단다.
,
지금도 한라산에 붉게 피어나는 진달래 철쭉은 그들이 흘린 눈물이라고 한다. 이 오백장군봉 전설은 어느 때인가 불교적 이미지로 바뀌어 지금은 오백나한봉이라고도 불린다.
조선시대 문인들의 한라산 기행문을 보면 한결같이 영실로 올라 오백장군봉의 경관을 예찬했으나 누구도 설문대할망의 전설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아마도 조선시대 문인들 입장에서는 말 같지도 않은 이런 이야기에 관심도 없고 황당한 얘기가 오히려 한심스럽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혹시 이 전설이 근래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있다. 설문대할망의 죽음은 한라산 물장오리의 깊이가 얼마인지 제보러고 갔다가 그만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는 비장한 전설이 따로 있다. 죽을 끓이다 빠져 죽었다는 것은 가난한 시절의 이야기이며, 물장오리의 밑 모를 심연으로 들어가 나오지 못한다는 것은 한라산의 신비함과 함께한 것이다.
2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