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새로운 것보다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 여행지를 선택할 때도 그런 성향이 십분 반영된다. 그래서 갔던 장소에 또 가는 경우가 있는데, 아무리 가도 같은 감정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여행은 도시의 영향보다 시간과 동행이 누구냐에 따라 좌지우지 된다.
좋아하는 여행지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홍콩이다. 지금까지 나는 홍콩에 4번 다녀왔다. 그것도 전부 다 다른 사람과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홍콩을 몇 번 더 가게 될 것 같은 확신이 든다. 나의 첫번째 홍콩은 2011년 만우절 즈음이었다. 그 여행 이후 같이 동행 했던 L과 나는 사귀게 되었는데, 우리가 연인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가 홍콩이었다. L은 생애 첫 해외 여행이었다. 그는 낯선 그 곳에서 익숙하게 제2외국어, 중국어를 구사하는 나를 보고 반했다고 말했다. 2박 4일일정 내내 너무도 맑았다. 빅토리아 피크에 야경을 보며 두근 거리던 마음에는, 아마 높은 곳에 대한 두려움도 섞여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런 걸 구분하기에 우리는 강하게 끌리고 있었다. 나는 만우절 때문인지 믿기 힘들 정도로 들떠 있었고, 스타의 거리에 세워진 장국영의 판넬과 함께 청순한 척 사진을 찍었다.
다시 홍콩에 간 건, 그렇게 좋아하던 L과 헤어지고 두달 후의 일이었다. 그때 일행 중 한명은 L과 친구이기도 한, 나를 좋아했던 (물론 고백 받은 적은 없지만, 누나의 느낌이란 게 그렇다) 남자 동생이었다. 단 둘이 홍콩의 야경도 보고 마카오도 다녀왔다. 마카오에 간 것 그때가 처음이었다. 에그타르트는 열 개도 먹을 수 있을만큼 맛있었고, 망고 주스 역시 달콤했다. 갑작스레 내린 비에도 나는 웃었다. 나는 그 애의 마음을 이용한 셈이었다. 그 애는 카지노에서 오만원 정도를 땄고, 내게 맥도날드 햄버거를 사주었다. 덕분에 나는 L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지울 수 있었다.
세번째 홍콩 여행은 L과 헤어지고 일 년 후에 사귀게 된 남자친구와 함께였다. 그때는 설연휴였던 터라 사람도 많고 문 닫은 곳도 많아서, 가장 뜻대로 되지 않았던 여행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동안과는 다르게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 묵었고, 여유있는 여행을 했다. 다시 그 호텔에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버뷰를 등지고 먹은 조식은 최고였다. 이미 경험 했던 여행지에, 나이를 먹고, 경제적 여유가 생기고 난 후에, 다시 꼭 가보라고 추천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다리 아프게 걷고 또 걸었던 길을 택시 타고 지나가다보면 인생은 끝까지 살아봐야 안다는 흔해 빠진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런 홍콩에 나는 최근 엄마를 모시고 갔었다. 엄마의 생일을 기념했던터라 나는 가장 익숙하게 다닐 수 있는 곳이라고 판단해서 홍콩 여행을 택했다. 엄마는 내가 아주 어릴 적 아빠의 직장에서 지원해준 홍콩 마카오 패키지를 떠올리며, 신나 했다. 그런데 내 그간의 홍콩 여행에 비하면 가장 재미 없는 시간이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투정 부리고, 해외 여행을 오면 본전 생각하는 엄마와의 여행은 마지막 날 파국을 맞을 뻔했다. 다시는 엄마와 단 둘이 해외여행을 가지 않으리라 다짐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내가 가장 해 보고 싶은 것 중에 하나는 혼자 홍콩에 가보는 것이다. 내가 홍콩을 네 번씩이나 다녀왔지만 여전히 가보지 못한 장소가 많다. 데리고 갔던 사람들에게 내가 경험 했던 좋은 것들을 다시 보여주느라, 나는 같은 것을 세번씩 네번씩 보았지 정작, 네 번씩이나 홍콩에 다녀온 것치고는 많은 장소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
홍콩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침사추이 역 스타의 거리(avenue of stars)다. 홍콩의 야경 스팟 중에 한 군데이기도 한 그곳은 저녁 8시면 심포니 오브 라이트라는 레이저 쇼가 진행된다. 물론 그 쇼는 그다지 재미가 없다. 오히려 그 장소는 낮에 더 예쁜 느낌이다. 스타의 거리는 하버시티라는 큰 백화점부터, 역시 유명 포토 스팟인 시계탑을 거쳐, 여러 유명배우들의 손도장이 찍힌 길을 지나, 길 끝 자그마한 스타벅스로 이어진다. 얼음이 금세 녹을 것 같은 사월 즈음, 그 거리에 가 커피를 한 잔을 마시고 싶다. 스타벅스의 아메리카노는 특별할 것이 전혀 없지만 홍콩의 풍경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도시와 너무 다르다. 한강의 건너편에는 죄다 비슷하게 생긴 아파트 천지지만, 홍콩의 하버 주변에는 각기 다른 모양의 빌딩이 서 있다. (어디서 주워 들은 바에 의하면, 홍콩은 똑같은 모양의 건물을 지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갈 때마다 매번 다른 건물이 마음에 남는다. 물론 관람차처럼 그 자체로 귀여운 건, 낮이고 밤이고 사람을 사로잡지만 말이다.
최근 읽은 김영하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에서는 일상의 장소를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고 말했다. 가장 공감가는 내용이었다. 매일 보고 닿는 사물에게 느끼는 감정으로부터 우리는 가끔 이별해줄 필요가 있다.내것이 아닌 낯선 풍경에서만 올라오는 감정은 어떤 값을 치르고라도 얻고 싶다.
내가 나이를 먹고 가치관이 조금씩 바뀌고, 통장의 잔고가 바뀌기 때문에 같은 장소를 가도 다른 경험과 다른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자꾸만 나에게 같은 도시 여행에 돈을 쓰냐고 비아냥 되는 사람들 때문에 가끔 빈정 상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홍콩에 가고 싶다. 그곳에는 함께 있었던 사람과 나눈 말, 나눈 감정이 고스란히 머물러 있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