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아메리카노

왜라고 물음을 던졌을 때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은 대개 부정적인 것이 많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조금 객관화 되었을 때 알게 되는 것들도 있지만. 아직까지도 내가 데리고 온 강아지는 한 쪽 눈이 왜 안보이는 건지에 답할 수 없다. 다시 생각해도 가슴이 미어지는데 왜 나는 그런 선택을 해서, 왜 그런 슬픔을 떠안고 살고 있을까.

강아지를 키워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예전에는 애완견, 이라는 단어로 그저 귀여운 동물 정도로 여겼지만 요즘 세상은 다르다. 반려동물이라고 호칭도 변했고 가족 그 자체다. 무지개 다리를 건널 때까지 책임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책임감에 엄청나게 약한 사람이라서(스트레스 받는 사람이라서) 그렇게 어려운 일은 엄두조차 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망고는 도저히 보낼 수 없었다. 순간의 측은지심이라고 해도 십 년 이상을 강아지에게 시간을 양보하고 살아야 하는 일에 선뜻 나섰던 과거의 나를 지금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힘들게 데리고 온 존재는 시각에 문제가 있었고, 그 사실은 우리 집에서 망고가 시간을 보낸지 딱 일주일 만에 알게 됐다. 처음으로 하늘을 원망하고 싶었다, 라는 흔해 빠진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슬픈 일은 동시에 터지고 왜 하필 이렇게 고통스러운 마음은 내게 오는 것인지 도통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선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 행동인데 결과적으론 벌 받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병원에서 선천적이라는 이야기 보단, 뇌에 이상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갑자기 발작이나 마비가 일어나 급사 할 수도 있다는 말까지 들었다. 왜 내가 이렇게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생전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슬픔이 찾아온 날은 지나치게 맑았다. 검사를 받는 망고를 두고 병원 밖으로 나와 원망의 대상을 찾았다. 전화를 걸어 도대체 어디서 강아지를 데리고 온 것인지 그 녀석에 따졌다. 이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소위 말하는 강아지 공장인지 애견샵인지 잠시 주인이었던 그 녀석때문인지. 울고 원망해도 시원하게 밝혀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왜 너는 행복해?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있기 때문이야. 너는 왜 기뻐? 내가 원하던 직장에 취직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너는 왜 울고 있어? 잘 모르겠어.

마음이 아파서 사고 회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대답을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슬픔이라는 건 일상을 무너뜨리기 딱 알맞은 형태니까 말이다. 왜라는 의문에 정확하게 답을 할 수 있는 때가 오면 더 이상 괴롭지도 눈물나지도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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