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캣브로 Aug 26. 2022

전쟁터를 오가는 회사원의 치열한 기록

헛개잡상인, #18

기상나팔 소리 같은 알람 소리에 눈이 뜨인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본다. 쏟아지는 폭우에 비를 잔뜩 머금은 종이 박스처럼, 전날의 폭음에 만신창이가 된 몸이 무겁기만 하다. 몸은 움직이나 마음은 아직 침대에 묶여 있고, 눈은 떴으나 꿈과 현실을 구별할 수 없다. 샤워를 하면 좀 깨려나?


능숙하게 샤워기를 걸이에서 빼낸다. 정확한 사격을 위해 가늠자를 조정하는 병사처럼 신중하게 온도를 맞춘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작업에 오늘 하루의 시작이 달려 있다. 이 집에서 최소 삼 년은 산 베테랑들만 수행할 수 있는 작업이다. 쏴아~ 숨을 멎게 하는 빙하와 빨갛게 들끓는 용암 그 사이에 작지만 완벽한 천국이 있다. 그래. 바로 이 온도야.


물을 맞으며 욕실 한쪽 벽 포탄 자국처럼 핀 곰팡이를 멍하게 바라본다. 제길, 어제 조금만 마실걸. 시계를 보니 5분이나 지났다. 정신 차려야지. 이러다 늦겠어. 몸을 대충 닦는 둥 마는 둥 나와서는 뻑뻑해진 얼굴에 곧장 스킨로션을 바른다. 호시탐탐 흠을 잡을 기회만 보고 있는 적군들로부터 나를 지켜 줄 위장 크림이다.


전투복을 입는다. 오늘은 회의가 있으니 흰 셔츠가 좋겠다. 쥐색 바지는 너무 딱딱해 보이니까 베이지색 바지로 무게감을 좀만 덜자. 됐다. 전쟁터로 떠날 채비를 마치자마자 집을 나선다. 날씨 참 더럽게도 좋다. 니코틴을 충전하고 지옥철이라 불리는 수송 열차에 몸을 던진다. 피아 식별이 되지 않는 사람들과 한데 뒤엉킨다. 뾰족한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계속 찌르는 이 사람은 아군일까, 적군일까?



군장처럼 무겁게만 느껴지는 이 비루한 일신을 끌고 전쟁터로 향한다. 도착했다. 건물에 들어서니 경비 아저씨가 보초병처럼 건조하게 인사를 건넨다.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에 입장한다. 곧 전쟁이 시작된다.


오늘도 소탕해야 할 빡빡한 업무가 산더미다. 가슴을 후비는 민원인들의 전화가 총알처럼 빗발친다. 나도 사무실의 전우들도 용케 버티고 있다. 이런... 카페인이 떨어졌다. 무기가 없이 회사원은 싸울 수가 없다. 다행히 전화 사격이 멎고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특수 부대원처럼 맹렬히 탕비실로 달려가 커피 머신을 작동한다. 좋아. 무기는 충분하다. 고지가 보인다. 좀만 더 버티자. 이제 곧 점심시간이 온다.


오늘 메뉴는 순댓국. 스태미나를 소진한 회사원에게는 꼭 섭취해야 할 전투 식량이자 전날의 음주로 쓰린 속을 달래 줄 최고의 보급품이다. 동료들과 식사를 하며 걸쭉한 욕설이 섞인 농담을 주고받는다. 이곳에서 믿을 수 있는 건 동료들 뿐이다. 다 먹었으니 이제 돌아가자. 이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나려면 아직 5시간이나 더 남았다.


전화를 받느라 아직 기획안은 손도 대지 못했다. 이곳에서 나는 전략을 수립하는 장교가 되었다가 적진에 홀로 투하되는 공수부대원이 되기도 한다. 오늘은 프락치로 활동을 해 보자. 업무를 하는 척 몰래 핸드폰으로 주식 차트를 살펴본다. 시퍼렇다. 괜히 봤다. 다시 업무에 집중을 해 본다.


어느덧 6시. 길고 긴 행군의 끝은 언제나 달콤하다. 셔츠는 땀에 절었고, 에센스를 발라 곱게 넘긴 머리는 어느새 떡이 졌지만 이 순간만큼은 신도 부럽지 않다. 게다가 오늘은 금요일이니 더할 나위 없다. 그러나 화는 언제나 방심할 때 찾아오는 법. 이럴 때일수록 정신 무장을 해야 한다. 주말 잘 보내세요. 어느 때보다 우렁찬 인사와 함께 사무실을 나와 동료들과 약속한 회식 장소로 향한다.


해이해진 정신을 무장하는 데는 역시 회식이 최고다. 이로써 오늘도 카페인, 니코틴에 알코올까지 직장인의 필수 3대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는 셈이다. 이번 주는 유독 길었다. 그러나 다음 주도 마찬가지겠지. 오늘은 조금만, 정말로 조금만 마셔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팬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