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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만난 바선생 이야기

by 유긍정


일본에서 여름을 지내본 적 있으십니까?



모두 아시다시피 섬나라인 일본은 습도가 굉장히 높다. 일본 여행을 계획할 때에도 아마 여름은 제외 일 것이다. 여름 내내 꿉꿉하고 습한 날씨가 계속되는데, 장마철이나 비가 오는 날은 그 끈적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혹시 이런 습한 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려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런 습도가 높은 곳을 아주 좋아하는 생명체를 알고 있다. 바로,

바퀴벌레


정말이지 끔찍하고 징그럽고 더럽고 너무너무 싫어하는 생명체이다... 그런데 이런 벌레가 뭐 대단하다고 선생님이라는 호칭까지 붙여줬는지 모르겠다. 친구들이 바선생 바선생하면서 이야기를 하길래 난 그게 뭔가 했다. 물어보니 바퀴벌레라는 말도 꺼내기 싫고 그 단어조차 징그럽다 하여 바선생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실제로 어떤 유래로 선생님 호칭이 붙게 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나는 이렇게 극도로 싫어하는 이 바선생과의 일대일 다이다이에서 맹렬히 싸워 이긴 전력이 있다. 마치 전쟁과도 같았던 이 몇 시간은 나에게 엄청난 승리감과 눈물과 감동, 그리고 다음날 하루종일 앓아눕게 되는 몸살을 선사했다.




때는 바야흐로 2013년 여름, 일본 도쿄의 습하디 습한 어느 한 맨션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룸메이트가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한국으로 먼저 떠났고, 나는 일주일정도 후에 떠날 예정이어서 집에서 혼자 지내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2층 침대를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그중 2층을 쓰고 있었지만 룸메가 한국에 간 사이, 룸메 허락을 받고 가끔 1층 침대에서 잠을 자곤 했다. 사건 당일에도 2층 올라가는 게 귀찮아 1층에서 유튜브를 보며 뒹굴뒹굴하다 새벽쯤 잠이 들었다. 불도 못 끈 채 그렇게 한참을 자고 있었는데, 누가 자꾸 쳐다보는 기분이 들어 살짝 잠에서 깼다. 무거운 눈꺼풀을 꿈뻑꿈뻑하며 힘겹게 눈을 떴는데,


내 눈앞에 검지손가락만 한 검은 물체가 길고 얇은 더듬이를 흔들거리며 나를 노려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아들의 장난감 바선생


"꺄아아아아아앆!!!!!!!!!!!"


새벽이고 나발이고 소리를 꽥 질러버렸다. 이놈에 바퀴벌레 기가 세도 너무 세다. 저놈이 노려보는 눈빛에 잠까지 깨다니... 너무 무섭고 혼자만 한국으로 가 버린 룸메가 원망스럽고 또, 저걸 어떻게 죽이지 하고 걱정도 되고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일단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이 사건이 보통 사건이 아니라 나에게 지금 대재앙이 일어났구나를 알리는 일이 벌어졌다.


바선생이 무려 두 날개를 펼쳐 날아다니는 것이었다.


그냥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난 이제 어쩌나. 이 작은 집에서 어떻게 살아나갈 수 있을까. 아니 그냥 집에서 도망쳐 버릴까? 그러다 알이라도 까버리면?...'


나는 애써 침착했고, 저 바퀴벌레를 꼭 죽일 것이고 이 집을 바선생 따위가 점령하게 둘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가장 먼저 모자가 달린 큰 타월을 꺼내와 바퀴벌레와 내 몸의 접촉이 없도록 그 타월을 방패처럼 몸에 착용했다. 무기로는 집에서 가장 두꺼운 패션잡지를 골랐다. 그리고 저 두 날개를 접어 바닥 한가운데 착지하기만을 기다렸다. 혼자 바락바락 울듯이 소리를 지르며 날아다니는 바퀴벌레를 혼신의 힘을 다해 피해 다녔고, 바선생이 벽에 한참을 앉아 있을 때면 내 전략을 까맣게 잊고, 그 무거운 잡지를 벽을 향해 휘두르곤 했다. 당연히 대미지도 입히지 못하고 파락 파락 날아가 버리는 바선생님... 그래도 눈앞에 보이면 그나마 괜찮다. 그러다 어디론가 날아가서 눈앞에 보이지도 않을 때면, 내 몸에 붙은 건 아닌가 하고 혼자 오두방정을 떨며 접신이라도 한 듯 사정없이 몸을 털었다.


그러다 내게 기회가 왔다. 드디어 바닥 한가운데에 착지한 바선생. 기회는 한 번뿐. 놓쳐서는 안 된다.


완전히 방심한 바선생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가 있는 힘껏 폭탄 투하!

두꺼운 잡지로 내려친 것만으로는 저 끈질긴 생명줄이 끊어졌을지 안 끊어졌을지 알 수가 없어 그 위에 올라가 몇 번이고 있는 힘껏 점프를 했다.


이제 마지막 남은 관문은 시체처리.


참 오랜 시간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바퀴벌레는 번식력이 강해서 죽을 때도 알을 까면서 죽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저 잡지책을 드는 순간 무슨 일이 또 내 눈앞에서 벌어질지, 어떤 끔찍한 광경을 목격해야만 하는지 알들이 후두두둑 떨어지는 건 아닌지! 혹시 바선생이 아직 살아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도저히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집에서 가장 큰 비닐봉지를 가져와 위생장갑을 양손에 끼고 잡지책을 들어냈다. 내 묵직한 점프덕에 시체는 잡지책 밑바닥에 찰싹 달라붙은 모양이었다. 다행히 시체가 바닥에 떨어지지 않아서 바선생의 마지막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날 하루 중 나의 유일한 다행이었다.

잡지책은 비닐봉지에 잘 봉하여 쓰레기장에 버렸고, 나는 동이 틀 때까지 바닥을 열심히 닦고 또 닦고, 벽에 닿았던 곳도 기억나는 한에서는 깨끗이 닦고 또 닦았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몸살로 앓아누웠고, 바선생의 고고한 모습은 트라우마로 남아, 내가 가장 증오하는 지구상의 생명체 1위에 등극하게 되었다.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그 바선생과의 첫 대면은 그림의 한 장면처럼 뇌리에 박혀있다.

전쟁과도 같았던 이 전투 과정에서 이곳저곳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바선생 때문에 새벽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꺅꺅 비명을 질러대며 오두방정을 떨었던 나는 주민 신고가 들어올까 걱정이 됐다. 다행히 다음 날까지도 신고는 없었고 이웃 주민들의 깊은 아량에 혼자 속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2013년의 어느 여름날, 내가 겪은 아닌 달밤에 홍두깨 같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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