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순두비 Jul 03. 2022

조용히, 이대로 사라질 방법을 고민하다

그런 방법이 있을까?

조용히 태어나는 사람은 세상에 있을 수 없고, 시끄럽게 죽어있는 사람 역시 있을 수 없다. 우렁차게 울며 세상 밖으로 나오던 순간, 우린 하나같이 눈이 부셔 있는 힘껏 눈을 찌푸린다. 모두가 웃고, 나만 울고 있는 세상. 반대로 내가 죽을 때면 나만 웃은 채 영정사진 속에서 나를 보며 우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삶과 죽음은 대조적으로 표현되고, 또 그러리라 생각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지금 내 삶이 고통스럽다면 죽음 너머의 삶은 이곳보다 나을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오늘의 생동감으로 하루를 가득 채운다면 죽음은 내 모든 것을 앗아가는 무서운 미지의 영역이 된다. 그래서 다수의 우울증 환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 이불속으로 침잠해버린 자신을 두고, 살아있지만 죽은 것 같은 상태로 여긴다.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죽을 방법을 궁리한다던가.


부산에 내려온 나 역시 그랬다.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다. 한 번 더 시험을 응시하고, 그 후엔 대개의 고시생들이 그렇듯 공공기관에 취업하기 위해 이곳저곳에 원서를 냈다. 살면서 전력, 철도, 항만 같은 분야와 관련하여선 요금밖에 내본 게 없는데도 천년 동안 입사하기 위해 해당 기업을 사랑한 것처럼 지원동기를 갈겨썼다. 공기업을 준비하다 보면 블라인드 테스트라곤 하지만, 나 같은 허수를 거르는 무슨 시스템이 있는 게 아닐까 의심도 하게 된다. 아니면 자기소개서에서도 나의 불안이 엿보였는지 1년이면 열댓 번도 더 불합격의 쓴 맛을 보았다. 거의 붙었다, 이만하면 붙었다 싶었던 곳마저 떨어졌을 때 나는 눈물을 흘렸다. 막연하게 붙길 바랐지만 또 붙지 않길 바랬다. 붙지 않았단 안도감인지 또 나는 28살 백수 타이틀을 달아야 한단 불안감에서였는지 변기통을 붙잡고 오열했다. 우리 집 변기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의 갖은 떼를 받아주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성적이 잘 안 나오면 먹은 걸 토하러 들어가기도 하고, 변기 뚜껑에 앉아 울기도 하고. 차라리 화장실 공기업이 있었더라면 스토리텔링은 완벽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정말 절실하게, 전기료를 수납하고  필요할 때 열차와 배를 이용하는 승객이고 싶었을 뿐 그곳에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일랑 내 삶과는 맞지 않는 듯했다. 외교관이 되어 오지에 떨어진 자국민을 위해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 해서 내가 좋아하는 분야도 아니었다. 대체 이들이 모집하는 행정인력이란 게 무얼 잘해야 할 수 있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탈락은 탈락, 합격하고 싫은 티를 냈다면 나았을까. 연이은 불합격 소식은 나를 병들게 했다. 한 번은 밤만 되면 맥박이 급속도로 올라가 두 어시간동안 분당 190번을 뛰었다. 헤드셋을 끼고 귀를 틀어막으면 심장 뛰는 소리가 뒤통수까지 울려댔다. 잠을 못 이루는 것은 다반사, 물에 풀어진 겨죽처럼 늘 기운이 없었다. 그러다 또 기운이 없고 몹시 힘들었던 날, 밤이 되자 열이 펄펄 끓어 타이레놀을 먹고 엄마 옆에서 가쁜 심장과 함께 잠들었다. 아침에도 여전히 열은 떨어지지 않았고, 병원에 가니 독감이란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우리 동네 핫플레이스 병원임에도 내가 그 해 최초의 독감 환자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다소 쿨한 의사 선생님은 축하도 해주셨다. 내가 대기실의 그 수많은 노약자들을 제친 것이다.


의사 선생님은 맥박이 이렇게까지 빨리 뛰는데, 이상한 점을 못 느꼈냐며 어떻게 아침까지 견딘 건지 물었다. 나는 노력하는 것에도 이골 난 사람이었지만, 참는 것에도 일가견이 생겨있었다. 고시생들은 무엇이든 잘 참는다.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깝고, 밥 먹는 시간도 아까우니 모든 걸 효율적으로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생리적인 현상도 참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고시생들이 수행을 하고 있다는 뭇 의견에 격하게 동의한다. 그렇게 엄마는 나에게 수액을 맞추어주셨고, 지루하게 한 두 방울씩 떨어지던 수액이 내 몸속으로 다 들어갈 때까지 엄마의 시간도 흘러갔다. 한 방울씩 억겁의 시간 동안 한 곳에 떨어진 물방울들은 커다란 바위도 쪼갠단다. 나는 내가 받은 사랑을 오해했다. 그때 나를 포위한 침울함을 부수기 위해 숱한 물방울이 사랑을 담아 떨어졌을텐데. 내가 행복하게 사는데 쓰지 않고 내가 번듯하게 잘 되어야 한다는 강박, 내 밑에 들어간 돈이 많다는 계산, 이런 것들로 치환했다. 그러고 나니 내가 딛고 설 땅이 눅눅해져서는 홀로 서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잘못 쓰인 페이지는 대강의 수정으로 고쳐지지 않았다. 더 열심히, 더 열심히 몸을 갈아서라도 열심히 하면 이런 내가 불쌍해서 무엇이라도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믿었다. 잘못된 열망으로 내 행복을 세상에 맡겨둔 듯한 행동에 보란 듯이 세상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행복은 행복이지, 조건부 행복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노력하면 잘된다고 했는데. 공부를 잘하면 성공한다 했는데. 얼마나 많은 책들이 나를 속인 것인가, 또 얼마나 많은 위인들이 나를 속인 것인가. 화를 내고 싶은데 화낼 곳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 독은 또 내게로 돌아왔고, 그때부터 나는 조용히 사라질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태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태어나게 된 것에 어떤 뜻이 있는 것 같은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제발 미물 하나를 죽게 해달라고 빌었다. 철저하게 누워서.


이처럼 수동적일수가. 모든 의지를 상실하면 죽음도 그냥 기다린다. 휴대폰을 보고 있다 보면 언젠가 죽을 수도 있단 생각을 하며 폰을 봤다. 세상은 나 빼고 즐거운 게 부러웠지만 다 괜찮았다. 어차피 나는 곧 죽을 테니까, 나도 나의 행복으로 금방 가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기도한다고 삶이 거두어질 리가 없었고, 나는 도파민 없인 살 수 없는 상태의 스마트폰 중독이 되었다. 분명 수험에 실패한 낙오자의 고독사 같은 다큐멘터리가 될 줄 알았는데, 장르가 바뀌어가고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웹소설 식으로 제목을 뽑아보자면, '자살하려 했는데 게임 고렙 유저가 되어버렸다.' 같은 식으로. 5명이 한 팀이 되어서 경기하는 게임에서 나는 자주 에이스가 되었다. 친구들과의 사이는 늘 좋았다. 나는 게임도 잘하고, 시간이 많으니 이야기도 많이 들어주는 좋은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안 죽고 싶어진 거냐 묻는다면, 아니다. 매일 죽을 궁리를 했다. 우울증 환자가 가장 위험한 때는 바로 느닷없이 용기가 생겼을 때다. 용기가 샘솟는 날, 나는 그날만큼은 능동적으로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힘차게 집을 나섰다. 죽은 나의 몸에서 돈 되는 금붙이를 누가 가져갈까봐 화장대 위에 모조리 빼놓았다. 그러면 엄마도 뭔갈 아는 눈치인지 그날따라 전화가 와서는 왜 목걸이와 반지 등을 빼두고 간 것인지 물어보셨다.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갑갑해서'였다. 그리고, 지은 죄도 없는 남자 친구는 죽고 싶단 나의 사의 찬미를 한참 동안 들어야 했다. 한심하게도 죽을 자신이 없던 나는, 나를 태어나게 한 어떤 존재를 탓하기 시작했다. 당신 같은 건 없는 거라고, 노력은 내가 할 테니 건강하게만 해달라는 기도에도 나의 건강을 아작내고, 이젠 절망밖에 남지 않았으니 당신이 준 삶을 살고 싶지 않다고 악을 썼다.


산 정상에 올라 소리라도 냈어야 들으셨을진 모르겠다. 다시 일러두지만, 나는 누워서 악을 썼다. 그렇게 1년도 더 넘는 시간이 흐르고, 또 내가 무서워하는 겨울이란 계절이 올 때쯤 나는 누워있던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가진 돈도 떨어졌겠다, 부모님께 이 얘기를 할 수도 없고 이렇게나 지루한 걸 보니 내게 살 날이 많이 남지 않았을 것 같았다. 제풀에 지친 나는 일어나 앉아 컴퓨터를 켰다. 자기소개서나 써보자 싶어 들어간 웹페이지에서 우연히 문안 공모전을 보게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걸리면 돈이나 벌 수 있고 좋겠다는 생각에 3분도 채 걸리지 않게 짧은 글을 써서 제출했다. 그리고 떨어졌는지 붙었는지도 관심 없이 모두가 나간 시간에 낮잠을 자다 깼는데, 휴대폰에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었다. 서울 지역번호였다. 부산 사람들은 서울에서 온 전화를 받지 않는데, 곧이어 문자가 왔다. 문안 공모전에서 당선되었으니, 인터뷰지와 함께 상금을 보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1300대 1, 그해 문안 공모전은 새 봄을 맞아 엄청난 경쟁률을 기록했다고 했다. 몹쓸 세상, 죽어보려고 했는데 내 이름을 서울 시청 근처 도서관에 크게 걸어주었다. 이것 좀 말려보라고, 조용히 없어지고 싶다고 1년도 넘게 궁리를 했는데. 내 바람과 정성을 또 무시한 채 나의 운명의 달구지는 절뚝거리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약 3달간 내 이름은 서울도서관 앞에 걸려 있었으며, 가족과 친척, 친구들의 자랑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별안간 수중에 100만 원이 생긴 것이다. 아무래도 장르가 한참 잘못됐음을 느꼈다. 이대로 사라지고 싶지가 않았다. 꽤 오랜 시간 그것만 고민했는데도 사라질 방법을 찾지 못했다. 내 인터넷 서점의 장바구니엔 30권도 넘는 책이 담겨있었는데, 그것들이 생각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