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오르던 계단이 유독 벅차다면
당신이 지쳤단 신호
엄마는 자취하는 내게 자주 반찬을 보내주셨다. 바빠도 굶지 말고, 밥은 20분이면 다 되니까. 꼭 밥을 안치고 뭘 해도 하라고 일러두셨다. 엄마의 반찬이 택배로 올 때면 한껏 기대하며 빌라 1층으로 내려가 택배를 들고 올라왔다. 엄만 한 번에 더 많은 걸 보내주고 싶어서 작은 틈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으셨다. 차고 넘치는 사랑, 그에 맞게 나는 무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또 엄마의 택배가 부산에서 서울까지 먼 길을 올라온 날, 나는 고작 1층에서 4층 높이의 계단을 오를 수가 없었다. 가는 중에 녹지 말라고 스티로폼 박스에 얼음팩과 함께 도착한 나의 택배. 부피가 커서 한껏 안아보았는데, 꽤 묵직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소고기 뭇국을 끓여 몇 개의 봉지에 나누어 담아두었을 거란 걸. 겨우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계단을 올랐다. 1층, 2층, 3층. 한 번을 쉬고 다시 4층. 조금만 걸어가면 우리 집인데 그날따라 택배 박스가 무거웠다. 하지만 보통의 날과 같단 생각, 평소에 하던 것이니 할 수 있단 생각은 나를 소진해갔다. 그리고 허상 속에 살게 하는 것엔 부족함이 없었다. 오늘도 내가 해냈단 의미를 남기기 때문에, 불쌍하게도 지친 나는 그 속에 가려지고 마는 것이다.
불 꺼진 방에 들어서는데 어둑해진 시간대의 내 방엔 빛 한 점이 들지 않았다. 붙어있는 건물들, 누가 볼까 봐 내려놓은 블라인드, 신경질적으로 토하는 위층 사람의 소리, 그 무엇도 편한 것이 없지만 내 서울살이에서 기댈 곳이란 이곳밖에 없었다. 택배 박스를 겨우 내려놓는데, 너무 무거워서 눈물이 났다. 계단이 많아서 눈물이 난 건지, 무거워서 눈물이 난 건지. 손에서 미끄러진 박스를 그대로 바닥에 떨구며 나는 침대 모서리에 기대어 한참을 울었다. 그러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선 부산에 내려가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엄만 모레 있을 시험만 치고 내려오면 어떻겠냐고 했다. 엄만 정신 차렸을 때의 내가 후회하지 않을 선택지를 제안하신 것이다.
외교관이 될 거라며 신림동에 작은 방을 구해 자취하던 시절이었다. 호기롭게 시험에 붙을 때까진 집에 내려가지 않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나를 통제하는 것이 수험생의 미덕이라 여겼다. 누리고 싶은 걸 다 누리다간 합격의 행운도 멀어질 것이라고 미련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걸 줄여서 미생이라 해야 하는 건가. 나는 내게 박했다. 대부분의 수험생이 그렇다. 스스로에게 박하다. 아침부터 빼곡하게 차있는 하루 일정, 온종일을 바치고도 부족한 공부 시간. 사회에서 끝도 없이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단 생각에 수험생은 늘 허핍하다. 내가 그랬기 때문에, 그리고 나와보니 내게 그래선 안됐다는 걸 이젠 알기 때문에 그 시절이 얼마나 춥고 외로웠을지 알게 된다. 그때 나는 끼니를 잘 때우지도 못했다. 극도의 스트레스로 위에서 받아주는 음식이 없었다. 하루에 한 끼, 친한 수험생 언니와 밥을 먹으면 두 끼. 겨우 먹고살았다.
그리고 그 맘때 쳤던 시험에 대해선 말할 것도 없이 낙방했다. 덜덜 떨면서 공부하는 내게 남아있는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한 해를 넘기고, 예상보다 준비기간이 길어져갔다. 어떻게든 해내야 하고, 노력하는 거라면 이골이 나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열정에서 밀리고 싶진 않았다. 금의환향, 장원 급제한 내가 고향인 부산에 내려올 땐 금으로 된 옷을 입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용을 쓰던 나에게 내 몸이 메시지를 남겼다. 그 말을 긴밀히 하려고 한 건지 나는 잠깐 정신을 잃었다. 눈떠보니 캄캄한 밤, 죽지 않았음에 안도한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 공부를 다하지 못한 걸 어떻게 다 채워야 할지 몰라 당황하며 일어났다. 몸이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게 아닐텐데, 또 한 번 빛이 들지 않는 방 안에서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느꼈다.
곧장 부산으로 내려왔다. 부산에서 공부를 이어갈 거라고 같이 공부하던 동료들, 거의 전우에 가깝던 이들에게 안녕을 고했다. 언니와 오빠들은 필요한 게 있으면 꼭 연락 달라고 하며 배웅해주었다. 마음만큼은 함께 있으니까 홀로 부산에 내려와서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은둔 고수 같은 걸 상상했다. 고시촌에 없었지만, 느닷없이 합격한 어떤 20대! 멋진 타이틀이라 생각했다. 부모님과 사랑하는 친구들이 더 많이 있는 부산. 이곳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 기대됐다. 더 좋은 환경인 것은 분명하니까. 엄마의 사랑도 먼 길을 달려오지 않아도 되고 나도 더는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되니까 공부하기에 너무 좋은 환경일 거라고. 그러니 정말 공부만 하면, 노력만 하면 모든 게 좋아질 거라고 믿으며 부산으로 내려오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꿈에도 그리워하던 부산, 부산에 내려오면 괜찮아질 줄 알았던 모든 것들. 그 무엇도 괜찮아지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하루를 사는 게 버거웠고, 음식을 먹는 게 먹는 것 같지 않았으며, 알 수 없는 하혈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나는 자주 죽는 상상을 했다. 꿈은 눈앞에 있는데 잡히지 않는 이유엔 노력하지 못하는 내가 있기 때문이라 여겼다. 공부를 하고는 있지만 나를 탓하기 바빠 집중할 수 없어 괴로웠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 무엇도 못해낸 사람, 나이에 맞지 않게 직업이 아직 없는 사람, 내가 이 나잇대에 되었어야 하는 것이 되지 못하자 나는 내게 온갖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다 문득 나는 어느 날 계단을 오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외교관이 될 수 있는데, 아직 못 된 거야.'
그렇게 믿자 마음이 또 편해지는 것 같았다. 시간을 벌어놓은 것이다. '아직'이니까. 언젠가는 될 거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뿌듯했다. 그렇게 허상 속에 살던 나는 어느 날 밤,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는 바람에 잠을 깼다. 그리곤 심장이 내 가슴 가죽을 세게 치는 소리에 전에 없던 공포를 느꼈다. 이상하다곤 생각했지만 어차피 나는 몸이 약한 사람이라 믿었기 때문에 원인조차 알고 싶지 않았다. 원인은 내 몸이 허약해서, 그렇게 생각하면 심장이 별안간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겁을 먹고 며칠을 조심하며 살았다. 이런 걸 부정맥이라고 하는 건지,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는데 정상이었다. 아닌데, 심장이 이따금씩 이상하게 뛰는데 나는 정상이었다. 부모님께선 몸이 약한 나를 걱정하며 내게 허혈성 심장 보험을 들어주었다. 때마침 좋은 상품이 있었고, 그때를 계기로 운이 좋은 나는 심장이 튼튼함에도 심장 건강을 더욱 챙길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문제는 건강이 아니라 다른 것에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내가 혼자 버스를 타면 숨이 막힌다는 것과 자꾸 존재감을 드러내는 심장 탓에 그나마 생산적이었던 아침 복싱 클래스에도 나가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무시하고 일상대로 살다 보니, 다시 한번 그 공포가 엄습했다. 그때야 알았다. 내 세상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것을. 혼자 해낼 수 있는 게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이 공포의 기원은 그날 시험을 포기하지 않아서 일어난 것일 거라 생각했다. 평소와 같은 계단을 유독 오르기 힘들었던 날, 나는 다시 계단을 내려가 나를 돌봐야 했다. 오늘도 이겨냈고 그 덕에 해냈다는 건 무엇이든 결과로서 보여야 하는 수험생의 절박한 착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