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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두비 Aug 08. 2022

운명이 말하길, 이 길로 가라고 했는데

잘못 알아들었다.

우연찮게 수상을 한 이후로, 나는 수상이력이 나를 증명한다고 믿게 되었. 미친 듯이 공모전에 글을 써서 냈고 그만 좀 확인하라는 듯 우연은 내게 여러 가지 상을 었다. 그리고 내가 드디어 잘 풀릴 '운기'가 왔다는 주변 어르신들의 이야길 들으며 나 역시 기대하며 기다렸다. 그런데 또 한 번의 겨울이 올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이렇게 상을 많이 받으면 누군가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 세상에 나오는 것이 여전히 무서웠다. 나를 끄집어 내주길 바라는 태도였다. 나는 내 삶을 운명에 맡긴 듯 행동하면서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현실에 매일 실망했다. 또 상을 받으면, 그땐 나도 나를 믿어보겠노라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공모전에 글을 냈다. 기적처럼 또 한 번의 상을 받았다. 그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무렵, 같은 대회에 공모하여 또다시 상을 받은 것이다. 이만하면 그만하고 세상으로 나가라는 의미였는지 그 해 나는 작가라는 이름을 달고 활동할 수 있는 직장에 들어가게 됐다. 모든 일은 느닷없이, 나의 뜻은 아주 조금만 반영되어, 하지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집에서 편도 50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회사는 첫인상부터 좋은 곳이었다. 면접을 보는데, 공백기 동안 무엇을 했는지 아주 조심스럽게 물어보셨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이라는 다정한 말로 살펴주셨고, 나는 아팠던 시간과 그간의 투쟁을 말씀드리며 회사에 대한 거리감을 좁힐 수 있었다. 그리고 면접을 본지 얼마 되지 않아 합격 소식을 들었다. 첫 출근 날이 다가오고, 나이 많은 신입인 내가 혼자 사무실에 들어서는 상상을 하느라 잠을 설쳤다. 그러다 나는 한 가지 다짐을 하게 되었는데, 입사를 하게 되더라도 그곳에서 겪는 어떤 일에도 연연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건 늦게 사회에 나온 나에게 붙는 일종의 페널티 같은 것일 수 있으며, 스스로에겐 앞으로 펼쳐질 일에 대한 방책 같은 다짐이었다.


대망의 첫 출근 날, 어색하게 사무실로 들어가 안내해 주시는 곳에 앉아 대기했다. 그러는 동안, 하나둘 또래로 보이지만 언뜻 더 어려 보이는 이들이 들어오더니 나를 포함해 7명이나 되는 신입이 둘러앉게 되었다. 다소 나이 많은 사회초년생인 만큼 내 근없는 용기가 있었다. 먼저 말을 걸어보았는데 역시나 내 나이가 가장 많았다. 속으론 이러다 외톨이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착한 동기들은 나를 맏언니처럼 믿고 따라주었다. 우린 똑같이 6개월의 계약직으로 입사하여 꽤나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야근이 잦았고, 야근을 하고 난 이후엔 시간이 부족해 이른 출근도 뒤따랐다. 그러다 보니 낮잠 방이 붐볐고, 이따금씩 베란다에서 회사 건물이 들어선 곳 광장에 우뚝 솟은 전자시계를 봤다. 바쁜 광고인의 시간, 바삐 뛰어다니던 우리의 연대는 두 계절 동안 끈끈해져 갔다. 점심 식사 이후 계절을 느끼며 벚꽃도 보고, 햇살을 몸에 채워 넣으며 해질 무렵 수영강의 윤슬에 눈을 반짝였다. 다시 돌아오는 가을엔 함께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저마다의 하루에는 동기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함께 했다. 영양제를 추천하며 서로의 건강을 살피고, 자신이 맡은 프로젝트가 끝나면 서로의 일을 도왔다.


6개월 후, 정규직 심사에서 나는 조금 다른 꿈을 꾸었다. 공공 PR 영상을 만들어서인지 내가 좋아하는 해양생물이 자꾸 눈에 밟혔다. 해양 생물들을 살리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살 순 없을지 고민하다 보니, 할 줄 아는 게 공부뿐이었던 때라 또다시 공부를 해야겠단 결론을 냈었다. 대학원 진학이란 카드가 생긴 것이다. 정규직 제안을 하는 자리에서 나는 회사를 나가겠노라 얘길 고, 선임 작가님과 독대를 했다. 작가님께선 나를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녀의 마음이 일렁이고, 그 다감한 마음씨가 눈물로 맺혀 흐를 때까지 나와의 시간을 아쉬워하셨다. 나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사수, 든 야근을 함께 하며 내 실수로 퇴근이 늦어져도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던 사람. 모두가 기운이 빠지는 10시가 넘어서면 괜히 한 번씩 힘내자고 큰 소리로 외쳐주던 작은 거인. 작가님은 내 생애 여전히 첫 번째 작가님으로 남아 계신다. 그리고 퇴사가 다가왔을 때쯤, 동기들과 모여 맥주를 마셨다. 어리고 귀여운, 순수하고 착한, 여러 수식어를 갖다 대어도 다 표현하기 힘든 동기들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내 동생들이 되었다. 나를 껴안고는 연신 떠나지 말라며, 정수리에 뽀뽀를 해주었다. 정수리에 받은 뽀뽀가 어찌나 간지러웠는지 회사를 떠나고 한동안 추위를 느낄 때마다 그 뽀뽀가 절로 생각났다. 체온을 다시 돌려놓으려는 소름이 돋아 몸의 감각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마지막 퇴근을 하는 날, 비로소 앞을 보며 걷게 되었는데 계절이 또 바뀌어있었다. 은행잎이 바닥 가득 떨어져 있었지만 가을이 다 지나는 줄도 모르고 야근을 하던 때가 생각이 났다. 여름이 다가오는데도 나는 어쩐지 추위를 느꼈다. 살이 는 느낌이었다. 다시 숨을 수도 있고 더 나아갈 수도 있는 중대한 시점이었다. 얻고자 한 것은 대학원 진학을 통한 안정적인 지위, 가 바라던 것은 작가, 지위와 소망이 돈으로 치환될 때 사람들은 '성공'이란 이름을 달아준다. 그런데 내겐 학사라는 흔한 학위와 널리고 깔린 작가 지망생 중 하나, '망생'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망한 인생도 아닌데 지망생들은  스스로를 망생이라 다. 밤낮으로 회사에만 붙어있었던 덕에 모아둔 돈은 좀 생겼겠다, 시간까지 붕떠서 구청 공공근로로 일하게 되었다. 창업센터에서 일하며 뭔가 창조적인 일을 해보고 싶었는데, 역시 모든 일은 느닷없이 나의 뜻은 조금만 반영되었다.


그렇게 나는 구청에서 공폐가와 구유지(*구 소유의 땅)를 조사했다.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 일이었지만 체력도 기를 겸 열심히 매일 조사를 나가서 사진을 찍고 돌아왔다. 그때 나는 여러 골목길 사이의 땅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좁고 낯선 골목길에 모퉁이까지 있는 곳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용기를 내고 들어가 보려 해도, 마치 보이지 않는 결계가 쳐져있는 것처럼 발이 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던 몇 조각의 땅이 있었다. 이상했다.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인데,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그건 사고일 텐데. 그런 일은 쉬이 일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사진 한 장을 찍는 건 2초도 걸리지 않는데 그 시간을 낼 수 없어서 발걸음이 디뎌지지 않았다. 그때 들어가지 못했던 땅은 결국 출사를 나갔어도 찍지 못하고 돌아와 공란으로 남겨둔 채 공공근로는 끝이 났다.


바야흐로 코로나가 창궐했고, 친구들이 백신을 맞는 것을 보며 나도 뒤늦게 백신을 맞았다. 병원에 가니 조금 두근두근, 흔히 있는 일이었다. 병원은 무서운 곳이었다. 지병이 있으면 병원은 법원이 된다. 어떤 판결이 내려져 또 얼마나 한동안 조심히 살아야 하는지, 건강에 유의하라며 형을 받는 곳이었다. 하도 그런 이미지가 쌓였던 탓인지 병원 대기실에 앉아있는 것 자체로 긴장했다. 평소처럼 얼른 진료를 보고 벗어나면 괜찮아지겠지 싶어 백신도 얼른 맞았다. 주사를 맞은 뒤 간호사 선생님은 15분간의 대기 시간 동안 가지고 있으라며 스탑 워치를 쥐켜 주셨다. 15분에서 몇 초가 깎이고, 대략 14분 정도가 되었을 때 나는 잠시 시야를 잃었다. 암전처럼 까매진 세상은 빙글 돌기까지 했다. 간신히 옆 자리에 손을 받치고 서 있는데 심장이 또다시 살가죽을 뚫고 튀어나오려 했다. 이러다 죽으면 어떡하지 하는 공포감에 간호사 선생님께도 여쭤보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보라셨다. 그 사이에 나는 죽어가고 있는 것 같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진료를 보기 위해 계단으로 몸을 옮겼다. 손과 발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 계단 난간을 쥐어짜듯 붙잡았다. 때마침 집에 계셨던 아빠한테 전화도 걸었다. 백신을 맞았는데 문제가 생겼으니 병원으로 와줄 수 있냐고 했다. 아빠는 머리를 감으려다가 씻지도 못하고 뛰어왔다며 정신없는 얼굴로 나를 찾아오셨다. 배에 피가 고여 사경을 헤맸던 그 옛날 응급실에서처럼, 부모님의 걱정 가득한 무거운 얼굴을 두 번째로 본 날이었다. 그리고 웃기게도 나는 아무 진단을 받지 못했다. 그저 내가 과민하다는 것이었다.


한 달간 나는 저릿한 심장으로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지냈다.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잠이 들면 내가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아 발작하듯 깨어났고, 낮이면 바르게 숨 쉬지 못해 들숨과 날숨을 계속 체크해가며 안절부절못했다. 맘때의 나는 토지 조사를 하며 알게 된 같잖은 지식을 가지고, 실은 내 운명의 표지판이 땅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착각했다. 공인중개사가 되면 안정적인 타이틀도 얻게 되고 남는 시간에 글을 쓸 수 있으니 적당한 선택지 같았다. 그래서 별안간 공인중개사 공부를 시작하였고, 역시나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개방되어 있는 스터디 카페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시험이 끝나고 잠시 휴식기를 가지던 오빠는 그때마다 나를 챙겨 스터디 카페 근처의 공원으로 데려가 주었다. 신난 강아지들이 흙냄새와 풀냄새를 맡는 곳, 동네 어르신들이 간단한 체조와 수다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내가 공부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어둔 예리한 토지, 내가 좋아했던 것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단란하지만 사람의 눈으로 나눌 수 없는 광막한 대지. 내 운명이 말하는 것은 이 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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