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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두비 Jun 12. 2022

들어가며

세상으로

글의 앞머리, 서은 아니다. 책을 소개할래야 아직 형체도 갖춰지지 않은 이 책을 소개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름은 정해왔다. 그래서 이건 어떤 관문, 그 아래 현판을 달아주는 글이다.


예전에 발행했던 글을 모두 거두어들였었다. 그때 나의 마음은 아무에게도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내 속마음을 괜찮다고 써봤자 현실의 나는 항상 괜찮지 않았다. 그래서 발행했던 글들은 되려 내게 위로가 되는 글이었다. 그간 썼던 글은 대강 슬픔과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나의 과거 없는 서술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젠 과거를 받아들여 나는 그것들에게 진실로 위로를 받게 되었다. 읽고 위로를 받은 분들께 죄송하지만, 실제로 나는 그런 마음가짐만 가지고 되뇐다고 괜찮아지지 않았다. 당시 내게 위로되는 것이란 고양이들의 삶일 뿐, 내 삶과 내 글이 그 역할을 해내진 않았다.

 

제가요?


그렇다. 죽음. 자주 말하고 또 쓰던 죽음이란 것이 내게 성큼 다가왔었다. 나를 그냥 누워있게 만들고, 침상에서 창밖만 보게 만드는 줄로만 알았던 형체 없던 이것이 창졸간 예고도 없이 드리웠다. 그러자 나는 생각보다 꽤 넓었던 나의 세계를 다시 한번 거닐어볼 수 있었다. 갈 수 없는 곳이 늘어났었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조차 혼자 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죽음이란 것을 이해하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타나톨로지라 불리는 죽음학에 관한 글도 읽어보고, 사람은 어떻게 죽는지 책 속에서 답을 구하려고도 해보았다. 죽는 과정에 대해서만 알아가게 되었다. 감각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 그리고 스스로 질문도 많이 했지만 생에 정해진 답이 없는 것처럼 죽음에도 답은 없었다. 하지만 죽음을 떠올릴수록 선명해지는 것은 아직 형체도 알아보지 못한 나의 삶이었다. 그래서 나의 삶도 책도 아직 형체가 없다고 밖에 말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이제야 조금 멀쩡한 작가가 된 것 같다.


글을 쓰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괜찮은 척하지 않고, 괜찮은 척하며 썼던 글을 암기하듯 읽으며 다니지 않아도 됐다. 조막만 했던 숨구멍을 틔워주던 까맣게 죽은 하늘에 수 놓인 하얀 글자들을 나는 과감히 잊고 지냈다. 과거, 글이 매일같이 써지던 이유는 내가 고통 속에 살아서 그랬단 걸, 그 어렵다는 '보통의 삶'의 경계에 서보니 알 수 있었다. 내 삶이 고통에서 조금 벗어나자, 글을 쓰는 건 내게 일이 되었다. 새롭게 본 세상을 기록하는 일, 나누고 싶은 마음을 꾸리는 일.


예전에 쓴 글들은 내가 흘린 피고름이었다. 절뚝이면서 걸어도 절로 흘러나오던 것이었다. 그래서 나의 1호 팬이자, 영원한 나의 사랑인 나의 엄마는 내 글을 읽으며 매번 걱정을 늘어놓았다. 괜찮다고 쓴 글이 엄마의 눈엔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괜찮지 않았지.

  

그래서 글을 모두 내렸지만 내보이진 않아도 혼자 글쓰기를 이어나갔다. 어떤 날의 나를 잊지 않기 위해, 어떤 허무 속에 나를 흘려보내지 않게. 죽음이 그랬다. 죽음이 스치던 순간,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이 수도 없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나는 하고 싶은 게 없어서 누워 지낸 것만 같았는데. 그리곤 그날절박했던 마음을 잊지 말라는 듯 사라져 버렸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겠지만, 그전에 이렇게 등장해준 것이 썩 고맙다고 전해야겠다. 나는, 공황장애이자 우울증, 대인기피증, 불면증, 뭐 이런 것들을 앓고 있었다. 현대 사회를 사는 사람은 누구나 그런 거라 생각하며 몸이 이상하게 피곤하다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인생이 너무 허무하고 남은 것이 없었지만. 다들 이렇게 사는 거라 생각하니 버틸 수는 있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바로 죽지도 않았고, 내가 그 죽음을 조금이라도 경외시 한 덕에 내가 먼저 그에게 손을 내밀진 않아 죽음은 그렇게 나를 스쳐갔다.


새 삶을 살게 되었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약을 여러 알 먹게 되었고, 심리 상담을 받으며 올바른 나를 찾아가고 있다. 흑백의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색을 찾고 싶었던 마음에 매일 같이 쥐어뜯던 발도 많이 나아졌다. 그 덕에 뻘건 영광의 상처를 가지고 걸어가는 나의 걸음 뒤로는 세상에서 처음 보는 꽃들이 핀다. 그리고 그 길을 다시 되돌아오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세상은 피곤해도 잘 자고 일어나는 밤이 있고, 밤이 지나면 또다시 피곤한 세상 속에 눈을 뜨지만 같이 밤을 지낸 풀이파리 끝 한 알의 이슬도 있다. 나는 그래서 다시 글을 쓴다. 이젠 정말 절로 쓰인 글이 아니라 진심을 다해 쓰려고 한다. 너무 힘들었던 지난 10년을 뒤로하고, 나의 눈물 졌던 시간들이 겨울을 막 맞이한 당신에게 툭 떨어져 당신이 받아준다면, 우린 다음 봄에 함께 피어나 따뜻한 이야길 써 내려가 볼 수도 있겠다.


윤생, 예전부터 쓰던 원래 필명이다. 우연히 굴러 떨어진 이슬이 마른 씨앗의 목을 축이는 인연이라는 말이다. 나는 새벽을 잘 지나왔으니, 그 기록을 글자로 줄 세워 말라있는 당신께 흘려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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