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니오 모리꼬네와 스파게티 웨스턴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작곡가 엔니오 모리꼬네가 세상을 떠난지도 벌써 열흘이 흘렀습니다. 존 윌리엄스와 더불어 영화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분들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작곡가인만큼 엔니오 모리꼬네가 현대 문화에서 차지하고 있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합니다. 국내에도 익히 알려진 [시네마 천국], [미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등 엔니오 모리꼬네가 일생동안 만들어낸 작품 세계는 유럽과 미국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 리스트 자체만 보아도 현대 영화가 어떠한 발전을 이루어 왔는지 대략적인 그림이 그려집니다.
흔히 거론되는 엔니오 모리꼬네의 명작들은 대부분 2000년대 이전 작품들이 많아서 저 같은 젊은 영화인들은 엔니오 모리꼬네의 옛 명작들을 영화관에서 볼 기회가 흔치 않은데, 2015년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가 재개봉하면서 저 또한 집 앞에 있는 용산 CGV에서 심야에 작품을 관람했던 기억이 문득 떠오릅니다. 짧지 않은 러닝타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을 콩닥거리며 영화에 계속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엔니오 모리꼬네의 아름다운 음악 덕분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와 반대로 엔니오 모리꼬네가 일생동안 할리우드로부터 받아온 대접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습니다. "할리우드"라는 사회에 소속되지 않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몇십 년간 푸대접을 받아온 그의 일대기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외국인 신분으로 미국에 거주 중인 저의 모습이 비추어져서 조금 슬프기도 합니다. 그는 [천국의 나날들], [미션], [언터쳐블], [벅시], [말레나]로 아카데미 최우수 오리지널 스코어 후보에 여러번 올랐으나 단 한 번도 수상에 성공한 적은 없었는데, 후보에 올랐던 작품들 모두 흥행과 작품성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명작들이었음을 생각하면 후술 할 2015년 작 [더 헤이트풀 8] 이전에 엔리오 모리꼬네가 커리어 내내 아카데미를 단 한 번도 받지 못한 것은 충분히 의구심이 생길만한 이슈입니다. 이후 그가 이탈리아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할리우드 내 미국인 작곡가들보다 현저히 낮은 임금을 오랜 기간 동안 받아왔다는 사실 또한 알려지면서 아카데미뿐 아니라 지난 몇십 년간 할리우드가 행해왔던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엔니오 모리꼬네에게 가해진 차별은 "꿈이 있다면 외국인도 미국 땅에서 성공할 수 있다"라는 아메리칸드림이라는 말과 대치되는 할리우드의 추한 민낯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가 스파게티 웨스턴을 싫어하는 이유
엔니오 모리꼬네의 초기 커리어를 대표하는 단어는 바로 "스파게티 웨스턴"입니다. 스파게티 웨스턴은 1960~1970년대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미국 서부 영화 장르를 이탈리아의 음식 스파게티에 빗댄 단어로, 주로 저예산으로 제작되어 작품성보단 오락성에 중점을 둔 B급 영화들이 대부분인 장르였습니다. 엔니오 모리꼬네가 본격적으로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 작품들이 바로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과 함께한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건맨], [석양의 갱들]과 같은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들이었고 지금도 수많은 마니아들의 지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영화 저널리스트들 사이에서도 "엔니오 모리꼬네 앞에서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지 마라"라는 약속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세간에서는 영화 장르를 음식에 빗대어서 모리꼬네뿐 아니라 대부분 이탈리아인들이 이 단어를 거북해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있으나, 커리어 내내 할리우드 사회로부터 철저히 차별을 받아온 그가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단어 자체를 그의 작품들을 할리우드 밖에서 만들어진 외국 영화로 치부하는 낙인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큰 불쾌감을 느꼈다는 말이 더 근거 있는 설로 보입니다.
수십 년간 푸대접을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엔니오 모리꼬네가 좌절하지 않고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외부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고 그의 진가를 인정해주고 그를 위해 아낌없이 목소리를 내준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일화로 영화 [타이타닉]으로 유명한 할리우드 작곡가 제임스 호너는 1987년 아카데미 최우수 오리지널 스코어 부문에서 본인이 작업한 영화 [에일리언 2]가 수상 후보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 후보로 올랐던 엔니오 모리꼬네의 [미션]에 투표했다고 밝히며 아카데미 수상자 선정 과정에 의문점을 제기하였습니다.
또한 쿠엔틴 타란티노가 엔니오 모리꼬네의 팬임을 공공연히 밝히며 그와의 작업을 위해 오랜 시간 동안 러브콜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이미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 번의 간청 끝에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 둘의 협업이 마침내 이루어졌으나 엔니오 모리꼬네가 영화 내에서 본인의 음악이 사용되는 방식과 영화의 폭력성에 실망하여 다시는 쿠엔틴 타란티노와 작업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면서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끝나는가 싶었는데요. 쿠엔틴 타란티노가 이에 굴하지 않고 이후 끊임없이 엔니오 모리꼬네에게 협업을 제안하여 결국 2015년 [더 헤이트풀 8]에서 둘은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추게 됩니다. 이 [더 헤이트풀 8]으로 엔니오 모리꼬네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아카데미 최우수 오리지널 스코어 수상의 영광을 이루게 되었으니, 그에게 있어서도 [더 헤이트풀 8]은 매우 의미 있는 작품으로 남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같은 "열렬한 팬"들이 할리우드에 없었더라면 엔니오 모리꼬네는 진작 할리우드와 연을 끊었을지도 모릅니다. 낮은 임금, 시상식에서의 홀대 등 할리우드의 추한 행태에도 그가 감정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꾸준히 할리우드 영화를 작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한 돈과 명예가 아닌 그의 음악을 진정으로 사랑해주고 그의 편에 서서 목소리를 내어준 영화인들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