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통제"의 역사와 '임을 위한 행진곡'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이틀만에 “올해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도록” 업무지시했다. 감동적인 기념식의 여운을 간직하며, 이 노래를 둘러싸고 오갔던 논쟁들이 기록된 지나간 보도들을 찾아 읽어보았다. 이 노래 한 곡을 부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국가보훈처가 몇 년 간 보여 온 움직임이 그야말로 필사적이었음을 새삼 알게된다.
그 중에서 지난 2009년 말 보훈처가, “5.18 30주기를 앞두고 새로운 기념곡 제정을 위한 여론조사를 추진하고, 국민공모를 통해 기념곡을 선정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힌 부분은 인상적이다. 당시 대통령(MB)은 2008년 취임 후 같은 해 5.18 기념식에 단 한 번 참석한 이후 2009년부터는 줄곧 불참했는데, 보훈처의 적극 대응이 이루어진 시기는 대략 이 즈음 부터인 듯하다. (같은 해 10월에는 행정안전부가, 공무원노조 행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포함된 ‘민중의례’를 금지하는 공문을 시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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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비롯한 기념식이나 의식에서 부르는 기념가, 또는 기념곡은 ‘서양식’ 의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서구의 기념곡들 중에는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계기 속에서 탄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줄곧 프랑스 혁명 시기에 만들어진 ‘라 마르세예즈’에 비유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군주제의 억압을 거부한 민중들의 목소리가 담긴 ‘라 마르세예즈’가 공화국 프랑스의 상징과도 같은 노래인 것처럼, ‘임을 위한 행진곡’ 역시 세월을 거듭하며 대한민국 민주화의 상징으로 자리잡아 왔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1868) 이후 본격 서양식 근대 국가 체제로 전환을 추진하던 초기에 가장 공들였던 부분은 바로 ‘의례’의 영역이다. 메이지 정부는 서양의 제도를 모방하고 변형시키며 자신들만의 전통과 관습을 직접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였다. 민중의 정서나 목소리가 개입할 틈이 있을리가 없었다. 서구화 초창기 국가의 공식적인 음악을 담당했던 집단은 다름아닌 ‘군악대’였고, 근대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일본 국가 키미가요(君が代)의 편곡을 맡은 인물은 일본의 군악대를 지도하던 군악대장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1916)였다. (에케르트는 이후 대한제국 군악대를 지도하며 ‘대한제국 애국가(1902)’를 작곡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국가 주도적 음악의 맥락과 맞닿아 있는 사례로 ‘교가(校歌)’와 ‘사가(社歌)’ 같은 단체의 노래가 있다. 일본 최초의 교가는 오차노미즈여자대학(お茶の水女子大学)의 전신 도쿄여자사범학교 교가로, 1875년 메이지천황 황후(昭憲皇太后, 1849-1914)가 지은 가사에 선율을 붙인 것으로 알려진다. 일본인 음악학자 와타나베 히로시(渡辺裕, 1953-)는 1930년을 전후해 일본의 교가가 집중적으로 창작된 사실을 제시하며, 그 내용의 대부분에 당시 일본에서 강조했던 황국사관의 표상이 담겨있었음을 지적한다.
‘공동체의 노래’를 보급하려는 ‘관(官)’의 시도는 방송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확산된다. 1936년(쇼와 11년) 4월 오사카 방송국(JOBK)에서 전국방송된 ‘신 가요곡’이라는 프로그램은 ‘가정에서 노래할 수 있는 유행가를 독자적으로 만들자’는 취지로 기획되었으며, 일본 ‘국민가요’의 시작점으로 꼽힌다. 1937년 중일전쟁 발생 이후 전시체제를 본격화하기 시작했던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라, 국가적으로 ‘보급’하는 노래는 점차 전쟁과 밀접한 연관을 갖게 되었다.
1939년 조선의 경성방송국(JODK)에서 조직한 “경성방송합창단”에서는 현제명(1902-1960), 김메리(1904~2005), 박경호(1898~1979), 이흥열(1909~1980), 김성태(1910~2012) 등 중진 작곡가들에게 ‘가정가요’를 위촉해 제정했다. 가정가요는 이후 ‘가정가요지도(1941)’, ‘군국가요(1943)’로 이어지면서 전시체제 방송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1941년 아시아 태평양 전쟁 발발을 계기로 일본정부는 국민의 교화, 동원 등에 역할을 할 수 있는 노래를 보급하는 방안을 기획했다. 이렇게 시작된 정부 제정 ‘국민가’에 관한 논의는 구체적으로 새로운 음악을 ‘모집’하는 것으로 실행되었다.
이처럼 특정한 음악을 국가 차원에서 ‘보급’한다는 개념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도 계속된다. 구진희의 석사학위 논문 “대한민국 의식가(儀式歌)에 관한 연구(한예종, 2015)”에 따르면,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제53호)이 이 제정, 공포된 이후 10월 27일자 관보에 국경일 기념 노래의 가사를 모집한다는 광고가 실렸다"고 한다. 이후 애국가를 비롯한 국경일 기념가들은 초중고 교과서에 실리며 모든 학교에서 필수적으로 가르치는 노래가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의 각종 제도들을 정비해 가던 시기인 1957년 8월 3일자 동아일보에는 ‘유행가를 멸시하기 전에 그를 대체할 수 있는 가곡을 제공해야 한다’는 첼리스트 전봉초의 글이 실렸다. 민중의 노래를 배제하고, '건전한' 국민들의 노래를 국가적으로 제정하고 보급해야 한다는 엘리트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어지는 1960-70년대에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던 금지곡과 건전가요의 실태는 이미 많은 연구와 증언을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물론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여러 분야에서는 일제강점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식민지 시기의 군국주의적 억압에 대한 향수와 그 방식을 따르는 국가 제도들을 수시로 목격할 수 있으며, 제국주의 시대 일본이 추구했던 ‘근대 국민국가’의 잔재가 곳곳에서 계승되어 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행여나 ‘일본제국’이 지나간 자리에 ‘대한민국’이라는 공적 억압 체제를 그대로 남겨두려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감시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21세기 광장의 시대, 보훈처가 시행하고자 했던 '새로운 5.18 기념가 제정'이 불발된 것은 필연적이다. 제도적인 ‘위촉’이나 '제정', ‘보급’이라는 테두리에 갇히는 한, 진정한 의미의 ‘국민의 노래’란 결코 성립할 수 없다. 정책적으로 보급되는 노래가 ‘민중의 노래’를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지난 역사가 충분히 이야기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