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도 없고 제목도 없는 음악

기악음악에 대한 오래된 논쟁들

by yoonshun

"서울문화재단" 소식지 <문화+서울> 2017년 3월호에 수록된 글입니다.




평소 팝과 가요를 즐겨듣는 한 친구가 “가사가 없는 음악을 들을 때에는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특히 가사는 물론 제목도 없고, 따라 부르기도 난감한 오케스트라의 심포니 연주에서 ‘무엇을 듣는지’ 궁금하다는 것이다. 학창시절 음악시간의 ‘감상 숙제’ 같은 의무감 때문일까. 어떤 청취자들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무언가 느낀 점을 말해야 할 것 같은 부담”을 호소하기도 한다. 오늘날 여러 형태의 ‘해설이 있는 음악회’가 기획되고 있는 배경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대부분의 음악을 ‘언어’로 이루어진 ‘이야기’를 통해 접한다. 가사와 대본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오페라는 음악 이야기의 단골 메뉴가 된다. 이처럼 ‘음악에 관한 이야기’는 음악을 잘 알지 못해도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다는 점에서 선호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자칫 ‘음악’의 존재감이 희미해지기도 한다. 기악음악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실제로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걸친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서양음악사는 대체로 성악음악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7세기를 전후한 시기까지도 기악음악 작품이나 연주에 관한 기록은 매우 단편적으로만 남아있어 체계적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당시 귀족들이 소장하고 있던 악보의 호화로운 필사본도 대개는 가사 있는 음악이 주류를 이루었다. 오랜 세월 기악음악은 궁정이나 귀족 가문에 고용된 낮은 계급의 연주자들이 관여하는 이른바 ‘기계적’ 영역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가사 없이도 음악이 완결성을 확보할 수 있기 위해 가장 필요한 전제는 바로 정교한 기보법이다.


기보는 곧 음악에서 형식 구축의 바탕이 되었고, 따라서 별도의 언어나 텍스트 없이 선율과 리듬만으로도 ‘서론-본론-결론’ 또는 ‘기-승-전-결’과 같은 구조를 갖출 수 있음을 뜻한다. 9세기 경 가톨릭 전례에서 사용되던 ‘그레고리오 성가’가 악보 형태의 기록으로 남겨진 이래, 12세기 말 노트르담 악파의 리듬 기보 연구를 통해 대략 오늘날의 악보와 유사한 모양새가 잡히기 시작했다.




수(數, number)의 어원이 된 라틴어 ‘numerus’에 ‘리듬’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듯, 중세의 자유학예(artes liberales)를 구성하는 일곱 과목 중에서도 음악은 언어의 범주(문법, 수사, 논리)와 구분되는 수학의 영역(산술, 천문, 기하, 음악)에 속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음악이란 완성된 ‘작품’으로서의 음악이기보다는 음악을 구성하는 원리의 탐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수학으로서의 음악이 언어와 전혀 무관한 위치에 놓여있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노트르담 악파가 남긴 리듬 기보 체례의 상당 부분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가 집필한 “음악론(De Musica, 388)”을 인용하고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가 설명한 음악 리듬의 규칙은 대부분 고대 시(詩)를 구성하는 언어의 억양과 운율 연구, 즉 ‘수사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기악음악은 이후 이탈리아의 작곡가 프레스코발디(Girolamo Frescobaldi, 1583~1643)의 연주곡 목록이 작성된 것을 계기로, 비로소 독립된 예술작품으로 인정받게 된다.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의 계보와 함께 소나타 형식과 오케스트라가 모습을 갖춰 가는 과정에서 극대화된 기악음악은, 심포니에 이르러 정점에 자리매김하게 된다. 독일의 초기 낭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구체적인 제목이나 이야기가 엮이지 않은 음악을 지칭하는 ‘절대음악(absolute music)’ 개념이 논의되었다. 나아가 독일인 음악학자 한슬리크(E.Hanslick, 1825~1904)로 대표되는 절대음악 주의자들은, 음악에서는 모든 외부의 요소를 배제하고 오직 소리와 구조가 만들어내는 조화만을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뉴욕 컬럼비아 대학 철학과의 리디아 괴어(Lydia Goehr) 교수는 “음악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기악음악의 의미를 해독하는 데에는 항상 어려움이 따른다”고 썼다. 그래서인지 기악음악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음악에 언어를 더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애초에 ‘절대음악’으로 창작된 작품이라 해도, 후대 사람들에 의해 작곡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표제가 붙거나 이야기가 덧붙여진 사례들도 적지 않다. 똑같은 곡이라도 ‘심포니 5번’, ‘소나타 작품번호 57’이라고 할 때보다, ‘운명 심포니’, ‘열정 소나타’ 같은 제목이 더해져야 비로소 친근한 작품으로 여기게 되는 정서도 한 몫 더하는 듯하다. 이러한 점에서 ‘절대음악’은 특정한 정서나 장면을 묘사하는 ‘표제음악(programm music)’과 상대 구도를 이루며, 때로는 음악의 우열 논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러나 기악음악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정의가, 단순히 문자 그대로의 ‘무의미함’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기악음악의 내면은 ‘언어 이상의 언어’로 이루어진 무한한 의미들로 채워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흔한 일상 언어로 나열되는 느낌과 감상에 연연하기보다는, 언어를 넘어선 음악 본연의 질서와 조화에 귀 기울이려는 시도가, 기악음악에는 더 어울리는 접근일 수도 있겠다.

매거진의 이전글메이지 일본의 딜레탕트와 프랑스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