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이 먼 시칠리아까지 와서 다시 찾고 싶었던 것은?

by 윤소희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시칠리아 여행은 몇 년 전에 읽은 이 문장 하나에서 시작되었다. <오래 준비해 온 대답>에서 김영하 작가는 삶과 정면으로 맞짱 뜨는 야성을 잊어버렸다고, 의외성을 즐기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 처한 자신을 내려다보며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즉각적으로 감지하는 감각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내가 이 먼 시칠리아까지 와서 다시 찾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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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섬 라구사 (Ragusa)는 지진으로 다 무너진 후 재건되었다


시칠리아에서 내 눈길을 끈 것은 아름다운 풍경 밑에 감춰진 전쟁과 재해의 상처, 웅장한 신전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 후 돌무더기가 되어 사람들에게 밟히는 현장, 걷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노부부가 다정하게 손을 잡거나 바다를 함께 바라보는 장면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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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섬 셀리눈테 신전 터


살면서 나는 내 안의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운 면들을 잃어가고 있다. 상처받기 싫어서 쓰는 딱딱한 가면은 상황에 맞게 휘어지는 대신 아예 부러지거나 깨지기 일쑤다. 내게 상처 주는 사람은 아예 상종하지 못할 인간으로 판단해 보지 않으면 마음이 편해질 거라 여겼다. 유연함을 잃어갈수록 싫은 것들과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은 점점 늘어가기만 했다.


내게도 갓 구워낸 식빵 같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연약하고 보드라운 걸 발견하면 누군가는 찌르거나 찢는다. 상처에서 피와 고름, 진물이 흐르다 딱지가 진다. 점점 덩어리째 딱딱하게 굳어간다.


WechatIMG4432.jpg 시칠리아 섬 아치레알레 (Acireale) 해변


아흔이 넘어 쪼그라든 남편의 손을 다정하게 붙들기 위해 할머니는 얼마나 많은 시간 상처를 허락했을까. 실망과 원망, 절망을 보드라운 크림처럼 녹여내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다정하고 따스한 노부부의 모습은 결코 아무 노력 없이 얻은 행운일리 없다. 상처를 드러내거나 허락하지 않고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관계는 없으니까.


WechatIMG12077.jpg 시칠리아 섬 체팔루 (Cefalu)


늘 아이들과 여행을 다니다 16년 만에 남편과 단 둘이 여행을 왔다. 열흘 간의 여행 중 일촉즉발의 순간들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잔뜩 날이 선 상대를 품어주는 말랑한 가슴이 없었다면, 부딪치면 깨질 것 같은 의견은 내려놓는 유연함이 없었다면 싸움을 해도 몇 번은 했을 것이다. 보드라운 마음을 유지하는 건 아프지만,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라면 꼭 필요한 일이다. 다행이랄까. 말랑함을 유지하면서도 얼마든지 단단해질 수 있다는 걸 파스타를 만들며 배웠다. 거친 밀가루를 치대어 파스타 반죽을 만들 때, 너무 뻑뻑하면 물을 조금 넣고 끈적해지면 밀가루를 뿌리면 된다. 반죽을 치대어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건 고되고 힘든 노동이지만, 잘 치댄 반죽은 맛있는 파스타를 만든다.


밤새워 다음 날 여행 일정을 짜고 졸음을 쫓으며 운전을 하는 남편의 노고가 없었다면 제주도의 14배라는 시칠리아 섬을 열흘 안에 한 바퀴 돌아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행 중 절대 운전을 하지 않는 나 혼자였다면 카타니아 공항으로 들어와 타오르미나와 시라쿠스 두 군데 정도만 방문했을 테고, 가장 마음을 빼앗겼던 셀리눈테나 샤카, 아치레알레 같은 곳은 있는 줄도 모르고 시칠리아를 떠났을 것이다. 남편을 위해 세 번째 금주령을 잠시 멈춘 덕에 리몬첼로와 시칠리아 와인의 매력에 빠져볼 수 있었다. 네 번째 금주는 여행이 끝나고 시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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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섬 아치레알레 (Acireale)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잃어버린 것을 기억해 내는 것만으로도 다시 찾을 희망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