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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 Aug 27. 2017

치과치료가 싫다

카라바조, <이 뽑기> | <치통의 그리스도>, 비엔나 슈테판 대성당

카라바조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2-1610), <이 뽑기 (The Tooth Puller)>, 1609.

지금은 치의학이 발달하기를 넘어 상업화, 고급화까지 되어버렸지만, 치통의 파괴력은 이러한 기술의 발전과 보급도를 불문한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치통은 두통, 안통, 작열통과 함께 최악의 고통이라 일컬어진다고... 아무튼 치통을 소재로 한 작품들 중 지금 기억나는 것은 카라바조의 1609년 작 <이 뽑기>이다. 카라바조는 바로크 미술사의 국면을 열었던 이탈리아 바로크 미술의 대표적인 화가로서,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의 인물을 다채롭게 표현했던 르네상스 회화와 달리, 스포트라이트처럼 극대화된 명암법 (tenebrism)을 고안하여 죽음, 가난, 질병과 같은 기피성 테마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교과서적 설명을 제쳐두고서라도, 카라바조의 인물들은 한 명 한 명 다 사연있어 보여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우선 이를 뽑히는 자의 치명적인 고통이 느껴진다 (핏줄이 다 선 목, 주륵 흘러내리는 한줄기의 까만 피, 의자의 손잡이 부분에 나타난 그립감, 빨려 들어가는 듯한 왼손바닥까지). 또한 이를 뽑는 자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힘은 매복 사랑니를 뽑는 오늘날 치과의사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주변 인물들 중에서도 캔버스 왼편 치아가 멀쩡할 듯한 대머리 아저씨의 표정과 치통으로 고생 좀 하신 듯한 오른편 노파의 표정은 두 인물의 경험의 차이, 곧 공감능력의 차이를 여실히 드러낸다. 거기다 캔버스 왼편 아래 어린아이가 테이블보를 쥐며 동요하는 장면까지 -- 정말 버릴게 하나도 없는 그림이다.


사진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jcbwalsh/17268246838

<치통의 그리스도 (Christ with a Toothache, Der Zahnweh-Herrgott)>, 비엔나 슈테판 대성당 (Stephansdom), ca.1147.

이 조각상이 다른 무난한 제목들을 마다하고 <치통의 그리스도>로 불리게 된 일화가 있다. 언젠가 이 그리스도 상의 머리에 화관이 걸려 있었는데, 그 화관을 고정하기 위해 얼굴에 헝겊을 둘러놓은 것을 세 명의 주정꾼들이 "치통의 그리스도"라 부르며 놀렸다고 한다. 그 다음날 주정꾼 전원이 원인모를 치통에 고통받다 이 예수상 앞에서 회개하자 전원 동시에 치유되었다는 설. 이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나는 <치통의 그리스도>가 예수님 조각상에 붙이기에 독창적이면서 참 괜찮은 제목이라 생각한다. 히브리서 5장 7절에는 "그[그리스도]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하나님]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라 쓰여있다. 따지고 보면, 사실 치통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의 육체로 오심에 대한 가장 가시적인 반증 아닌가.


나는 치아가 두 개 부족한 채로 태어났다. 보통 앞니 둘, 송곳니 하나, 작은 어금니 (소구치) 둘, 큰어금니 (대구치) 두 개가 네 셋트로 28개 존재하는데, 나는 송곳니 하나 작은 어금니 하나가 알고 보니 유치였다. 마지막 유치가 흔들려 빠진 것은 올해 1월, 그러니까 대학 졸업하고 만 23세에 비로소 첫 이갈이를 끝낸 것이다.


저작기능에 주요한 어금니까지 포함하여 영구치가 두 개 없으니 인공 치아를 심어 빈 공간을 메워야 한다. 그것도 한쪽 유치는 빠진지 오래되어 교정으로 공간을 벌린 뒤 임플란트를 해야 한단다. 이 거사를 처음 선고받았을 때는 이 치과의사가 돈독 오른 지능형 사기꾼이 아닌가 싶었는데, 네댓 군데에서 같은 얘기를 들으니 비로소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교정치과 의사는 요즘 아이들이 턱이 좁아지고 이가 많이 없다며, 우스갯소리로 진화의 일종일 것이라 하셨다 (일각에서는 현대인의 구강 내 공간 부족을 '진화'가 아닌 '퇴행'의 결과로 보기도 하나, 어찌 되었든 부드러운 음식의 섭취에 의한 변화이다). 그러나 나는 턱은 큰데 이만 '진화'한 과도기적 인간으로 -- 그 와중에 끝에 매복 사랑니도 있다... 도대체 왜? -- 미래의 고고인류학에는 쓸모 있는 증거물이 될지는 몰라도 현세에선 번거로움을 동반한 고통의 피해자일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9월에 영국으로 출국하기 전 4개월 동안 교정치료를 받기로 하고, 3개월째 되는 날인 어제 한 쪽에 임플란트를 식립하였다. 마취주사를 세 방 놓고 수술실에서 손을 덜덜 떨며 기다리는데, 향년 25세에 돌연 이를 심게 되었다는 것이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게 기분이 오묘했다. 마취된 한 쪽 얼굴과 가려진 시야에 반하여 한껏 예민해진 그 외 말초신경은 15분간의 드릴질과 망치질 소리를 극대화해 중추신경으로 퍼다날랐고,  15분간의 '헬'이 끝난 뒤 주의사항을 귓등으로 듣고 정신을 놓은 채, 만원 버스를 타고 귀가했다. 그 후 약 12시간 동안 지혈이 안되어 잠 못 드는 밤을 보내게 되니 자연히 임플란트의 구조, 원리, 통증 및 부작용에 대해 과도하게 검색하게 되어 불안이 커져갔다. 임플란트는 사실 겉모습은 자연치아와 흡사한데도 불구하고 기능은 현저히 떨어지며, 치주인대가 존재하지 않아 치석을 위로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축적시켜 잇몸 염증과 풍치의 위험도 커진다고 한다. 그러게 나의 야속한 유전자는 치아 개수를 줄이는 건 좋은데 왜 굳이 맨 앞의 어금니를 없애고 빈 공간을 만들어 임플란트까지 하게 만들었으며, 그 와중에 사랑니는 잇몸에 파묻어서라도 보존하는 것인가. 다 제쳐두고 근본적으로 그놈의 치아들은 영양 섭취의 가장 주요한 (혹은 유일한)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자연 회복과 소생이 되지 않아 부식되어 치통과 고가의 치과치료를 요하는 것인가.


이렇게 비이성적인 분노와 불만이 정점에 달했던 새벽 4시경, 내 부정적 사고에 내가 지친 나머지 방금 받은 치과치료의 '장점'을 생각해내기로 했다. 사실 티타늄이라는 재료를 잇몸에 맞게 가공할 기술이 1960년에 고안되지 않았더라면 내 치아는 빈 공간 투성이 일 것이고, 잉카문명이나 고대 중국처럼 상아나 조개껍질 따위를 박던지 (...) 치열이 파열되거나 얼굴이 변형되는 것을 감수해야만 했을 것이다. 또한 상아를 잇몸에 박던 이들이 감내해야 할 극한의 치통을 마취주사로 막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나는 현대의학의 수혜자였다. 사실  임플란트가 잇몸과 치조골을 깎아내는 시술이라 고통스러울 것이라 염려했었는데, 약간의 동통은 있었지만 대부분 마취주사와 진통제로 넘길 수 있는 정도의 통증이었다. 좀 더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새벽을 보내기 위해 며칠 전 우연히 읽었던, 치과치료가 발달하지 않아 원인모를 치통을 감내해야 했을 그때 그 시절 19세기의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Записки из подполья, 도스토예프스키 저)> 중 한 구절을 되새기며 읽어보기로 하였다.


"[치통에 의한] 신음 속에는 첫째, 우리 의식으로선 제법 굴욕적인, 우리 통증의 무목적성이 표현돼 있소. 이것이 곧 자연의 합법성일텐데, 여러분은 응당 그것에 침을 뱉어주어야 마땅하건만 어쨌거나 그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는 반면 자연은 전혀 그렇지 않단 말이오. 해서, 여러분에게 적이란 아예 있지도 않건만 통증은 있다, 하는 의식이 표현되는 것이오. 즉, 바겐하임같은 의사가 세상에 널렸더라도 여러분은 자기 이에 대해 완전히 노예나 다름없다는 의식, (중략) 여러분은 오직 스스로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거나 아니면 주먹을 움켜쥐고 여러분의 벽을 좀 더 세게 치는 수밖에, 그야말로 별 뾰족한 수가 없다는 의식 말이오" (p. 26-7).


사실 원인모를 치주염의 통증 자체도 혐오하지만 그보다도 혐오하는 것은 통증에 의해 허물어지는 인간의 존엄성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부탁인데, 언제든 19세기의 교양 있는 사람이 치통을 앓으며 내는 신음 소리에 귀를 귀울여 보시오, 그것도 앓기 시작한 지 이틀째나 사흘째여서 이미 첫날과는 다른 식으로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즉 거친 농사꾼 무지렁이처럼 그냥 이가 아프기 때문에 신음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과 유럽 문명에 감화된 사람처럼, 시쳇말로 '대지와 민중적 원칙을 버린' 사람처럼 신음할 때 말이오. (중략) '그래, 나는 너희에게 폐를 끼친다, 너희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집 안의 모든 사람들을 잠도 제대로 못 자게 한다. 그럼 그냥 다들 잠도 자지 말고 시시각각 내가 치통을 앓고 있다는 것을 느끼란 말이다. 나는 이전에는 너희들한테 영웅처럼 보이고 싶었지만 이제는 영웅은커녕 그저 더러운 인간에, 애물단지에 지나지 않는다" (p. 27-8).


아, 치통이라는 것은 이렇게 파괴적인 것인데, 이번의 치과치료는 결과적으로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통증을 제외한 넓은 의미의 영향은 다음과 같다:  이 일회성 신체기관에 대한 매일의 염려. 치아 하나하나의 목숨을 조금이라도 더 부지하기 위한 필사적인 양치질, 치간 칫솔질, 치실질, 워터픽질. 그로 인한 노이로제. 이러한 신체 주요 기관의 일회성과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보장되지 않는 세계 각국의 치아보험 실태. 그로 인하여 해외 체류 시 돌발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부차적 노이로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치료와 보철물 비용에 대한 걱정으로 생기는 전공 및 진로 선택의 회의감. 결과적으로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과 존재론적 고민 등. 끝내 12시간 뒤 지혈이 되어 나름 성공적인 치료에 감사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치과치료와 치통과 이에 수반하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혐오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인용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김연경 옮김). <지하로부터의 수기>. 서울: 민음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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