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림 이 용의 ‘SEA STATE’에 관한 메모
‘SEA STATE’ 시리즈 (2004년-현재)는 싱가포르 출신 작가 찰스 림 이 용 (Charles Lim Yi Yong)의 다매체 작업으로, 필름이나 지도부터 3차원 그래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바다’라는 주제의 개인적, 사회적, 지정학적 단면들을 조명하는 작품이다. 이 매체들과 다채로운 표현방식들을 한 작품으로 묶어주는 요소는 가로 선과 세로 선이 교차하는 구조인 ‘그리드’(Grid)로, 로잘린드 크라우스 (Rosalind Krauss)가 1979년 ‘Grids’라는 에세이에서 20세기를 대표하는 구상적 요소로 정립한 서구 모더니즘의 산물이다. 이 글에서는 크라우스의 시각을 통해 격자구조를 분석함으로써, 이 작품이 어떻게 서구현대주의의 요소들을 차용하는 동시에 그에게서 벗어나려 하며 싱가포르의 국가적 특성과 작가의 주관에 입각한 대안적 격자구조를 만들어내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크라우스는 ‘Grids’에서 모더니즘 미학을 형성하는 이성과 신비의 정신분열적 긴장 관계에 주목한다. 기하학적 구조와 직선의 교차로 만들어지는 수직 관계 등 그리드의 구성 요소들은 모더니티의 이성적 성격을 반영하나, 이러한 현대문명의 지표들이 그리드라는 구조를 통해 ‘현실 이상의 것’으로 추상화되는 과정에서 환상, 신화, 신비주의 등 예술의 고전적 가치들을 소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 작품 내에서 물(物)과 영(靈)이 공존하는 모더니즘의 현상은 찰스 림의 그리드에서도 나타난다. 정치사회학 연구에 기반을 두고 싱가포르의 간척사업, 해양 개발, 영토 분쟁 등의 주제들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그 결과물은 지극히 추상적이며 그 추상의 의미 또한 모호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SEA STATE 1: inside\outside’ (2005)라는 작품을 살펴보자. 이는 싱가포르 해안 경계에 떠 있는 수많은 부표를 경계선 안과 밖으로부터 두 번씩 찍어 전시한 사진 작품인데, 여기서 그리드는 대칭 관계의 사진들을 배열하는 축으로 기능할 뿐 아니라 작품 전체의 평면성을 유지하고 직사각형의 반복을 통해 기하학적 구조를 만드는 구상적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구조가 벽면 전체를 지배하게 되면서 그 안에 들어있는 각각의 사진들을 추상화시켜, 작품을 데이터의 배열이 아닌 일종의 기하학적 추상회화로 탈바꿈해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드는 크라우스가 역설한 바와 같이 작품을 체계적이면서도 모호한 것, 과학적 이성주의와 직관이 공존하는 “분열적인” 공간으로 만드는 장치가 된다.
한편, 이 글의 목적은 찰스 림의 작품을 크라우스식 격자 이론의 연장선으로 치부해버리는 데 있지 않고, 이를 서구 모더니즘이라는 거대한 단일 조직 너머로 확장하려는데 있다. 크라우스가 모더니즘의 자기 반영적이고 폐쇄적인 성격에 따라 그리드 자체의 형태와 그의 구상적 의미를 논하는 데 그쳤다면, 찰스 림의 작품은 그리드를 ‘그 자체’가 아닌 싱가포르의 정치 사회적 상황을 담거나 가두는 개념적 의미의 ‘그릇’이자 정치적 은유로 이용한다. 그리드는 작품 전체에 나타나는 바다와 내륙의 이미지들 위에서 군림하는가 하면, 이를 포함하고, 배열하며, 단일한 크기와 형태로 체계화시키기도 한다. 또한, 그리드가 가진 보편화와 획일화의 기능이 선택적 대상에게만 작용하는 경우, 세부요소를 포함한다는 포용의 논리는 금세 포함되지 않은 요소들을 배제한다는 배타의 논리로 변하기도 한다. 이러한 격자구조의 특성들이 지배계층에 의해 선택적 포함과 제외의 수단으로 사용될 때, 찰스 림의 작품 속 격자는 비로소 권력과 통제를 내포하는 정치적 은유로 변환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영국이 19세기 싱가포르를 포함한 동남아시아의 식민지 지배 당시 지도의 그리드를 사용하여 영토를 분할하고 관리했던 경우가 있다.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175페이지 참조).
‘SEA STATE’의 작품 중 몇 가지를 분석해보면, 찰스 림의 그리드가 단순히 서구 모더니즘의 산물이 아닌, 포함과 배타의 이중 논리를 통하여 싱가포르의 국가권력과 통제를 함의하는 정치적 기표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작품 중 하나인 ‘SEA STATE 4: line in the chart’(2008)는 싱가포르의 북동쪽 해양 경계선을 따라 위치한 방조벽을 기록한 사진 작업이다. 여기서 격자는 가장 기본적인 데카르트 좌표의 형태를 떠나서 방조벽의 반복되는 직사각형, 또한 그 안에 “출입 제한 구역”이라는 경고문을 담고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표지판 등, 가로 선과 세로 선이 여러 방식으로 교차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특히 표지판의 경고문은 싱가포르의 네 개의 공용어 (영어, 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 중 타밀어를 제외한 세 개의 언어만을 포함하고 있는데, 결국 이 방조벽과 표지판에서 드러나는 찰스 림 식 그리드의 속성은 특정한 세부요소를 포함하는 동시에 (전자의 경우 경계선 내의 바다, 후자의 경우 세 개의 공용어) 포함되지 않은 요소(경계선 밖의 바다, 타밀어)를 소외시키는 이중잣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포된 포용과 배타의 언어는 그리드를 모더니즘의 한계 속 구상적 요소만이 아닌 정치적 은유로, 자세히는 방조벽을 설치해 영토와 해안을 관리하고 언어의 선택적 수용을 통해 소수민족을 소외하는 싱가포르 공권력의 상징으로 변모시킨다.
그러나 여기서 나타나는 아이러니는 포함과 배제의 이중 논리가 역으로 크라우스가 논한 그리드 위 두 대립항의 정신 분열-물과 영, 현실과 초현실로의 분열과 공존 –을 환기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구 모더니즘의 이론을 초월하려는 시도가 모순적으로 모더니즘 특유의 이분법적 담론을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면, 이 담론 자체를 초월하여 작품을 읽는 방식은 없을까? 즉, 찰스 림의 그리드를 포함과 배제의 자아 분열적 구조로 해석할 뿐만 아니라, 그 대안으로 격자구조에 포함되지 않는 존재들에게 주체성을 불어 넣어 지배계층의 통제에 도전하고 그에게서 해방된다는 긍정적 메시지로 해석해볼 수는 없을까. 이러한 대안적 담론의 가능성은 ‘SEA STATE’ 시리즈를 포괄하는 주제인 바다에서 나타난다. 바다의 유동하는 해수면, 액체의 물성, 그 움직임이 그리는 입체적 곡선은 그리드를 구성하는 2차원적 직선들이 결코 담을 수도, 완전히 포함할 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사진 작품 ‘SEA STATE 4’를 이 관점에서 재고해보면, 그리드의 노골적인 직선 구조와 녹슨 재질에 대항하는 파도의 흐름, 그리고 질감이 화면상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그리드가 바다를 가두고, 제어하며, 정치적 목적으로 종속시키려는 문명의 시도를 나타내는 시각적 도구라면, 이와 대조되는 바다의 유기적인 흐름은 국가와 문명의 시도를 불완전하게 하며 그들의 주도권에 저항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제임스 C. 스콧은 저서 “국가처럼 보기(Seeing Like a State)”에서 그리드를 지배장치로 사용하는 현대 실리주의 사회의 단면을 조명하는 한편, 이러한 획일화의 노력에 순응하지 않는 자연적 환경을 “저항의 풍경”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저항의 모티브로서의 자연은 싱가포르의 해저 유류비축기지를 주제로 한 영상작업인 ‘SEA STATE 6’(2015)에서 극대화되는데, 영상의 첫 부분인 ‘Capsize’는 작가가 타고 있는 카누가 전복되면서 바다의 물살이 배와 작가 자신을 뒤덮어버리는 장면을, 두 번째 부분인‘Phase 1’은 주롱섬 유류비축기지를 탐사하는 과정을 기록하였다. 2016년 56회 베니스 비엔날레에 이 작품을 상영할 때 우연히도 그리드 구조를 연상시키는 화면을 사용했는데, ‘Phase 1’의 기하학적 구성과 카메라의 팬다운 기법이 화면 위의 직선 구조와 자연스럽게 동화되는 반면, ‘Capsize’는 카메라의 초점이 격변하는 물살에 따라 이동함으로써 화면이 요구하는 직각의 틀에 쉬이 맞춰지지 않는다. 여기서 격자구조에 담긴 이성은 바다를 가둘 수도, 제어할 수도, 획일화할 수도 없이 화면 위에 맴도는 존재로 표현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하여 찰스 림의 그리드는 정치적 은유이자, 자연을 그 안티테제로 지배하려다 좌절한 헛된 문명의 이기로서 그려지게 된다.
찰스 림은 작품과 관련한 인터뷰에서 언젠가 “바다의 신비화에, 혹은 ‘바다는 무한하기 때문에 무한히 이용할 수 있다’라는 낭만주의적 관념에 도전하는 것이 이 작품의 의미”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관점에서 작가가 신비화와 낭만주의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그리드를 선택한 것이 암시하는 바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이 이 작품을 읽을 때의 중요한 출발점이라 생각한다. 즉, 찰스 림의 그리드는 이성뿐 아니라 신비주의적 요소가 분열적으로 공존한다는 크라우스의 주장을 간과하고 만들어진 단편적인 작품인지, 혹은 이 글이 증명해보려 했던 것처럼 그리드의 구상적 의의를 넘어 이성, 현실, 정치와 철저히 결부시킴으로써 서구 모더니즘의 전 지구적 유효성을 부정하려는 일종의 탈식민주의적 시도인지 등의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설사 후자를 의도하였다 하여도 그리드의 구조를 빌려 모호한 의미가 중첩된 추상으로 회귀해버린 이 작품을 모더니즘에 대항하는 의미 있는 ‘탈식민주의적’ 작품으로 볼 수 있을까. 또한, 작가는 자연을 문명의 지배에 대항하는 해방의 기표로 사용하는 동시에, 문명이 능가할 수 없는 초인간적 존재로 신격화함으로써 결국 크라우스가 논했던 현실과 낭만주의의 자아 분열을, 혹은 모더니즘의 유령을, 소환해버렸는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Anderson, Benedict. Imagined Communities. New York: Verso, 2006 (1983).
Krauss, Rosalind. ‘Grids’. October 9, Summer 1979: 50-64.
Scott. James, C. Seeing Like a Stat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