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계절, 사무실의 공기도 덩달아 서늘해집니다. 달력의 숫자가 넘어가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긴장감, 바로 ‘인사철’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짐을 싸고,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또 누군가는 씁쓸한 표정으로 빈 책상을 바라보는 시간. 이맘때가 되면 직장인이라는 존재의 무게가 유독 더 무겁고, 때로는 한없이 가볍게 느껴집니다.
직장인에게 인사이동은 단순한 자리 바꿈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세계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지진과도 같습니다. 지난 몇 년간 익숙했던 공간, 눈빛만 봐도 통했던 동료들, 손에 익은 업무의 리듬이 단숨에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부서에 배령을 받는 순간, 내가 쌓아 올린 ‘노하우’라는 공든 탑은 종종 무용지물이 됩니다. 낯선 업무 프로세스라는 황무지 앞에서 우리는 다시금 서툰 신입사원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새로운 상사의 성향을 파악하고, 낯선 동료들 사이에서 나의 위치를 다시 설정해야 하는 그 과정은, 겪을 때마다 닳고 닳아도 결코 무뎌지지 않는 피로감을 줍니다.
더욱 서글픈 것은 연차가 쌓여갈수록 좁아지는 운신의 폭입니다. 나의 나이테는 늘어가는데, 조직이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갓 베어 낸 나무처럼 신선하고 유연한 순발력입니다. 나보다 어린 상사를 모셔야 하는 상황이 오면, 상사가 느낄 부담감까지 헤아려야 하는 ‘어른’의 배려를 강요받기도 합니다. 그렇게 눈치를 살피고, 나를 낮추며 조직의 톱니바퀴에 억지로 몸을 맞추다 보면 문득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집니다. "나는 과연 언제까지 이 회사에 다닐 수 있을까? 내 커리어는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정답 없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과거에는 회사가 곧 나의 우주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서울 자가 대기업 김 부장’처럼 회사의 간판이 곧 나의 자존심이고, 승진이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유일한 척도였던 시대 말입니다. 하지만 공기는 달라졌습니다. 회사는 더 이상 우리의 평생을 책임져주지 않고, 사람들도 회사에 영혼을 저당 잡히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길을 잃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회사에 올인하지 말라는데, 그렇다면 나는 조직 안에서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하는가. 적당히 거리를 두자니 도태될 것 같고, 열정을 쏟자니 헌신짝이 될까 두려운, 그 애매한 경계선 위에서 우리는 비틀거립니다.
인사 발령 명단이 붙은 벽보 앞에서 희비가 교차하는 동료들의 얼굴을 봅니다. 원하던 보직을 얻어 의기양양한 사람, 좌천성 이동에 고개를 떨군 사람, 그리고 그 소용돌이 속에서 나의 이름을 확인하며 안도하거나 실망하는 나 자신. 이 모든 풍경을 바라보다 보면 깊은 회의감이 밀려옵니다.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것이 맞는 걸까? 이 조직이라는 거대한 배에서 나는 과연 필요한 선원인가, 아니면 언제든 교체 가능한 부품인가.
그리고 가장 아픈 질문이 날아와 박힙니다. “이 거대한 조직을 떠나서, 나는 과연 어떤 경쟁력을 가진 사람인가?”
자신감이 사라지면서 나는 점점 작아집니다. 마치 거대한 파도 앞에 선 모래성처럼, 회사라는 배경이 사라지면 나라는 존재도 흔적 없이 흩어질 것만 같습니다. “OOO 회사 다니는 OOO입니다”라는 자기소개에서 앞의 수식어를 떼어내고 나면, 과연 나를 설명할 단어가 세상에 남아 있기는 할까요? 나의 정체성이 온통 회사의 색깔로 물들어버려, 정작 내 본연의 색은 바래버린 것은 아닌지 두려워집니다. 나의 아이덴티티가 오로지 명함 한 장에 담겨 있다는 사실은 슬프고도 위태로운 일입니다. 명함이 사라지는 순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투명 인간이 될 것만 같은 공포가 인사철의 찬 바람과 함께 뼛속까지 스며듭니다.
점점 ‘나’는 사라지고 ‘회사’만 남은 것 같은 공허함. 경쟁력 없는 개인으로서의 초라함. 이 감정들은 우리가 직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겪는 필연적인 성장통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인사철이 주는 이 불안감은, 우리에게 “진짜 너는 누구니?”라고 묻는 삶의 준엄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회사의 직함이 아닌, 나라는 사람 그 자체로 온전할 수 있을까요. 조직의 논리가 아닌 나만의 가치관으로 내 인생의 인사를 단행할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창밖의 겨울나무는 잎을 다 떨구고도 앙상한 가지로 굳건히 서 있습니다. 그 나무는 자신이 어떤 숲에 있는지보다, 자신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알고 있는 듯합니다.
이 소란스러운 인사철의 한가운데서, 나는 다시금 다짐해 봅니다. 회사가 주는 명함 뒤에 숨지 않겠다고. 조직의 평가나 보직의 변경이 나라는 사람의 본질을 훼손할 수 없도록, 내 안의 단단한 심지를 키워야겠다고 말입니다. 비록 지금은 흔들리고, 작아 보이고, 확신이 없을지라도, 나는 회사라는 껍데기보다 더 크고 소중한 ‘나’를 찾아야만 합니다.
오늘도 낯선 부서, 낯선 자리에서 짐을 풀고 있을 당신에게, 그리고 여전히 흔들리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에게 작은 위로를 건넵니다. 우리는 직장인이기 이전에, 하나의 존엄한 우주를 품은 사람입니다. 이 계절의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부디 명함 없이도 빛나는 당신을 마주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우리가 조금 더 단단해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