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안녕을 위해 지워진 소녀들
두 개의 얼굴
기황후를 떠올리면 사람들은 흔히 두 가지 얼굴을 봅니다. 하나는 고려에서 원나라로 끌려간 공녀 출신이라는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끝내 원나라의 황후 자리까지 올라간 여인의 얼굴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뒤의 얼굴을 더 오래 기억합니다. 낮은 자리에서 시작해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간 한 여성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연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가장 많이 얻은 사람일까요?
혹은 가장 많이 잃은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기황후를 단지 권력의 정점에 오른 인물로만 보면, 그 비단옷 아래 가려진 수많은 공녀들의 눈물을 놓치게 됩니다. 그녀가 황후가 되었다는 사실은 한 사람의 성공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수많은 고려 여인들의 상처 위에 세워진 너무도 차가운 탑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들은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뽑혀 갔습니다. 불려 간 것이 아니라 끌려갔습니다. 나라가 그들을 지켜주지 못해서가 아니라, 어떤 순간에는 나라가 먼저 그들을 내주었습니다. 그 사실이 공녀들에게 남긴 감정은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안에는 분명 슬픔이 있었고, 수치심이 있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주 깊은 원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라가 나를 버렸다는 감각
어떤 여인이 타국으로 끌려갈 때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몸보다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14세기 고려, 개경의 거리에는 통곡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존립을 위해, 왕실의 안위를 위해 이름 모를 소녀들이 원나라로 향하는 수레에 올랐습니다. 역사의 기록은 그들을 '공녀(貢女)'라는 딱딱한 한자로 묶어버렸지만, 그 실체는 부모의 품에서 억지로 떼어놓아진 어린 딸들이었습니다. 바칠 공(貢), 여자 녀(女). 국가가 여자를 물건처럼 바친다는 뜻입니다.
누구의 딸이고, 누구의 누이이고, 누구의 아내가 될지도 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한 나라의 필요에 의해 다른 나라로 보내지는 존재가 됩니다. 이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짐처럼 느껴집니다. 숫자처럼 느껴집니다. 조정의 문서 한 줄, 사신의 요구 한 마디, 왕조의 체면과 외교 사이에서 교환 가능한 무엇으로 바뀌어버립니다.
도덕과 명분을 숭상하던 사대부들은 딸들이 끌려가는 수레바퀴 소리에 귀를 막았고, 조정은 그들의 희생을 당연한 공물로 치부했습니다. 심지어 결혼도감(結婚都監)이라는 관청까지 세워 소녀들을 더욱 효율적으로 골라냈습니다. 공녀 징발을 피하려고 조혼(早婚) 풍습이 생겨났을 정도였습니다. 나라가 딸들을 지켜주지 않으니, 부모들이 서둘러 딸을 남의 집으로 보내는 것만이 차선이었습니다. 국가라는 거대한 울타리는 가장 약한 이들을 먼저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며 겨우 버티고 있었던 셈입니다.
공녀들이 고려를 떠나며 가장 먼저 배웠던 것은 아마 이것이었을 것입니다. 국가는 멀리 있고, 두려움은 너무 가깝다는 사실. 내가 태어난 땅은 나를 품어준 고향이었지만, 동시에 나를 바칠 수도 있는 곳이었다는 사실. 사람이 제 조국을 미워하게 되는 순간은 대개 조국이 자신을 외면했다고 느낄 때입니다.
기씨 역시 그 수레 위에 있었습니다. 열네 살이었습니다. 떠나던 날 아침, 어머니는 울지 않았습니다. 우는 것조차 사치였을 테지요. 그저 딸의 손을 한 번 꽉 쥐었다가 놓았을 뿐입니다. 그 손의 온도가 얼마나 따뜻했는지, 얼마나 빠르게 식어갔는지를 기씨는 평생 손바닥으로 기억했을 것입니다. 고려의 봄은 그해도 어김없이 찾아왔지만, 그 소녀에게는 마지막 봄이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고향을 지워야 했던 사람들
원나라의 수도 대도(大都)에 도착한 고려의 여인들을 기다린 것은 따뜻한 환대가 아닌 철저한 분류였습니다. 미모와 재능에 따라 등급이 매겨졌고, 어떤 이는 황실의 시녀로, 어떤 이는 권력자의 첩으로, 어떤 이는 이름도 남기지 못한 노비로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타국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고귀한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비굴해져야 하고, 때로는 침묵해야 하며, 때로는 어제의 나를 버려야 합니다. 고려에서 쓰던 말투를 줄이고, 낯선 궁중의 질서를 익히고,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언제 버려질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일.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희미해지는 것은 자신의 본래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은 자신의 본래 마음이었습니다.
사람은 너무 오래 버티면 감정의 모서리를 스스로 깎아내게 됩니다. 아프면 견딜 수가 없으니 덜 아픈 척하게 되고, 억울하면 무너지니 덜 억울한 척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정말로 무뎌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무뎌진 것이 아니라 깊이 묻어두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들은 서로를 붙잡았습니다. 같은 언어로 밥을 짓고, 같은 방식으로 머리를 매만지며, 서로가 서로의 고려가 되어주었습니다. 고려양(高麗樣)이라 불리는 문화의 유행이 원나라 상류층을 뒤흔들었지만, 그 화려한 유행의 이면에는 공녀들의 처절한 생존 본능이 서려 있었습니다. 고향의 맛을 잊지 않으려 만든 음식이 우연히 주인의 식탁에 올랐고, 매서운 북방의 추위를 견디려 껴입은 옷이 귀족들의 눈에 세련되게 비쳤을 뿐입니다. 공녀들에게 고려양은 제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정체성이자, 자신들을 버린 고향과 연결된 가느다란 탯줄과도 같았습니다. 타국에서 피어난 고려양은 그렇게, 그리움이 살아남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리움보다 먼저 찾아오는 원망
고향은 늘 아름답게만 기억되지 않습니다. 특히 고향이 나를 지켜주지 못했을 때는 더 그렇습니다. 타지 생활이 길어질수록 고려는 점점 꿈속의 풍경처럼 흐려졌습니다. 처음에는 된장 냄새가 그리웠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그리웠고, 한강이 그리웠습니다. 공녀들이 밤마다 고려를 떠올릴 때, 어머니의 손길과 집 앞의 바람과 익숙한 말소리가 떠오르며 눈물짓는 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그리움은 서서히 다른 감정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다음 순간에는 이런 생각이 밀려왔을지도 모릅니다.
왜 하필 나였을까?
왜 우리였을까?
왜 그 많은 대신과 권력자들 사이에서 결국 내 몸이 먼저 계산되었을까?
기씨와 함께 궁에 들어왔던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몇 년이 지나도록 고려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주인의 사후에 실제로 귀국을 시도했고, 오랜 시간이 흘러 그 소식이 대도까지 닿았습니다. 고려에 돌아간 그녀가 남편에게도, 가족에게도 외면당했다는 것을. 사람들이 그녀를 더럽혀진 여자라고 불렀다는 것을.
이것이 고려였습니다. 소녀들을 보낼 때는 침묵하더니, 돌아오면 손가락질했습니다. 국가가 힘이 없어 지키지 못했음에도, 사회는 그 책임을 오롯이 여성 개인에게 지웠습니다. 지배층의 무능이 낳은 상처를 피해자의 도덕성을 공격함으로써 덮으려 했던 비겁한 시대의 민낯이었습니다.
가장 쓰라린 배신은 늘 가까운 곳에서 옵니다. 남이 나를 해치는 것보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나를 내놓았다는 사실이 더 오래 마음에 박힙니다. 그래서 공녀들의 고려에 대한 감정은 단순히 그립다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움과 분노가 한 몸처럼 엉켜 있었을 것입니다. 보고 싶은데 미운 나라, 돌아가고 싶은데 돌아가면 울 것 같은 나라, 끝내 내 뿌리이면서도 내 상처의 시작인 나라였을 것입니다.
돌아갈 고려가 없었습니다.
정확히는, 그녀들을 반길 고려가 없었습니다.
기황후 — 개인의 승리와 국가의 비극 사이
이 거대한 비극의 정점에 기황후가 있었습니다. 기씨가 원나라 권력의 중심에 서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렸습니다. 처음 궁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차를 따르는 시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총명함과 정치적 감각으로 순제의 총애를 얻었고, 1339년 아들을 낳으면서 세력을 굳혀갔습니다. 정황후 다나시리가 폐위·사사된 이후에도 무려 25년을 제2황후로 지내다가 1365년에야 비로소 제1황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몽골 귀족들의 뿌리 깊은 반발을 넘어서기까지 그만큼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기황후가 권력을 붙잡았던 것은 단순한 야망만으로 설명되지 않을 것입니다. 한 번 타국의 궁에 들어간 여인에게 권력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이었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총애를 잃으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는 자리, 보호받지 못하면 짓밟힐 수 있는 세계에서 권력은 스스로를 지키는 마지막 갑옷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묻게 됩니다. 그녀는 권력을 사랑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권력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빨리 배운 것일까요.
그러나 황후가 된 후에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함께 끌려왔지만 권력도 총애도 얻지 못한 채 이름 없이 사라진 소녀들의 얼굴이었습니다. 기황후는 그들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황후가 되고 나서도 공녀 제도는 계속되었고, 고려에서는 여전히 어린 소녀들이 수레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막을 수 있었는데도. 그 죄책감은 어떤 권력도 씻어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기황후의 개인적인 승리는 고국 고려에게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권세를 등에 업은 친가 식구들은 고려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백성을 수탈했고, 기황후 자신은 1364년 공민왕의 반원 정책에 분노하여 고려를 침공하는 군대를 보냈습니다. 역사는 이 사실만을 들어 그녀를 조국을 위협한 배신자라 평가하곤 합니다.
하지만 전지적 시점에서 바라본 그녀의 내면은 훨씬 복합적이었습니다. 기황후의 경우, 사랑만 남아 있는 사람은 그렇게 복잡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상처 입은 애정은 늘 뒤틀린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미움이 아니라 실망이 깊을수록 사람은 더 집요해집니다. 어쩌면 그것은 사랑이 원망으로 변하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였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지켜주지 않았던 나라, 돌아온 여자들에게 돌을 던지던 나라, 딸들을 조용히 내어주던 나라를 향한 — 어린 시절부터 켜켜이 쌓인 상처가, 권력을 얻은 후에야 비로소 터져 나온 것은 아닐까요.
그녀가 고려를 도왔다는 평가와 고려를 흔들었다는 평가가 동시에 존재하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기황후가 고려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애정과 거리감, 보호 본능과 원망, 자부심과 모멸감이 함께 들어 있었을 것만 같습니다. 역사는 결과만을 기록하지만,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의 내면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부서지고 쌓였는지는 기록하지 않습니다.
황후가 되어도 공녀였던 기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권력은 현재를 바꿀 수는 있어도 과거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황후가 된 기황후가 얼마나 화려한 옷을 입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처음 원나라 땅을 밟던 날의 공포를 지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오르면 과거의 상처를 잊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높은 자리일수록 과거의 초라함과 두려움이 더 선명하게 되살아나기도 합니다. 내가 여기까지 올라온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무엇을 잃고 무엇을 버렸는지, 누구를 밟고 누구를 잊었는지 끊임없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기황후는 황후가 되었지만, 공녀였던 시간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시간은 그녀 안에서 형태를 바꾸었을 뿐입니다. 두려움은 경계심이 되었을 것이고, 모멸감은 권력 의지가 되었을 것이며, 버려졌다는 감각은 결코 다시 버려지지 않겠다는 집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기황후만의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떤 공녀는 끝내 이름 없이 생을 마감했겠지만, 그 또한 매 순간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버티고 무너졌을 것입니다. 말 못 하는 사람은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고통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늘 살아남은 자의 이름만 크게 남기지만, 그 뒤에는 이름조차 불리지 못한 사람들의 침묵이 더 많이 쌓여 있습니다.
환향녀(還鄕女) — 끝나지 않은 낙인
전쟁이 끝나고 기적적으로 고국에 돌아온 여인들에게, 국가는 또 다른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이라는 뜻의 환향녀는 어느새 정절을 잃은 여인을 비하하는 화냥년이라는 욕설로 변질되었습니다. 국가가 힘이 없어 지키지 못했음에도, 사회는 그 책임을 오롯이 여성 개인에게 지웠습니다. 돌아온 딸들을 따뜻하게 안아주기는커녕, 가문의 수치라며 외면하거나 자결을 강요했습니다. 피해자에게 수치를 씌우는 이 구조는 공녀의 시대에도, 병자호란의 환향녀에게도 동일하게 반복되었습니다. 시대가 달라도 여자의 몸에 국가의 실패를 새기는 방식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욕설 하나가 그 모든 역사를 압축하고 있습니다.
화냥년.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던 그 말의 뿌리에는, 타국으로 끌려가 살아 돌아온 여자들을 향해 돌을 던지던 사회의 잔인함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습니다. 언어는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시대가 무엇을 혐오했는지, 누구의 고통을 외면했는지는 결국 말속에 남습니다.
우리가 기황후를 볼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
기황후를 평가할 때 사람들은 종종 흑백으로 나누고 싶어 합니다. 나라를 배신한 인물인가, 혹은 시대를 뚫고 올라간 강인한 여성인가.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한 줄로 끝나지 않습니다. 특히 상처 입은 시대를 산 사람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그녀는 분명 권력을 누린 인물이었습니다. 동시에 그 권력 이전에 먼저 국가에 의해 타국으로 보내진 여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선택 가운데 비판받아야 할 부분은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판이 그녀와 같은 처지에 놓였던 공녀들의 슬픔을 지워서는 안 됩니다.
기황후를 떠올릴 때마다, 황후의 얼굴보다 먼저 어린 공녀의 뒷모습이 보입니다. 아직 세상이 얼마나 냉혹했는지 다 알지 못한 채, 가족과 고향에서 떼어져 낯선 길로 향하던 한 사람의 작은 등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또 다른 수많은 등이 이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는 울었을 것이고, 누구는 이를 악물었을 것이며, 누구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라가 약할 때 가장 먼저 대가를 치르는 것은 늘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쉽게 희생되는 쪽은 대개 힘없는 여성들입니다. 공녀의 역사는 그래서 단순히 과거의 비극이 아닙니다. 국가가 개인을 어떻게 다루는가, 권력이 누구의 몸 위에서 유지되는가를 묻는 아주 오래된 질문입니다.
에필로그 — 가슴에 박힌 가시
기황후의 삶을 통해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출세담이 아닙니다. 그녀가 끝내 벗어날 수 없었던 출발점, 즉 공녀라는 이름의 상처입니다.
그들은 고려를 사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원망했을 것입니다. 돌아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돌아간다 한들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공녀들에게 고향은 안식처가 아니라 평생 가슴에 걸린 가시였을지도 모릅니다.
황후가 되어도 그 가시는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깊이 박혔을지도 모릅니다. 가장 화려한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가장 초라한 출발을 잊지 못하는 일. 그것이 기황후의 비극이었고, 동시에 이름 없는 공녀들 모두의 비극이었을 것입니다.
역사는 '기씨(奇氏)'라는 성만 남겼습니다. 이름은 영영 알 수 없습니다. 하물며 그녀와 함께 끌려갔던 수천 명의 소녀들은 성조차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역사의 각주에도 오르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분명히 살았습니다. 그리워하고, 원망하고, 포기하고, 다시 일어서며. 나라가 지켜주지 않아도 스스로를 지켜낸 여자들이었습니다.
역사가 외면했던 그들의 진실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 그것이 비극적인 시대를 온몸으로 버텨낸 그녀들에게, 우리가 뒤늦게나마 건넬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일 것입니다.
고려의 봄은 지금도 온다고 합니다. 그녀들이 떠난 자리에도, 그녀들이 끝내 닿지 못한 자리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