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출보다 절제가 더 에로틱한 이유

영화 '화양연화'가 보여주는 욕망의 품격

by 윤슬
가장 에로틱한 영화에 대하여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花樣年華). 2000년에 개봉한 이 홍콩 영화는, 제가 본 영화 중 가장 에로틱한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리 기억을 뒤져도 노출 장면이 없습니다. 격정적인 키스 장면도 없습니다. 두 사람은 결코 침대로 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베드신이 난무하는 어떤 영화보다 끈적하고 관능적입니다. 대신 좁은 계단, 치파오의 옆선, 슬로우모션으로 흘러가는 복도, 그리고 그 복도를 지나가는 한 여자의 뒷모습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지독하게 관능적입니다. 영화를 본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그 향기가 가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화양연화가 욕망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말하지 않고, 보여줍니다. 보여주되, 다 보여주지 않습니다. 욕망을 노출로 말로 소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밀한 시선으로, 몸짓으로, 옷감의 결로,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는 거리감으로 욕망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 절제가 오히려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깊이 몸속으로 파고듭니다. 가장 우아한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이 영화의 본질은 지독하게 관능적입니다.


일어나지 않은 사건의 연대기


이 영화의 줄거리는 요약하기가 묘하게 어렵습니다.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1962년 홍콩의 비좁고 눅눅한 공간. 수리진(장만옥)과 차우 모완(양조위)은 같은 날, 같은 건물에 이웃으로 이사 옵니다. 두 사람 모두 배우자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예의 있는 이웃으로 스쳐 지나갑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각자의 배우자가 서로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설정만 놓고 보면 흔한 불륜 멜로드라마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배신당한 두 남녀가 서로 위로받다가 결국 같은 방식으로 관계를 맺게 되는 이야기처럼요. 그런데 화양연화는 그 쉬운 길을 택하지 않습니다. 피해자끼리 만나고, 가까워지고, 그러나 끝내 선을 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같지 않아요." 이 한 문장이 영화 전체의 도덕적 코르셋입니다. 단순한 도덕적 선언이 아니라, 이 영화를 끝까지 지배하는 윤리적 긴장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외도의 영화라기보다, 외도 직전의 감정이 얼마나 복잡하고 고통스러운지를 보여주는 영화에 가깝습니다.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고, 기대고 싶지만 기대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아 멈춰 서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기묘하고 관능적인 장면은 두 사람이 각자의 배우자를 직접 연기하는 역할극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시작했을까요?"라는 질문과 함께 차우와 수리진은 서로의 외도한 배우자가 되어봅니다. 이 역할극은 단순한 상황의 재현이 아닙니다. 서로를 향해 끓어오르는 욕망을 '타인의 흉내'라는 안전한 방패 뒤에 숨겨 분출하는 은밀한 전희(前戲)입니다. 진심을 직접 말할 수 없으니 역할극이라는 우회로를 택하는 것입니다. 직접적인 고백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의 눈빛을 읽고, 손끝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대화를 나누는 그 행위 안에는 이미 거대한 감정의 긴장이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왕가위는 그 '끝내 넘지 않음'을 가지고 두 시간짜리 영화를 만들어냅니다. 사건이 없는 자리에 감각만이 남습니다.


이 영화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나열해 보면 이렇습니다. 그들은 선을 넘지 않습니다. 고백하지 않습니다. 함께 떠나지 않습니다. 서로 그렇게 간절히 원함에도 불구하고요.


그 모든 '않음'의 목록이 곧 이 영화입니다.


장만옥: 치파오가 말하는 것들


왕가위는 대사 대신 치파오를 썼습니다.


수리진은 영화 내내 치파오만 입습니다. 20벌이 넘습니다. 꽃무늬, 격자무늬, 단색. 색은 매 장면마다 달라집니다. 처음엔 따뜻하고 화사하다가, 관계가 복잡해질수록 어두워지고, 마지막 장면에선 깊고 가라앉은 색이 됩니다. 대사로 표현하지 않아도, 치파오의 색이 그녀의 감정을 말합니다. 왕가위는 그녀의 내면을 언어가 아니라 천의 색깔로 설계했습니다.


치파오라는 의복 자체가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치파오는 완전히 입은 옷이면서, 동시에 벗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옷입니다. 목까지 올라오는 빳빳한 하이넥 칼라, 어깨를 조이는 천. 노골적인 노출은 단 한 뼘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형태는 흐트러짐을 용납하지 않는 수리진의 철저한 자기 통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녀는 이 옷을 입고 항상 꼿꼿하고 바른 자세를 유지합니다. 감정이 어디를 향하든, 몸만큼은 단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몸의 선을 따라 정밀하게 재단된 천은 움직일 때마다 허리의 잘록함과 골반의 곡선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깊게 파인 옆트임 사이로 허벅지가 아슬아슬하게 스칩니다. 가리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오히려 맨살보다 더 선명하게 몸의 형태가 느껴집니다. 완전히 덮여 있기 때문에 상상은 그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듭니다.


노출은 상상을 차단합니다. 그러나 치파오는 상상을 열어둡니다. 천 한 겹이 몸과 시선 사이에 존재하는 한, 보는 사람의 욕망은 그 경계 앞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안쪽을 향해 나아갑니다. 왕가위는 바로 이 원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드러낸 것은 보는 순간 끝이 납니다. 그러나 천 한 겹으로 감춰진 것은 끝나지 않습니다. 보는 내내, 보고 난 뒤에도 계속 상상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장만옥이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국수를 사러 가는 짧은 동선이 영화 안에서 반복됩니다. 그녀가 한 발 한 발 내려올 때마다 치파오의 천이 허벅지의 움직임에 따라 팽팽하게 긴장했다가 이완됩니다. 좁은 골목길에서의 리드미컬한 골반의 움직임. 그 천의 긴장과 이완이 몸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전달합니다. 카메라는 슬로우모션으로 그것을 따라갑니다. 서두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도적으로 늘여놓습니다. 보는 사람의 숨이 잠시 멎을 만큼.


이 장면에서 피부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관능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장면을 떠올릴 것입니다. 치파오가 몸을 완전히 감싸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안의 몸이 더 강렬하게 의식됩니다. 감춰진 것이 드러난 것보다 더 오래, 더 깊이 남습니다.


치파오는 이 영화의 주제 그 자체입니다. 도덕이라는 이름의 구속복을 입고 있지만, 그 틈새로 흘러나오는 유려한 곡선. 머리로는 철저히 욕망을 통제하려 하지만 몸은 이미 상대를 향해 반응하고 있는 수리진의 이율배반적인 심리를 치파오는 가장 완벽하게 시각화합니다. 입고 있지만 벗은 듯 상상하게 만드는 옷. 말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느끼게 만드는 두 사람. 화양연화는 그 방식으로 욕망을 다룹니다.


두 사람의 초상: 도덕이라는 감옥


수리진은 욕망을 가장 단정하게 입고 다니는 여자입니다.


그녀는 언제나 완벽하게 차려입습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치파오는 그녀의 갑옷이자 동시에 유혹의 언어입니다. "우리는 달라야 한다"라고 말하면서도 계속 이유를 만들어 차우를 찾아옵니다. 자기 검열과 욕망 사이에서 그녀는 언제나 자기 검열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몸은 그 반대쪽을 향합니다. 과장된 표정으로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습니다. 울부짖지도 않고, 쉽게 무너지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늘 단정하고 조용하며, 감정을 억누른 채 서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절제가 그녀를 더 눈부시게 만듭니다. 인간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자신을 함부로 소모하지 않을 때라는 사실을, 수리진은 거의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차우는 욕망을 글로 쓰는 남자입니다.


그는 무협 소설을 씁니다. 현실에서 말하지 못한 것들을 픽션으로 옮깁니다. 수리진이 차우의 방을 찾아 함께 소설을 쓰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은밀한 장면 중 하나입니다. 육체의 결합 대신 활자를 나누고 문장을 섞으며, 그들은 지성이라는 포장지로 자신들의 본능을 겹겹이 싸맵니다. 직접 고백하지 않고 이야기 속 인물의 입을 빌려 감정을 표현하는 것. 그것은 고백이 아닙니다. 그러나 고백보다 더 위험합니다.


차우는 소려진과 가까워지면서도 늘 한 박자 늦습니다. 진심을 말할 듯하다가도 비켜 가고, 붙잡을 듯하다가도 한 걸음 물러섭니다. 이 지점에서 차우는 입으로만 욕망을 떠드는 사람들과 완전히 달라집니다. 노골적인 말을 가볍게 내뱉는 사람들은 대개 관계의 결과를 책임지지 않습니다. 말은 쉽게 하지만 진심은 없습니다. 그러나 차우는 반대로 진심이 있기 때문에 쉽게 말하지 못합니다. 말의 무게를 알기 때문입니다. 진짜 마음이 생길수록 더 조심하고, 더 침묵합니다. 그것이 그의 상처이자, 동시에 이 인물을 더 애틋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그리고 이별의 순간. 차우가 싱가포르로 떠난다는 사실을 입 밖에 내뱉는 순간, 수리진은 무너져 내리며 오열합니다. 가짜로 시작했던 역할극이 통제할 수 없는 진짜 감정과 정면으로 충돌한 것입니다. "울지 말아요. 이건 연습일 뿐이잖아요." 차우의 위로에도 수리진의 눈물은 멈추지 않습니다. 서로의 손을 잡는 것조차 머뭇거리는 그들의 조심스러움은 그 어떤 이별보다 처절합니다. 말로만, 상상으로만 욕망을 품어왔던 이들이 마침내 직면한 현실. 그들은 스스로 만든 도덕의 감옥에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왕가위의 연출: 사랑을 찍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참는 시간을 찍다.


왕가위는 공간을 좁게 만들었습니다.


복도, 계단, 국숫집의 좁은 통로. 두 사람이 지나치려면 반드시 스쳐야 하는 공간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두 사람은 자꾸 마주치지만 자유롭지 않습니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마음대로 안을 수 없습니다. 공간이 두 사람을 강제로 밀착시키고, 카메라는 그것을 멀리서 지켜봅니다.


크리스토퍼 도일의 카메라는 두 사람의 모습을 탁 트인 공간에서 온전히 보여주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항상 좁은 복도, 문틈, 창살 너머, 거울에 반사된 모습으로 포착합니다. 프레임 속의 프레임(Frame within a frame). 이 연출은 두 가지를 동시에 만들어냅니다.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규범이라는 감옥에 갇힌 두 사람의 현실을 시각화하는 동시에, 관객을 그들의 은밀한 만남을 숨죽여 훔쳐보는 관음증적 시선의 주체로 만듭니다. 우리 역시 이 영화의 욕망 구조 안에 조용히 포획되어 있습니다.


슬로우모션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시각 언어입니다. 국수를 사러 가는 길,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는 몸, 머뭇거리며 돌아서는 장면들. 별일 아닌 것 같은 동작들이 음악과 함께 반복될 때 그것은 일상이 아니라 감정의 리듬이 됩니다. 왕가위는 사건을 쫓지 않습니다. 대신 감정이 한 번 지나간 자리를 다시 보여줍니다. 또 보여주고, 또 머물게 합니다. 그래서 관객은 이야기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를 체류하게 됩니다.


우메바야시 시게루의 왈츠, Yumeji's Theme. 슬로우모션이 등장할 때마다 이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왈츠는 본래 돌고 도는 음악입니다. 충족되지 않은 욕망도 그렇습니다. 해소되지 않고 반복됩니다.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돕니다.


영화 전체를 감싸는 붉은빛과 황금빛, 그 눅눅하고 농밀한 색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영화의 관능은 밝고 시원한 곳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답답하고 비좁고 느린 시간 속에서 나옵니다. 너무 쉽게 분출되는 감정보다 오래 눌린 감정이 더 진하고 더 아프게 남는 것처럼, 카메라는 노골적인 노출 없이도 화면의 습도와 온도만으로 영화 전체를 관능적인 아우라로 물들입니다. 왕가위는 사랑하는 순간이 아니라, 사랑을 참는 시간을 찍는 감독입니다.


결국 더 야한 것은 말이 아니라 거리입니다.


화양연화(花樣年華). 꽃이 만발한 시절,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 제목이 그렇습니다.


시간이 흘러 1966년,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차우는 사원의 갈라진 벽 틈에 입을 맞추듯 무언가를 속삭이고 진흙으로 구멍을 메웁니다. 그토록 많은 역할극과 은유적인 대사들을 쏟아냈음에도 끝내 내뱉지 못했던 진짜 말. "사랑한다"는 고백이었을까요, 아니면 "나와 함께 떠나자"는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었을까요. 그가 무엇을 속삭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영원한 침묵 속에 봉인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확실히 알게 됩니다. 야함은 노골적인 언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음담패설은 너무 많은 것을 직접 말해버립니다. 그래서 상상할 여지가 없습니다. 상대의 내면도 없고, 관계의 윤리도 없고, 욕망의 맥락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극만 있습니다. 반면 화양연화의 대사들은 거의 모든 것을 남겨둡니다. 관객은 그 빈칸을 채우게 되고, 그 과정에서 훨씬 더 크고 깊은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왕가위는 그 아름다운 시절을 소비하지 않았습니다. 박제했습니다. 두 사람이 욕망을 실행했다면, 그것은 기억이 되었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래고 감각이 희미해지는 기억. 그러나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감정은 신화가 되었습니다.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부패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한동안 멍해집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몸이 무겁습니다. 두 사람이 하지 않은 것들이 고스란히 보는 이의 몸 안에 쌓이는 느낌. 영화가 끝나도 그 무게가 가시지 않습니다.


치파오 안에 감춰진 선처럼, 좁은 복도에서 스치고 지나간 어깨처럼, 돌구멍 속에 봉인된 말처럼. 가장 세속적인 욕망을 가장 고결한 언어와 태도로 억눌렀던 두 사람. 이 영화는 그 미완성의 답답함 때문에 영화사상 가장 슬프고도 관능적인 이야기로 남았습니다.


진짜 관능은 타인을 함부로 소비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끝내 다가가지 못한 거리와, 삼켜진 말과, 떨리는 시선 속에서 완성됩니다. 그래서 화양연화는 음담패설보다 훨씬 더 야합니다. 더 많은 것을 보여줘서가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끝내 보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가장 깊이 남는 것은, 끝내 말하지 않기로 한 것들입니다.

왕가위는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화양연화 (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2000. 감독 왕가위. 주연 양조위, 장만옥.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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