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세의 여자는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는가?

영화 '69세'가 던지는 질문

by 윤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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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건은 그 자체보다도,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더 잔인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한국영화 〈69세〉가 바로 그렇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잠깐 멈칫했습니다. 그 멈칫함이 무엇인지 한동안 들여다보았어요. 불쾌함이었을까요?, 낯섦이었을까요?. 아니면 저도 모르게 '그 나이에?'라는 물음표를 마음속에 찍고 있었던 걸까요?


그 물음표가 바로 이 글의 출발점입니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누가 누구를 해쳤는가, 법적으로 무엇이 증명되는가를 넘어섭니다. 영화는 훨씬 더 불편한 곳을 찌릅니다. 우리는 왜 노년 여성에게 벌어진 성폭력을 선뜻 믿지 못하는가? 우리는 왜 늙은 여성을 욕망과 무관한 존재로 여기고 살아가는가? 그리고 그 믿음은, 사실이 아니라 사회가 편의상 만들어놓은 오랜 편견은 아닌가?


젊은 여성이 성폭력 피해를 말하면 사람들은 증거를 요구하면서도 최소한 사건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이 든 여성이 피해를 말할 때 사람들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묻습니다. 그 나이에? 그 여자를? 왜? 피해의 진실을 따지기 전에, 피해자의 몸을 먼저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 물음표 안에, 우리 사회가 노인 여성의 몸에 대해 가진 모든 편견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


영화는 완전한 암전으로 시작됩니다. 화면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만 들립니다.


"수영을 해서 몸매가 좋다."


29세 남자 간호조무사가 병실의 69세 효정에게 건네는 말입니다. 그리고 불안한 침묵. 공백. 관객은 나중에야 깨닫습니다. 그 암전이 바로 성폭행 장면이었다는 것을.


임선애 감독은 그 장면을 직접 보여주지 않습니다. 보여줄 필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보여주는 것 자체가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절제의 윤리를 지킵니다. 범죄의 재현이 아니라, 범죄 이후를 살아가는 인간을 기록하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선택입니다.


어둠 속에서 시작된 영화는 빛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 걸음이 얼마나 외롭고 느린지를 카메라는 차분하게, 집요하게 따라갑니다.


사건보다 더 잔인한 것은 불신입니다.


화면이 밝아지면, 효정은 이미 퇴원해 있습니다. 수영장에 가고, 집안일을 하고, 동거인 동인과 함께 장을 보고 밥을 먹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이 흘러갑니다.


그러다 어느 날, 효정이 말합니다.


"신고를 해야겠어요."


짧은 문장입니다. 하지만 그 말이 나오기까지 효정이 혼자 삼켜야 했을 시간의 무게를 생각하면, 이 짧은 말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수치심과 체념과 두려움을 밀어내고 겨우 꺼낸 결심. 그것이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 용기에 모욕으로 답합니다. 경찰서에서 번호표를 뽑고 한참을 기다리는 효정, 강간죄 고소장 예시를 조용히 들여다보며 빈칸을 채우는 효정. 다른 영화였다면 응당 생략됐을 그 지독히도 일상적인 수순을 영화는 끝까지 보여줍니다. 그리고 담당 경찰관이 동료에게 낮은 목소리로 던지는 말.


"노인분에게 친절이 과했네."


농담입니다. 그들에게는. 하지만 그 농담 안에 사회의 전제 전체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29세 청년이 69세 여성을 성폭행할 이유가 없다는 것. 그 나이의 여자는 그런 일을 당할 리 없다는 것. 결국 법원도 나이 차이를 근거로 구속영장을 기각합니다.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효정이 해야 하는 일은 피해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입증하는 일이 됩니다. 그의 진술은 사건에 대한 진술인 동시에, 자기 존재 전체에 대한 변론이 되어버립니다. 세상은 그를 피해자로 보기 전에 먼저 늙은 여자로 봅니다. 그것도 이미 성과는 무관해졌어야 할 몸으로 말입니다.


성폭력의 본질: 욕망이 아닌 권력의 문제


'개연성 부족'이라는 단어 속에는 우리 사회가 성폭력을 바라보는 얄팍한 시선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성폭력을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향한 억눌린 욕망의 문제로 착각하곤 합니다. 그 착각 위에서 69세 여성이 피해자라는 말은 처음부터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해자 이중호를 들여다보면 진실은 전혀 다릅니다.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주변 평판이 좋고, 곧 결혼을 앞둔 평범한 청년. 그가 효정을 범행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효정이 치명적인 성적 매력을 뿜어내서가 아닙니다. 효정이 가장 취약한 약자였기 때문입니다. 신고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 신고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


〈69세〉는 완전한 픽션이 아닙니다. 임선애 감독은 2013년 노인 여성 대상 성범죄 관련 칼럼을 우연히 읽고 이 영화를 기획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노인 여성은 무성적 존재로 보는 편견 때문에 오히려 가해자의 타깃이 된다.'


가해자가 노인 여성을 선택하는 이유는 욕망이 아니라 계산입니다.


신고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

신고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


그 계산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사회가 오랫동안 쌓아온 편견의 구조입니다. 사회가 어떤 몸을 덜 중요한 몸으로 취급할수록, 그 몸의 피해는 더 쉽게 축소되고 더 늦게 발견됩니다.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가 오히려 더 쉽게 침해당하는 잔인한 아이러니. 〈69세〉는 그 불편한 진실의 정곡을 서늘하게 찌릅니다.


한국의 노인 성폭력 피해는 상당 부분 신고조차 되지 않습니다. 수치심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문화, 가족에게 짐이 될까 봐 침묵하는 노인들, 그리고 무엇보다 — '누가 믿어주겠느냐?'는 체념이 작동합니다. 효정의 이야기가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이 범주의 사건들이 얼마나 철저히 비가시화되어 왔는지를 반증합니다.


효정이라는 사람, 지워지기를 거부하는 몸


이 영화가 빛나는 가장 큰 이유는 효정이 단지 불쌍한 노인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만약 영화가 효정을 오직 연민의 대상으로만 다뤘다면, 오히려 또 다른 방식으로 그를 지워버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영화는 효정을 끝까지 한 인간으로 남겨둡니다.


그녀는 몸에 잘 맞는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꾸준히 수영장을 다니며 자신의 몸을 돌봅니다. 남들이 흔히 상상하는 가엾고 웅크린 할머니가 아닙니다. 상처받고, 수치심을 느끼고, 분노하고, 무너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 존엄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약한 사람이 아니라, 무너지는 와중에도 사라지지 않으려는 사람으로 남습니다.


세상은 그녀에게 '할머니'로서의 모습을 강요합니다. 약자로서 눈물을 흘리고, 치매를 의심받으며 무너져 내리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효정은 그들이 원하는 서사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끔찍한 트라우마 속에서도 다시 수영복을 입고 물속으로 뛰어들고,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정갈한 글씨로 직접 고발장을 써 내려갑니다.


이 영화의 큰 미덕은 효정의 몸을 비참함의 상징으로만 소비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서사 속에서 노년 여성을 자주 인간으로 보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엄마, 할머니, 돌봄의 대상, 보호받아야 할 존재 정도로만 호명할 뿐입니다. 그러나 〈69세〉는 그 익숙한 틀을 깨뜨립니다. 늙은 몸이라는 이유로 감각과 존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영화는 조용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보여줍니다.


노년의 연대가 가진 온도


효정 곁에는 동인이 있습니다. 그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영웅 같은 인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역시 늙은 남성으로서 세상의 무관심과 무력감 속에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동인은 분노를 이기지 못해 가해자에게 사적인 복수를 시도하다 무력감에 빠지면서, 아들인 변호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억울한 사람이 있을 땐 어떡해서든지 그 억울함을 풀어줘야 되는 것 아니냐."


하지만 아들도, 법도, 세상도 쉽게 효정의 편이 되어주지 않습니다. 동인은 효정을 대신해 싸워주는 존재라기보다, 효정의 현실을 함께 견디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이 관계는 젊은 영화들이 흔히 보여주는 구원 서사와는 거리가 멉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멋지게 구해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다 늙어가며 세상의 무례함 속에서 겨우 버티는 관계. 함께 늙어간다는 것은 단지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함부로 가볍게 여기지 않게 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늙은 여성은 왜 성의 바깥으로 밀려나는가?


이 영화가 가장 날카롭게 건드리는 것은 노인에 대한 성 편견입니다.


젊은 여성의 몸은 과하게 성적 대상화하면서도, 늙은 여성의 몸은 아예 성의 영역 밖으로 밀어내 버립니다. 이것은 서로 반대되는 태도처럼 보이지만 사실 같은 뿌리를 가집니다. 여성의 몸을 언제나 사회가 규정하고 평가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젊을 때는 몸이 과도하게 소비되다가, 나이 들면 몸이 완전히 삭제됩니다. 이 극단 사이에서 여성은 언제나 타인의 시선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습니다.


그래서 효정의 신고가 처음부터 반쯤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노년 여성의 몸을 애초에 성의 맥락에서 상상하지 않기 때문에, 가해자가 그녀를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욕망의 주체도 아니고, 욕망의 객체도 아니며, 그저 늙어버린 몸일 뿐이라고 여기는 것이죠.


여기에 위험한 논리적 구조가 숨어 있습니다. '성적 대상이 아닌 존재'는 동시에 '성적으로 침해받을 수 없는 존재'로 오독됩니다. 욕망받지 못하는 사람은 피해를 입을 수도 없다는 전제. 이것이 효정의 신고가 처음부터 반쯤 무효가 되는 이유입니다. 가해자가 그녀를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들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기묘한 이중성을 가집니다. 노인 여성의 성적 피해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들의 신체 노화는 혐오와 조롱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젊음을 잃었기 때문에 조롱받고, 그 조롱의 연장선에서 인간으로서의 감각마저 박탈당합니다. 노인 여성의 몸은 욕망받지도 못하고, 고통받지도 않는 것으로 처리됩니다. 두 방향 모두에서 인간 이하의 자리로 밀려나는 것이죠.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이 보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또 다른 방식의 배제입니다.


효정은 가해자 이중호의 결혼식장을 직접 찾아가 서늘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합니다.


"인생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아."


배우 예수정은 인터뷰에서 이 대사가 가장 가슴에 남았다고 밝혔습니다. 이중호에게 분노에 차 건네는 말이지만, 동시에 인생이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버텨왔다는, 효정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욕망받지 못하는 몸이라는 이유로 침해당하지 않은 것으로 오독된 몸. 그 몸이 "나는 아직 살아 있다"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나이 든 여성도 성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라는 말이 단순한 자극적 문장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 문장이 겨냥해야 할 것은 선정성이 아니라 편견입니다. 늙은 여성도 여전히 성적 존재일 수 있다는 말은, 그 역시 사랑할 수 있고 욕망할 수 있으며, 타인의 시선과 접촉 앞에서 수치와 불안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이라는 뜻이어야 합니다. 노년 여성의 몸을 다시 상품화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그 몸이 결코 죽은 몸이 아니라고 말하는 선언이어야 합니다.


"할머니"라는 단어가 지우는 것


'할머니'라는 호칭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 단어는 따뜻합니다. 친근합니다. 동시에, 그 단어는 어떤 여성을 완전히 다른 범주로 이동시킵니다. 이름이 사라지고, 개인이 사라지며, 역할만 남습니다. 효정은 더 이상 심효정이 아니라 '할머니'가 됩니다. 할머니는 욕망받지 않습니다. 할머니는 피해를 당하지 않습니다. 할머니는 그냥 —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노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대체로 두 갈래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무력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삶의 중요한 감각이 끝난 존재라는 시선입니다. 문제는 이 두 시선이 겉보기엔 다정해 보여도 결국 같은 결과를 낳는다는 점입니다. 노인을 독립적인 주체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노년 여성은 이중으로 지워집니다. 노인이기 때문에 지워지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또 다른 방식으로 재단됩니다.


그래서 효정이 직접 쓴 고소장의 첫 문장은 더욱 눈부십니다.


"저, 심효정입니다. 제 나이 육십구 세입니다."


이름이 먼저입니다. 나이는 그다음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자기소개가 아닙니다. 나이 뒤에 숨겨진 자신의 이름을 되찾고, 나이 든 여성도 상처받고 분노하는 온전한 인간임을 선언하는 투쟁입니다. 효정은 피해를 증명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해냈습니다.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인간임을 스스로 증명해 낸 것입니다.


늙는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소장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제 얘기가 여러 사람을 불쾌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 보는 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봄볕에 눈물도 찬란하게 빛난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이제 전 어려운 고백을 시작으로 한 걸음.. 한 걸음.. 햇빛으로 나아가 보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늙음을 삶의 퇴장처럼 생각합니다. 사랑도 끝나고, 욕망도 사라지고, 감각도 무뎌지고, 존엄마저 희미해지는 과정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 통념을 거부합니다. 늙는다는 것은 감각이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사회가 그 감각을 보지 않으려 드는 일이 될 때가 많습니다. 늙은 몸은 여전히 느끼고, 여전히 다치고, 여전히 수치심을 알고, 여전히 존엄을 지키고 싶어 합니다.


효정이 병원 옥상에서 수백 장의 고소장을 바람에 날려 보내는 마지막 장면. 어둠 속 목소리로 시작된 영화가, 봄볕 속으로 걸어가는 한 여성의 뒷모습으로 끝납니다. 언젠가 나도 69세가 됩니다. 그때 나의 몸은 여전히 나의 것일까요. 나의 감각은, 나의 고통은, 나의 진술은 — 그 나이에도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여질까요.


효정의 싸움은 단순히 한 노인 여성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30대, 40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미래에 반드시 요구해야 할 권리를 먼저 싸워 보여준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우리가 이 문제를 외면하면, 미래의 우리는 아무런 언어도 없이 효정의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몸이 늙어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노년》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노인이 되어도 내면의 자아는 여전히 젊다고 느낀다고. 몸은 달라졌지만, 그 안의 인간은 계속해서 존재한다고.


효정의 몸은 69세입니다. 하지만 그 몸에는 피부 감각이 있고, 수치심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기억이 있고, 존엄이 있습니다. 몸이 늙는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형태가 달라질 뿐, 그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감각과 권리는 나이와 함께 소멸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노인의 신체를 '탈성화(desexualization)'합니다. 노인의 몸에서 성적인 것을 지움으로써 마치 그것이 노인을 존중하는 일인 양 여깁니다. 하지만 그 탈성화는 동시에 노인의 몸을 완전한 인간의 몸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성적 침해를 당할 수 없는 몸,

고통을 느낄 수 없는 몸,

인격적 모욕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몸으로 간주하는 것이죠.


그것은 존중이 아니라 지움입니다.


마지막으로, 효정의 팩스에 우리가 써야 할 답장


"69세의 여자는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는가?"라는 질문은 그래서 단순한 도발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노년 여성의 삶을 편리하게 지워왔는지를 되묻는 질문입니다.


누군가의 젊음은 신뢰의 근거가 되고, 누군가의 늙음은 의심의 근거가 됩니다. 누군가의 남성성은 정상성으로 읽히고, 누군가의 여성성은 나이와 함께 폐기된 것으로 간주됩니다. 우리가 그들의 성(性)을 지우고, 그들의 상처를 개연성 없는 망상으로 치부하는 한, 우리 주변의 수많은 효정들은 영원히 고립될 수밖에 없습니다.


늙은 여성의 몸은 사라진 몸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오래 외면해 온몸일 뿐입니다. 〈69세〉는 그 외면을 끝내 거두라고 요구하는 영화입니다.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늙은 여성도 여전히 삶의 한가운데에 있다고 말하는 영화입니다.


이제 심효정이 보낸 팩스에, 우리 사회가 어떤 시선과 연대로 답장을 써 내려가야 할지 깊이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그녀의 몸이 69세라는 이유만으로, 그 고통은 처음부터 없었던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나이로 고통의 유효기간을 정하기 시작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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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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