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 우선 이번 쇼팽콩쿠르에 입상하신 것 다시 한번 더 축하드립니다. 이성진씨 피아노 연주하는 것을 들으면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특히 쇼팽 발라드 1번은 더 그러한데요. 곡을 연주하면서 특별히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신가요?
나 : 특별한 사람이오? 저의 연주에 무언가가 있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어요. 항상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칩니다.
기자 : 그 사람은 누구인가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녀가 떠오른다. 항상 그녀를 생각하면서 피아노를 친다. 그녀를 생각하면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 그것만이 나를 살게 하고 나를 지탱하게 한다. 쇼팽의 발라드 1번! 그녀를 처음 만난 날도 나는 이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대학교 신입생 시절 우린 처음 만났다. 같은 대학교였고 그녀는 영어영문학과 나는 피아노과였다. 부푼 꿈을 안고 들어온 대학에 호기심 많고 설레던 시절이었다. 봉사동아리에서 신입생으로 처음 만났다. 각자 본인이 가진 재능으로 불우한 환경의 아이를 가르치는 단체였다. 거기서 난 피아노를 배우고 싶지만 돈이 없어서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은 가르쳤고 그녀는 영어를 가르쳤다. 일 년에 한 번 동아리 총동문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난 피아노를 연주하기로 되어있었다. 학교 대강당에서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습하고 있을 때었다.
“너의 연주에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아. 잘은 모르지만...”
피아노 치는 나에게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있기는 뭐가 있어?”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녀는 신입생 중 활달하고 싹싹하여 동아리 내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에 반해 나는 내성적이고 조용하여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뭔가 느낌이 있어. 너의 감정을 드러내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
어릴 적 배운 피아노가 좋아 이렇게 전공까지 하고 있지만 미래만 생각하면 답답해 온다. 가난한 형편에 힘들게 피아노를 고집하여 대학까지 왔지만 대학에 오니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전공을 살려서 무엇을 해야 될지 잘하는 동기들을 보면서 한창 의기소침해 있던 차였다.
“피아노 잘 치는 사람 널렸어. 나는 그렇게 잘 치는 편이 아니야.”
“영어를 가르칠 때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어. 자신감을 가지라. 너에게 필요한 것도 자신감 같아.” 그렇게 우리는 가까워졌다.
그녀는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나를 이끌었다. 서로가 그렇게 달랐기 때문일까? 우리는 어느새 연인이 되었다. 나는 대학교 일 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가야 했다. 그녀가 많이 걱정되었다. 인기 많은 그녀를 노리는 많은 남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잘 다녀와. 몸 건강하고 많이 보고 싶을 거야." 그녀는 울면서 나를 배웅했고 나도 많이 울었다. 그녀가 나를 기다려 줄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헤어지자고 해도 받아들이자며 애써 담담한 척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매일 나에게 편지를 써서 군대로 보냈고 끝까지 나를 기다렸다. 그때 다짐했다. 나의 인생에서 여자는 그녀가 유일하다고. 죽을 때까지 그녀만 바라보기로 다짐했다.
내가 군대를 나오자 그녀는 곧 어학연수를 떠났다. 말리고 싶었지만 명분이 없었다. 오랜 기간 떨어져 있어서 같이 있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미국으로 떠났고 이제 내가 기다렸다. 미국에 가 있는 그녀가 보고 싶고 걱정도 되었지만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미국에 있는 동안 나의 진로에 대해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피아노 없는 내 인생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콩쿠르에 나가 상을 타서 인지도를 높인 다음 연주회를 여는 유명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다. 국제 콩쿠르 대회를 목표로 열심히 연습했다. 지루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틈틈이 피아노 레슨을 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마침내 그녀가 미국에서 일 년간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왔다. 이제야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어학연수를 다녀온 그녀는 훨씬 세련되어 보였다. 우린 둘 다 졸업 후 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그녀는 외국 생활을 하고 와서 그런지 외국계 기업에 가고 싶어 했다. 나는 콩쿠르를 준비 중이라고 했고 그녀도 나를 응원했다. 일 년간 열심히 준비해서 그녀는 원하는 외국계 기업에 취업할 수 있었다. 나는 쇼팽콩쿠르에 참가하기 위해 멀리 헝가리까지 갔으나 떨어지고야 말았다. 정말 많이 준비했고 그녀에게 당당해질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큰 좌절을 맛보았다.
그녀는 괜찮다고 위로를 하였으나 나는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너무 실망했고 그녀 앞에 자신감 있게 나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어정쩡한 상태로 졸업을 했다. 피아노 레슨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내가 낙담을 하는 것을 보자 그녀는 결혼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난 너무 놀라웠다. 난 가진 것이 아무것이 없었다. 그녀의 결심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고마웠다.
“난 많이 부족해. 결혼할 만한 준비도 되지 않았어.”
“지금이 바로 결혼할 때인 것 같아. 너에게 내가 있어야 될 것 같아."
적극적인 그녀가 결혼을 추진했고 나는 이끄는 데로 갈 수밖에 없었다. 곧 큰 난관에 부딪혔다. 그녀의 부모가 극심하게 반대를 하신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잘 나가는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그녀와 피아노를 가르치면 근근이 살아가는 나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우리의 결혼식에 그녀의 부모님을 오시지 않으셨다. 그녀는 결혼식에 잠깐 눈물을 보였으나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리라 다짐했다.
“피아노 치는 데만 전념해. 내가 뒷바라지해 줄 테니깐”
“아냐 내가 가장인데... 그럴 순 없어.”
그녀는 회사생활을 열심히 했고 나는 피아노를 치면서 콩쿠르이나 교향악단 단원 시험을 보러 다녔다. 번번이 떨어지고 낙방을 하였다. 나는 점점 그녀 볼 면목이 없어졌다. 그렇게 좋아하던 피아노마저 너무 싫어졌다. 나에게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자책도 들었다.
“당신 할 수 있어. 나는 아직도 당신이 치던 쇼팽 발라드 1번을 잊을 수가 없어.”
그녀는 힘들어하는 나를 응원하고 격려했다. 그리하여 다시 힘을 내어 피아노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지루한 시간이 점점 몇 년이 흘러갔다. 어느 날이었다. 그녀가 심각할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당신한테 할 말이 있어. 나 회사에서 해외지사 제의를 받았어.”
그녀는 오래전부터 해외에서 근무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당신 가려고?”
“난 가고 싶어. 당신도 알잖아. 내가 해외 근무하고 싶어 하는 거.”
“알지. 그렇지만 우리 사정상 지금 곤란하잖아.”
“나중이면 뭐가 달라져? 기회가 다시 안 올 수도 있잖아.”
그녀는 화가 났는지 말이 없었다. 아직 정식은 아니지만 객원으로 교향악단에 연주도 하고 있었고 선뜻 그녀를 따라 아무것도 없는 외국을 따라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에게 좋은 기회인 것은 이해하지만 그녀가 포기해 주길 내심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이혼 서류만 남겨놓고 외국으로 떠났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 없는 내 삶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날부터 거의 폐인처럼 지냈다. 술에 찌든 나날들이었다. 광분해서 피아노를 쳤고 그게 아니면 밥도 먹지 않고 술만 마셨다. 이대로 내 삶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숱한 절망의 순간에 그녀가 있었고 나는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나를 떠나다니. 자신의 꿈이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이었던 것일까? 그녀는 영영 되돌아오지 않는 것인가? 나는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그녀를 그리워하며 미워하며 증오하며 쇼팽 발라드 1번을 하염없이 연주했다. 연주하면 할수록 그녀가 더욱 또렷이 떠올랐고 견딜 수 없는 감정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러다 쇼팽콩쿠르가 다가왔고 나는 떠난 그녀이지만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고 싶었기에 참가하기로 했다. 헝가리에서 열린 콩쿠르에서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고 마침내 대상을 거머쥐었다. 헝가리 호텔 방 안에서 받은 트로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렇게 간절히 원할 때는 이루어지지 않고 그녀가 떠난 후에서야 상을 받게 되다니.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상을 받은 후에 여기저기 언론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언론사 인터뷰까지 하게 되었다. 기자가 그녀의 질문을 한다. 현기증이 난다. 그녀가 떠오른다. 그녀는 나의 소식을 알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할까? 기뻐할까? 그녀가 여전히 보고 싶다. 나를 떠난 그녀가...
<기사>
제목 : 이성진 피아니스트! 연주 때마다 생각하는 사람 있어!
내용 : 쇼팽콩쿠르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 피아니스트 이성진! 그의 피아노에는 깊은 슬픔이 느껴지는데 연주할 때마다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본인에게 피아노를 치는 원동력을 제공한 사람으로 이성진씨 피아노 연주에 특별함이 있다고 일깨워 준 사람이라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이성진씨 역시 이 부분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혹자는 전 부인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지만 알려지지 않았다.
-중략-
여기는 미국 뉴욕이다. 내가 그렇게 오고 싶어 하던 곳! 아침에 일어나서 한국 인터넷 기사를 본다. 그의 이야기이다. 내가 매몰차게 버리고 떠나온 그! 그의 가치를 이제야 세상이 알아보는 것이다. 참 다행이다. 변명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난 지쳐있었다. 나아지지 않는 상황과 나의 꿈 사이에서... 그렇다고 그를 사랑한 순간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20대 청춘시절 전부는 그와 함께 한 시간들이었다. 그를 부정한다는 것은 곧 나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의 성공을 누구보다 바랐다. 그는 보기 좋게 성공했다. 그의 쇼팽발라드1번 연주곡 영상을 유튜브로 본다. 내가 전에 들어왔던 연주와 많이 다르다. 그의 아픔, 분노, 절망, 좌절이 느껴져 온다. 마음이 아프다. 그가 느꼈을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그는 나를 용서했을까? 아직도 증오의 감정이 남았을까? 그를 만나러 한국에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