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ebeliechtliumzug
이건 순무다. 가을이 되면 스위스 마트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깍두기를 만들면 꽤 괜찮은 맛이 난다.
그리고 다른 쓸모가 있는데, 바로 이걸로 등불을 만들어 밤에 마을과 숲을 지나 행진을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읽기도 참 힘든 레베리히틀리움축(Raebeliechtliumzug)이라고 한다. 번역 하자면 순무등 행진, 순무를 깎아 만든 등을 들고 하는 행진이다.
처음에 이런 행진은 1860년 경 리히터스빌(Richterswil)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본격적인 행사가 되기 전에는 중세시대에 교회에 저녁예배를 갈 적에 길을 밝히기 위해 쓰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듯이 리히터스빌의 행진은 화려하다. 우리 동네에서는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어서 하는 행사로, 작지만 귀엽고 그래서 어쩐지 로맨틱하다. 어쩐지 동화의 한 장면에 잠시 들어와 있는 느낌이랄까.
원래는 순무등을 만드는 것도 선생님 지도하에 아이들과 엄마 혹은 아빠가 참여해서 만들어야 하지만, 이번에 닉 담임 선생님이 수술할 일이 있어서 3주간 병가를 냈기 때문에 초등학교 학생들이 맡아서 만들어 주었다. 워낙 만들기를 중요시하는 풍토가 있어서 (그래서 시계도 잘 만들게 된건가, 하는 아재 개그같은 생각도 해 본 적 있다.) 그런지 아이들이 제각각 개성이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 주어서 유치원 아이들이 정말 기뻐했다.
닉은 천체나 우주선 등에 관심이 많은데 우연히 별을 새겨 넣어 주어서 마치 자기가 만든 것인양 자랑스러워 했다.
물론 한 시간 가량 등을 들고 행진을 하기 때문에 예쁘거나 말거나 순무등의 운명은 탄내를 풍기며 까맣게 윗부분이 쪼그라드는 것이지만, 등불이 더 밝게 빛나라고 시 차원에서 행진 구역은 가로등도 다 소등해 주기 때문에 까만 어둠 속에 까맣게 탄 순무등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아, 간혹 그걸 눈치챈 순무등 주인들은 세상 떠내려가게 울곤 한다.
해질 무렵에 시작된 행진은 그렇게 놀이터, 익숙한 학교가는 길, 학교 뒤의 숲길, 마을의 구 시가지 쪽으로 이어지다가 예전에 소금창고였던 곳의 뒷편 광장에서 끝이 난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최근 몇주동안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들을 부르며 이 작은 축제는 절정에 다른다.
유치원 선생님들이 직접 섭외한 작은 악단과 연설과 악기 연주를 동시에 해야 하는 야경꾼(Nachtwaechter)이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위해 연주를 시작했다. 마치 연극 배우같은 목소리에 짐짓 엄숙한 느낌마저 드는 야경꾼이 아이들에게 오늘 함께 순찰을 돌아줘서 고맙다며 격려와 감사가 담긴 연설을 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수고가 들어간 작은 축제는 끝이 났고, 프레이(FREY) 제과의 협찬으로 초콜렛이 들어간 기플리(Gipfeli, 크로와상을 일컫는 스위스 독일어)를 먹으며 아이들도 제 임무를 마쳤다. 꼬꼬마들과 밤행진을 마친 선생님들은 기진맥진, 그러나 얼굴에는 드디어 일을 다 마쳤다! 라는 개운함이 역력하다.
나라고 뭐가 달랐을까. 매년 다른집 아이들이 참여하는 모습만 봐 왔는데, 드디어 우리 닉 차례가 된 것이다. 끝난게 어쩐지 시원섭섭했다.
눈이 휘둥그레한 채로 여기저기 구경하는 노아가 귀엽지만, 노아 차례도 곧 올테다. 그 날은 천천히 오는 것 같으면서도 시간이 늘 그랬듯 무심히 올 것이다. 이 순간의 아이들의 모습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이유도 아마 그래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