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아련한 기억을 되살리며
프롤로그
청년 시절부터 만약 내가 소설책을 내게 된다고 가정하며 지은 책 제목이 '옛날에 금잔디 동산'이다. 내가 이 소설을 완성할는지 어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틈만 나면 작은 이야기를 연결해 뭔가를 쓰고 있다. 부디 완성되기를 바란다. 1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았던 흔적이 남겨져서 누군가가 읽어준다면 기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 글은 그 책의 프롤로그가 될 요량으로 적고 있다. 언제 완성될지는 신만이 아시지만 그래도 지금부터 조금씩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중학교 시절, 나는 수학 시간이 겁난다며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그러자 어머니는 나를 시내버스에 태운 뒤 가난한 판자촌과 신발 공장 사장의 저택을 차례로 보여주며 배움의 중요성을 일깨워줬다.
"얘야, 보아라. 판자촌 집 속의 저 사람들이 예전에 살았던 세상은 평화롭고 안전했다. 물론 지금의 아쉬울 것이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모른다. 저 판자촌 집의 사람들처럼 어른이 된 네가 땟거리를 걱정할 수 있단다. 도전에 맞서 싸울 무기가 없으면 그냥 쓰러지는 거다. 그래서 배워야 하는 거란다. 알겠니?"
고등학교 시절, 월말고사에서 수학 점수 빵점을 받은 적이 있다. 충격을 받은 것은 나였지만, 수학 교사인 담임선생님은 그로부터 졸업할 때까지 네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무엇이 내 인생을 구원할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머릿속의 모든 것을 포기한 다음, 단순 무식하게 공부한 결과 아주 어렵게 국립대학에 그것도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대학 시절, 군대 입대하기 전에 나는 지방 도시의 유명하지 않은 어린이 잡지의 임시직 기자였다. 그래서 기삿거리를 찾아 온종일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곤 했다. 그러다가 캠퍼스에서 어느 여학생을 만났다. 그녀를 만나고부터 ‘만약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이 죽고 남북통일이 된다면?’, ‘우리나라가 세계 5위의 부자나라가 된다면?’, ‘우리나라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독재자가 감옥에 간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한다면?' 등의 질문에 그녀가 어떻게 나올까 공상하며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러다가 월말이 되면 얼렁뚱땅 꾸며낸 기사로 지면을 채웠다. 그런데도 뜻밖에도 이 엉터리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인기가 무척 높았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진짜 기사보다 훨씬 그럴듯했고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낱말은 기껏해야 200여 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짧은 낱말 실력으로 내가 다니던 대학교 옆 하숙촌에서 포장마차 하다 가난 때문에 자살한 복학생 이야기나 군대 가는 친구의 애인을 겁탈하려 한 애송이 철학도 이야기를 써내곤 했다. 지금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엉터리 기사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문학에서 말하는 진실 비슷한 것이 나오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변하지 않은 내가 늦은 나이가 되어서 쓰는 내 글이 문학 근처에 갈 수 있는 품격이 있고 거창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어린 시절 꿈꾸었던 소설집이 될 수 있을까 의문표를 달아보기도 한다. 당시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 기자가 될 것을 꿈꾸었다. 그러나 결국은 기자가 못되고 기업체에서도 주로 기획서나 보고서를 기사처럼 쓰는 일만 맡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과거의 습성대로 그저 기자 비슷한 모습으로 기사 비슷한 글을 흉내 내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놀라운 일은 지어낸 이야기가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되는 걸 내가 여러 번 목격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다. 우리가 가진 상상력으로 살아온 세월이 준 경험만큼의 추리를 펼치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간이나 계절, 유행이나 사회 변화, 사람의 심리 상태를 생각하고, 상황이 이러이러하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틀림없이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겠다고 짐작하고 결론을 내리기만 하면 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나이 오십이 되고 나니까 친구, 선배 등 비슷한 또래의 지인들이 죽는 모습을 목격하곤 한다. 주로 지병과 사고 때문이다. 인간이 모두 오래 살 수는 없으니까 그럴 수도 있는 문제다. 그러나 헤어짐은 잔인하게 느껴질 만큼 슬픈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오래 살고 싶지는 않다. 어릴 적부터 계속 친했던 친구가 있었다. 무슨 이유였는지 사십 대 초반에 결별했는데 이후 십 년 만에 만났다가 일 년 만에 다시 헤어지고 말았다. 그때 그는 네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너보다 오래 살고야 말겠다.”
그의 인생 목표가 고작 나보다 더 오래 살겠다는 것이라니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리가 나이를 더 먹으면 노인 문제로 세상이 어려워질 것이 예상되니 65살 정도까지만 살면 어떻겠나 하고 스스로 물어보곤 했다. 그렇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뭔가 지구라는 별에서 살았던 삶의 흔적을 남겨야 할 것 같다. 그래서 틈나는 대로 별 볼 일 없는 글솜씨로 내가 살아왔던 이야기들과 모습들을 <성장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기록해 보리라고 작정했다. 흔히들 소설보다 더 기가 막힌 게 세상살이라고들 말한다. 세월이 아주 많이 흐른 후 많은 사람이 내 인생을 반면교사의 모습으로 떠올려 보는 것은 재미있는 모습이 될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산에 긴 터널을 파고 강줄기를 돌려놓으면서 지리적 환경을 바꾸려고 애를 쓴다. 그렇게 해서 역사적인 새 길을 냈다고 자랑하지만 기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느 날 모든 것이 깡그리 사라져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일본에 닥친 쓰나미에서 보지 않았는가? 우리나라에서도 지진이 오는 것을 보고 세상의 어느 곳이든 안전지대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아의 홍수나 그것보다 더 강한 자연의 이변이 일어나서 다리들이 무너지고, 둑들이 박살 나고, 도랑들이 모두 메워지는 일은 어쩌면 자연의 섭리다. 홍수는 사람들이 사는 집과 건물들을 한꺼번에 쓸어가고, 수마가 훑고 간 폐허에는 잡초와 흙더미만 무성하게 될 것이다.
스필버그의 영화 ‘A.I'에 나오는 물에 잠긴 뉴욕을 기억해보라. 그래서 모든 것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갈 일이 반드시 생길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돌팔매질로 짐승들과 싸워야 하고 역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될지 모르겠다. 우리가 지금까지 겪어온 것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똑같은 역사 말이다. 그러다가 3천 년쯤이 지난 후, 사람들은 40m가량 되는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수도꼭지와 소나타 승용차 운전대 손잡이 하나를 찾아내고
“봐라, 진귀한 유물을 발굴했다!”
며 떠들어 댈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먼 옛날 선조들이 저질렀던 어리석은 행동을 똑같이 되풀이할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진보의 형벌을 받은 불쌍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 진보, 또는 과학 발전이라는 것은 필시 최첨단 과학 공식들을 내세워 늙고 피곤한 하느님을 몰아낼 게 분명하다.
또 부지런한 인간들은 고고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어 틈만 나면 땅을 파헤치며 책을 펴낼 것이다. 여름 방학, 어느 피곤한 고고학과 대학생이 땅을 파다가 단추만 한 USB 하나를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먼 옛날인 2018년에 키보드를 두드리던 별 볼 일 없는 중년 사내가 쓴 세상 이야기를 발견하여 신문 사회면을 장식할지 누가 알겠는가?
1. 물이 철철 흐르는 내 배를 사세요!
배 사이소! 배 사이소! 물이 철철 흐르는 내 배 사이소!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배’라는 단어에는 대략 8가지 의미가 있는데, 주로 사용되는 것은 아래의 3가지 용도일 것이다.
1. <의학> 사람이나 동물의 몸에서 위장, 창자, 콩팥 따위의 내장이 들어 있는 곳.
2. <명사> 사람이나 짐 따위를 싣고 물 위로 떠다니도록 나무나 쇠로 만든 물건. 모양과 쓰임에 따라 보트, 나룻배, 기선(汽船), 군함(軍艦), 화물선, 여객선, 유조선 따위로 나눈다.
3. <식물> 배나무의 열매
다변이었으나 자식에게 해 줄 이야기 소재거리가 늘 부족했던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19세의 아들에게 어느 날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1950년 8월, 고향인 경남 김해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스물한 살의 청년인 내게 입대 영장이 날아왔다. 육이오가 터진 직후 급하게 날라 온 징집이었던 거라. 인민군이 남침한 후 속수무책으로 서울이 함락되고 한강철교가 폭파되고, 이후 대전까지 밀리다가 아래의 중부 지방도 무너지던 터라 전황은 절대적으로 국군이 불리했다. 총알받이로 이제 이렇게 죽는구나 라는 참담한 마음으로 전장으로 향해야 했다. 국군들의 대부분은 "인민군이 나타나면 하나 쏴 죽이고 고깃값이나 하고 죽어야지. 내 살 값은 해야지"라며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전장에 나가는 사람들이 많았었지. 부산에 급조한 임시 육군훈련소에서 열흘 동안 간단한 군사훈련을 받고 부산역에서 전쟁터로 가는 열차를 탔다. 너도 알다시피 경부선 선로는 초량동에 있는 부산역에서 시작하지 않니? 열차에 빼곡히 탄 병정들은 다들 초조하기 짝이 없는 심경이었다. 부산역에서 20분 정도 열차가 달렸을까? 군인들을 태운 전선행 열차는 부산과 경남의 경계인 구포역에서 잠깐 멈추었다.
전쟁 중이어서 경제는 마비상태였지. 전쟁터로 싸우러 가는 사람들의 삶도 문제였지만, 먹고 살기 막막한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곤궁하기 짝이 없었다. 옆에 앉은 동료들은 서울 사람, 광주 사람, 대구 사람 ……. 전국 각지에서 징집된 팔도 사나이들이었다. 구포역에서 멈춰 선 열차 안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배(梨) 장수 아낙들이 플랫폼에서 열차 창문을 향해 애틋한 고함을 지르기 시작하는 거라.
“배 사이소! 배 사이소! 물이 철철 흐르는 내 배 사이소!”
죽으러 간다는 사실에 모두들 우울해 있었는데 열차 내에서 갑자기 폭소가 터지기 시작하더라.
"야! 저 육덕 좋은 아주머니들, 자기 배에 물이 철철 흐른데? 핫한 ……."
막내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인데 야한 생각에 모두들 즐거워하고 ……. 우습지 않니, 그쟈?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하신 말씀은 인간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한, 전쟁 중에서도 유머는 존재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구포의 명물 배(梨) 장수 아주머니들은 즙이 많은 과일, 배(梨)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죽음의 전장으로 향하는 젊은 군인들은 여인의 배(腹部)를 연상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별것 아닌 이야기가 이렇게 기억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요즘으로 치면 썰렁한 유머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성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일까? 유머는 남녀노소 지식고하를 막론하고 두루 통하는 의미 전달의 가장 효과적인 통신수단이다. 왠가 하면 모든 지성의 궁극적 목적이 유머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도 한마디로 다 웃자고 하는 짓 아닌가? 섹스 또한 모든 사람의 공통된 관심사이자 유머와 유머를 포함하고 있는 쾌락의 적극적 방법이다. 그 밀도가 어느 정도이든 섹스는 모든 개체의 불완전성에 대한 유일한 해결 방안이라는 모 철학자의 말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말이다. 쉽게 말해, 우리 옛말에 퇴주잔도 형수가 따르면 낫다고 하질 않는가.
이문열의 전쟁소설 <영웅시대>를 읽으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서울의 남대문 시장에서 주인공 이동영과 박영규가 만나게 된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이지만 폭격으로 사방팔방이 잿더미 엉망이 된 상태다. 전쟁터의 한가운데, 폐허 속의 남대문 시장에서도 그들에게는 개고기 껍질에 탁주를 팔고 있는 시장 좌판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부분들을 살아가고자 몸부림치는 인간 생명력의 강인함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비단 프로이트의 성(性) 욕구 이론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에서 인간의 나신만 한 경이의 아름다움은 없다고 단언하는 미술가들은 수없이 많다. 더욱이 그들이 사랑하는 이성의 나신이었을 때 그들은 신기(神技)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감상자들의 정신 상태를 일러 넋을 잃었다고 한다. 전장으로 향하는 군인들에게 물이 철철 흐르는 배를 사라는 여인들의 외침은 과연 의미대로 전달이 될 수가 있었을까? 그들은 과연 이성적인 가치와 판단을 소유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우리는 평소에 이성이라 부르는 벗어던져야 할 외투를 너무 여며 입고 있기 때문에 그 주변에 있는 본질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이성이라는 가치는 나약한 인간이 자신의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마련한 교만은 아닐까? 신이 만든 인간의 은밀한 욕망은 우리들 인간이 규정한 가치와 인간으로서의 규율이 극한에 처해졌을 때만이 비로소 우리 앞에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2. 추억 속의 미숙이
코흘리개 시절, 앞집에는 미숙이라는 동갑내기 소녀가 살고 있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의 일로 기억한다.
동네에는 제법 큰 예배당이 있었다. 조영남의 노래처럼 동네에서 제일 큰 건물. 그 예배당 실내에는 어린이 놀이터 비슷한 것이 있었는데 니스를 바른, 빛나는 마루 바닥이 유달리 기억에 남는다. 옆집 친구 병호랑, 미숙이, 그리고 나해서 세 명이 그곳에 자주 놀러 갔다. 어느 날 세 명이 함께 노는데 유독 미숙이랑 내가 친하게 노니 갑자기 병호가 샘이 났는지 먼저 나가버렸다. 이후 미숙이랑 둘이서 놀다가 집으로 가려고 신발장에서 신발을 찾으니 내 고무신이 없는 것이었다. 신발을 잃어버렸다! 갑자기 엄마의 빨래 방망이가 생각났다. 어머니는 아들만 세 명을 키우면서 빨래 방망이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셨다. 나는 갑자기 막막한 마음이 되어 울음을 터트렸다. 고무신 한 켤레 때문에 울음을 터트리다니 좀 과장이 심한 게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당시 고무신 한 켤레는 쌀 한 되 가격으로 일 년을 신어야 하는 고급 소비재였다. 미숙이는 울고 있는 나를 달래면서 침착한 말투로 우선 자신의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 내 신발을 찾아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미숙이의 조언대로 미숙이의 신발을 신고 교회 문을 나와 보니 내 고무신이 교회 화단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짐작컨대 병호의 질투 어린 소행이었고 미숙이는 안절부절못하는 내게 어른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아침 등굣길에 미숙이와 친구들을 만나서 여럿이 함께 학교에 가게 되었다. 겨울날이었는데 강한 바람이 불어 미숙이가 쓰고 있던 빵모자가 개울가에 떨어져 버렸다. 2M 정도의 높이였을까. 아무도 미숙이의 모자를 건지려 하지 않아서 내가 두꺼운 얼음이 언 개울로 점핑하듯 훌쩍 뛰어내렸는데 미숙이는 ‘으악!’하며 고함을 질렀다. 모자를 건져 미숙이에게 전해주는데 미숙이는 놀란 탓인지 울고 있었다. 싸구려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핫하, 그렇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인 걸 어떻게 하겠는가?
공부를 그다지 못하지는 않았는지 중학교 졸업 후 나는 인문계 고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미숙이는 중위권의 여상으로 진학했다. 바로 앞집에 살던 미숙이는 그리 멀지 않은 뒷동 네로 이사 갔다. 그래도 길에서 만나면 반가운 친구였다. 고교 평균화 이전에는 별 볼일 없는 사립고교였던 우리 학교는 평균화를 기화로 대도약을 꿈꾸고 있었다. 그 결과로 평균화 이전 부산. 경남지역의 명문고인 경남고, 부산고를 필적하는 대학 합격률을 기록했다. 그런 학교 분위기 때문에 고교 1학년 때부터 저녁 열 시까지 야간 자습을 하는 바람에 밤늦게 하교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우리 학교는 도시의 중심에서 3~40분 거리 떨어진 외곽의 언덕에 위치해 있었는데 버스를 타는 서면에 가기 위해서는 교문에서 정류장까지 30분가량을 걸어야 했다. 그렇게 걷다 보면 부산의 명동이라는 서면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20분가량 가다 보면 집이 있는 동네로 도착한다. 문제는 부산의 명동이라는 서면 그 동네 때문에 미숙이와 헤어지게 되었다는 거다. 서면이라는 동네는 지금도 그렇지만 밤이 되면 거대한 공룡 같은 유흥가로 변한다. 철들지 않은 중고생들도 밤이 되면 그곳에 나와서 괜히 하릴없이 서성거렸고, 그들을 위한 ‘빵집’ 같은 전용 공간이 준비되어 있었다. 곽경택의 영화 '친구'에 나오는 그런 분위기를 상상하면 된다. 지금은 맥도널드나 콜라텍 등이 그런 역할을 하겠지만.
여남은 명의 친구들과 집에 갈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옆에서 내 어깨를 툭 쳤다.
“혁이!”
옆을 보니 미숙이였다. 그런데 문제는 밤 열 시 반, 교복 차림으로 하교하는 미숙이가 아니고 지나치게 몸에 딱 들어붙는 백바지에 빨간 블라우스, 얼굴에는 화장까지 한 미숙이라는 점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날라리’ 모습으로 미숙이가 서면에서 나를 아는 척했으므로 나는 친구들 앞에서 이유 없이 창피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모르는 척 외면해 버렸다. 미숙이는 그런 내 모습에 실망을 했는지 즉시 자리를 떠나버렸다. 미숙이는 학교에 다니면서 저녁이면 불량소녀가 되어 싸돌아 다녔던 게 아닌가 하는 막연한 추측이었을 뿐이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미숙이를 만난 적이 없다. 내가 대학 1학년 땐가 ……. 직장에 다니던 큰형이 서면의 모 주점에서 미숙이를 보았다고 했다. 어느 남자와 미숙이가 술 마시는 걸 목격했는데 어찌나 교태가 심한지 보기 민망했다는 표현을 했다. 미숙이는 왜 그랬을까?
결국 나는 미숙이에 대한 우정을 고스란히 자신의 내부에 남겨둔 채 철딱서니 없이 세워놓은 규율 속에서만 그녀와 헤어진 것이었다. 그 철없음은 사람이 만났다가 헤어진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 되는가를 알지 못한 시기였다.
3년 전, 등산하다 무리하여 발목을 삐끗하는 바람에 한의원에 간 적이 있다. 간호사의 안내를 받고 진료를 기다리고 있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할머니의 부축을 받고 대기실에 들어왔다. 두 분을 보는 순간 미숙이 아버지와 어머니인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어, 두 분은 내 부모님보다 10년 이상 연배이신데 아직 살아계시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니 두 분 모두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한 분은 치매 끼가 있고 또 한 분은 귀가 어두우신 거다. 침을 맞고 한의원을 나오면서 피천득의 수필 ‘인연’이 생각났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미숙이를 그리워하지도 않았고, 만나고 싶어 하지도 않았으며, 잊으려 하지도 않았다. 다만 철없던 시절 내 행동이 여상 다니던 미숙이에게 자괴감을 준 것은 아닌지 늘 미안할 뿐이다. 혹시 미숙이를 다시 만난다면 고 1 때 길거리에서 몰라본 척했던 일을 사과하고 싶다.
3. 지금도 사랑 속에서
지난주는 차를 타고 어릴 적 살던 동네를 지나다 큰길 근처에서 코레일의 ‘가야역’이란 안내판을 보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부속 건물이 여러 채 있었는데 유치원과 직원 사택, 휴게시설로 여겨졌다. 내가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어릴 때 보았던 철도청의 건물들이 그 위치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물자가 귀하고 가난했던 그 시절,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 때마다 목욕하는 일이 큰 숙제였는데 아버님은 자신이 근무하는 철도청 가야역 그곳의 직원 목욕탕에서 아들 세 명을 씻기셨다. 우리 형제는 역사(驛舍) 옆의 철도청 직원 목욕탕에 목욕하러 갈 때마다 그곳 경비원의 제지를 받곤 했고, 목욕탕 안에서는 여러 철도원의 따가운 시선을 받곤 했다. 그것은 우리 형제로서는 마치 거지 취급받는 느낌이어서 ‘죽어도 그곳에 목욕하러 가지 않겠다’고 앙버티곤 했던 기억이 낡은 사진처럼 남아있다.
세월이 흐르니 일찍 세상을 떠나신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이 짙어질수록 당시 아버님에 소소한 기억마저 따스하게 다가와 ‘철도’에 관한 모든 것이 필요 이상으로 다정하게 느껴진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화 <철도원> 일 것이다.
영화 <철도원>은 1999년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영화로,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이 연출하고 디카쿠라겐과 히로스에 료코가 연기한 것으로 기억한다. 일본 작가 아사다 지로의 단편 소설집 <철도원>의 표제작 단편소설로서,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이 영화 <철도원>을 본 것은 내 나이가 사십에 가까울 때였는데, 철도원으로 근무하다 돌아가신, 어렸을 때 아버님의 모습이 생각나서 가슴이 먹먹해지고 또 따스한 기억이 들기도 했다.
영화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대충 이러하다.
평생 하얀 눈으로 뒤덮인 시골 마을 종착역, 호로마이역을 지켜온 철도원 오토마츠가 주인공이다. 17년 전 겨울 어느 날, 아기를 가졌다며 그에게 달려온 천진난만한 아내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기의 이름은 오랜 기다림 끝에 태어났기에 부부는 '눈의 아이'라는 뜻인 유키코(雪子)라는 이름을 붙여졌다. 하지만 행복은 잠깐이다. 유키코는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갑작스러운 열병에 걸려서 세상을 떠나고, 아내 시즈에마저 깊은 병을 얻어 유키코가 있는 하늘나라로 가버린다.
세월은 흘러, 오토가 정년퇴직하는 날 아침이다. 철길에서 세월을 되돌아보고 있는데 오토마츠는 인형을 안고 있는 낯선 여학생 한 명을 만나게 된다. 소녀는 처음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는 듯 웃으며 친숙하게 인사를 건넨다. 그 소녀는 바로 죽은 딸 유키코다. 그리움이 지나치면 현실로 되는 것일까? 딸의 혼령이 사람이 되어 아버지 앞에 나타난다. 그간 힘들어도 꿋꿋하게 일해 온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딸은 다 자란 여학생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새하얀 눈들이 배경이었던 영화인데 눈마저도 따뜻하게 보였던 영화가 종종 생각나곤 한다. 지금도 나는 겨울이면 영화 <철도원>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와 동시에 탤런트 최불암 선생을 떠올리곤 한다. 영화 <철도원>과 아무런 관계없는 최불암 선생을 떠올리는 것은 최불암 선생과 아버님에 관한 아주 소소한 인연 때문이다.
최불암. 1940년생. 본명 최영한. 탤런트 또는 영화배우, 전직 국회의원…….
내가 아버님에게 직접 들은, 아버님보다 11살 연하인, 최불암 선생의 인간적인 모습은 언제나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곤 한다.
1929년생인 아버님은 1981년에 간암으로 별세하셨는데 돌아가시기 열흘 전까지 철도청의 노무직 철도원으로 근무하셨다. 선로 보수부터 직원 목욕탕 보일러 담당, 열차 부품 정리, 열차 수리 등 주로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셨는데 마지막 5년은 운행 중인 열차와 동행하여 점검 일을 하셨다. 그러니까 경부선 열차를 탄 채로 근무하는, 만약에 열차가 기계적인 고장이 나면 응급조치를 하는, 그런 일을 하셨다. 하루를 근무하고 다음 날 하루를 집에서 쉬는 식의 근무 형태로 기억한다. 낮에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면 아버지가 집에 계시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혹시 너희 아버지, 실업자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기가 다반사였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열차 맨 앞쪽에 운전하는 기관사실이 있고 객실과 연결되는 부분에 겨우 한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의자를 가진 작은 공간이 있는데 그곳이 아버님이 근무하시는 장소였다.
아버님은 병적으로 근검한 분이셨지만 술과 담배를 즐기셨다. 술은 소주와 안주로는 김치만을 드셨으며 담배는 최저가인 ‘금잔디’를 피우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1978년도의 일이다. 군을 제대하고 대학 3학년에 복학한 장형은 당시 최고급 담배인 ‘거북선’을 피우고 있었다. 아버님은 그러한 사실을 알고 계시면서도 그럴 수도 있는 일로 덮어두셨다. 역지사지로 내가 아버님 입장이었다면 그런 아들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하고 나의 시각에서 지난 시절을 반추해보곤 한다. 그해 어느 날, 서울 가는 무궁화 열차를 왕복으로 타고 오신 아버님은 평소처럼 매우 지친 몸으로 퇴근하셨다.
“아버지 인자 퇴근하셨습니까?”
퇴근하신 아버님께 간단한 인사를 드렸는데 아버님의 얼굴은 화색이 넘쳐흘렀다. 신문지에 뭔가를 둘둘 말아서 소중히 들고 계시는데 펼쳐서 보니 담배 세 갑이었다.
수정 담배.
1978년 당시 최고급 담배는 500원 하는 거북선과 SUN이었고 바로 아래 등급의 담배로 400원 하는 ‘수정’이란 담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00 원하는 ‘금잔디’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가 400원 하는 고가의 담배를 세 갑이나 들고 오시다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어머니가 궁금하신지 물어보셨다.
“이 담배, 어데서 났는교?”
사연은 이랬다.
부산역, 서울행 무궁화 열차. 아버님은 여느 날처럼 기관사실과 연결된 철도원(검수원) 실에 앉아계시는데(그곳은 일반인 출입금지구역이다), 40대에 막 접어든 것으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라는 것이었다. 여기는 출입금지구역이란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 깜짝 놀라셨다. 당시 수사반장에 출연하는 유명 배우 최불암 씨였기 때문이다.
“아니, 최 선생 아니십니까?”
“아, 예……. 맞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어쩌신 일로?”
“부탁드릴 게 있어서 그럽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 무슨 부탁이?”
“다름이 아니라 여기 아저씨 옆자리에 좀 앉아서 서울까지 갔으면 해서요…….”
“편안한 객실이 있는데 왜 여기 이렇게 불편한 곳에…….”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고 저를 보려고 제가 앉은자리에 자꾸 몰려와서요.……. 옆에 앉아 계신 분들에게 피해를 주고, 저를 구경하는 시선들이 제게 참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파~~”
아버님은 흔쾌히 그러시라고 허락하여 검수원실 작은 의자에서 둘이서 긴 시간 동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울역에 열차가 도착했을 때 최불암 선생은 아버님께 신문지에 뭔가를 싸서 전달하며 '고생하시는데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내렸는데 나중에 열어보니 ‘수정’ 담배 세 갑이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아버님은 세상을 떠나셨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평생을 금잔디와 백조 같은 저가 담배를 피우셨던 아버님은 처음으로 고가 담배를 피우는 호사를 누리신 것이다. 그리움이 지나쳐서 딸을 만난 영화 속의 그 철도원처럼, 꿈에서 아버님을 만나기도 하고 최불암 선생을 만나 뵙는 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내가 최불암 선생을 직접 만날 순 없겠지만 살다 보면 앞으로 그럴 기회도 혹시 생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이렇게 말씀드려야겠다.
“1978년 어느 날, 최 선생님으로부터 수정 담배를 받았던 철도원의 아들입니다. 선생님 때문에 아버님이 그나마 좋은 담배를 한번 피워보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이다.
4. 그 누님들 지금은 뭘 할까?
조그마한 와이셔츠 회사의 공장장으로 월급 생활을 하던 30대의 아버지는 회사가 망하자 피난민들이 몰려 살던 당감동(현재의 당감시장 아랫 골목) 셋방으로 이사하여 세탁소를 차리셨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공장에서 익힌 다림질과 빨래 등의 기술로 살 길을 모색하신 것이다. 게다가 당감동에는 아버지의 누님인 고모가 동네에서도 아주 큰 방앗간을 운영 중이었는데 매형인 고모부가 뭔가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계산도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큰 돈벌이가 되지 못해 겨우 현상만 유지한 채, 윗동네인 동양고무라는 신발 공장 옆의 골짜기 땅을 60평 정도 구입해서 방이 세 개인 쓰레트 집을 한 채 지으셨다. 그곳으로 이사를 갈 즈음에는 철도 공작창의 일용직 공무원으로 취직을 하셨다. 그곳에서 받는 돈으로 5명 가족의 생계는 어림없었는지 방 한 칸을 우리 가족이 사용하고 두 칸은 달세를 놓으셨다. 칸칸의 방을 세놓으니 매월 들어오는 월세가 생계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몇 년 후 아버지는 집 뒤의 빈 땅에 방이 세 칸인 쓰레트 집을 한 채 더 지으셨다.
그래서 개울가에 위치한 우리 집은 여섯 세대가 붐비는 다세대 주택이 되어버렸다. 세든 사람들의 면면은 말할 것도 없이 동양고무라는 신발 공장에 근무하는 젊은이들이었다. 이런 연유로 동양고무의 바뀐 이름인 '화승 르까프'라는 브랜드를 지금도 선호하는지 모르겠다.
세든 이들 중에는 결혼을 한 세대가 둘, 나머지는 모두 시골에서 돈 벌려 부산으로 몰려온 시골처녀들이었고 그들의 학력은 대부분 중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정도였을까? 방 한 칸을 사용하는 주인집인 우리 가족은 아들들이 커감에 따라 방을 두 개 쓰게 되었고 우리 가족을 포함한 다섯 세대가 한 울타리에 동거하는 시기가 있었다.
우리 가족이 사는 두 칸의 방 뒤에 골방이 있었는데 20대 중반의 동양고무 여사무원이 전문대 나온 백수건달과 동거를 하고 있었다. 둘은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남자가 병역 기피자였던 관계로 고졸인 여자는 무직인 애인을 희망 없이 부양하고 있었다. 앞집 친구 병호와 내가 동네 공터에서 공을 차고 있으면 그 남자는 옆에 앉아서 거의 매일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지으신 뒷집에는 밀양 청도면에서 온 신혼부부가 살고 있었다. 광웅이 아저씨 부부. 큰 아들이 부산의 신발 공장에서 작업 반장을 하는 등, 자리를 잡자 중학교를 졸업한 17세의 여동생 처녀를 그 공장에 취업시켜 신혼 1년 차 오빠 부부와 한 방에서 기묘한(?) 동거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 옆방에는 함양에서 올라온 처녀 세 명이 자취를 하고 있었다. 딸이 없는 어머니는 이들이 귀여웠는지 틈만 나면 김치를 담아주는 등 애정을 표시하곤 했다. 나이가 19세 정도인 그 누님들의 이름이 정인숙, 권금련, 김판순인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정인숙 누나를 유달리 좋아했던 것 같다. 그 옆방에는 동양고무에서 수송 트럭을 운전하는 30대 초반의 젊은 부부가 살았다.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수세식 화장실이 있을 리 없는 시대였음을 차치하고, 15명이 변소 하나를 사용하니 매일 아침마다 화장실 앞에 줄이 서있는 현상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래서 나는 마당에 심긴 동백나무 아래서 늘 소변을 봐야만 했다. 잘 자라거라, 나무야. 그때마다 어떤 시선을 느껴야 했는데 함양에서 온 그 누님들은 내가 소변보는 모습을 항상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식 둔 부모의 입장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함양에서 온 세 처녀 중 유독 권금련 누님에게 엄하게 대했다. 통금이 있던 당시 유독 그 누님만 매주 두세 번씩 귀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어머니는 작심하고 세 처녀 방에 가서 그들과 뭔가 열심히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화를 나누는 걸 옆에서 들으니, 어머니는 그녀가 같은 공장에서 근무하는 총각과 여관에서 상습적으로 자고 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작심하고 권금련 누님을 불렀다.
“니 그 총각하고 결혼할 사이가?(너 그 총각과 결혼할 사이냐?)”
“아니예(아닙니다)…….”
“그라믄 결혼 안 한 처자가 몸을 함부로 굴리도 되나?(그러면 처녀가 몸을 막 굴려도 되니?) ”
“사랑하는 사인데 어떻습니꺼?”
“글마는 니하고 결혼 안 할 거라는데 니는 매일 몸 주고, 그기 무슨 사랑하는 사이고?(걔는 너랑 결혼 안 할 거라는데 너는 매일 몸을 주고, 그게 무슨 사랑하는 사이냐?)”
“그건 그거고, 다른 문젭니더.”
“야가 뭐라카노(얘가 무슨 말 하는거냐)? 후제(훗날) 니하고 결혼할 남자가 이거를 알믄 니보고(너에게) 뭐라카겠노?”
“ …….”
“ 너그(너네) 어무이(어머니)가 이걸 알믄 내보고(나에게) 뭐라 칼 지 아나?”
“ …….”
어머니는 손을 들었다는 듯 말했다.
“알았다. 간섭 안 하겠다. 칼클케(깨끗하게) 처신해라. 허지만 글마는 나쁜 놈이라는 카는 거는 알고 있어야 된데이(하지만 걔는 나쁜 놈이라는 건 알고 있어야 한다).”
“ ……. ”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 장면은 연애 지상주의자와 유교문화 보유자 사이의 문화충돌(Cultural shock) 같은 게 아닐까 생각된다. 1970년대의 이 그림을 현재의 페미니스트들이 보면 뭐라고 평가할지 궁금하다.
니체는 말했다.
'사랑할 때, 여자는 자신을 내던지고, 남자는 그것을 가지고 자기를 풍부하게 만든다.'
내가 그 누님들의 가족이라는 가정 하에서 생각한다면, 니체가 한 위의 말은 그야말로 개소리에 불과하다.
나이가 들고 그 시절 부모님 나이를 더 지나고 보니 뭔가 내 머리 속에서 재평가가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그 처녀들처럼 어린 나이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그들 입장에서는 자신의 견해가 모두 맞는 것 같지만 사실은 본인들의 필요에 의한 이해관계에 기반을 둔 계산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윤리학과 논리학, 철학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세상살이에는 항상 기준이 필요한 법이다. 병역기피자인 남자를 먹여 살리며 치열하게 청춘을 바쳤던 뒷방 누님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사랑 때문이라고?
심리학적인 용어로 다시 설명한다면 ‘자기합리화(Rationalization) ’ 같은 것이리라고 생각된다. 기계와 함께 돌아가는 공장생활 속에서 자기 정체성과 방향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사랑이라는 운명'에 자신을 맡겨버렸던 순수한 영혼이라는 표현이 적확하지 않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대책 없는 연애 지상주의자들이 있었다.
5. 찍지 못한 졸업 사진
작년인가,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라는 미국 작가 ‘앤드류 포터의 소설집’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을 읽고 난 후 며칠 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는 과거의 사건 하나가 계속 생각났다. 어린 시절의 작은 사건이 생각난 것이다. 행여 나의 철없는 행동에 상처받았을지도 모를, 저 세상으로 떠난 친구에게 이 글을 통해 미안한 마음 전한다.
우리는 누구에게든 하나쯤 있기 마련인 ‘지워지지 않는 어떤 순간’을 회상하며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그 기억에 아파하며 살아간다. 앤드류 포터가 쓴 책을 읽으면서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있을 법한 ‘숨기고 싶은 기억’에 대한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우리 학급에는 유달리 성격이 순하고 해맑으며 공부 또한 잘했던 ‘김상우’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의 집은 학교 옆 재래시장에서 식품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이를테면 배추, 무, 시금치 등의 채소류와 된장, 고추장, 젓갈 등을 판매하는 평범한 규모의 가게였던 걸로 기억한다. 상우는 학급의 친구 그 어느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친절하고 고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상우 어머니는 가난한 시절인 1973년 그해 어린이날, 시장에서 장사하는 넉넉지 않은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반 아이들 먹으라고 단팥빵을 한 상자씩이나 사 오기도 하셨다.
그런데 6월 어느 날부터 상우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아침 조례시간 때 담임선생님은 상우가 백혈병에 걸려서 당분간 학교에 나오기 어렵다는 말씀을 하면서 어쩌면 한 해 정도는 휴학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도 어처구니없이 우리는 아무도 상우에게 병문안을 가지 않았다. 백혈병이란 병이 무언지도 몰랐거니와 아프면 감기처럼 좀 있다가 곧 낫겠지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우네 집은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었으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상우를 만날 수 있다는 여유 같은 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등하교할 때마다 상우네 가게를 바라보았는데 간혹 어떤 날은 상우가 하릴없이 가게에 앉아 있어서 그를 향하여 손으로 인사를 하며 지나갔던 게 고작이었다.
더워서 방학 때는 학교에 갈 일이 없었으니 우연히 상우를 만날 일 조차 없었다. 책 읽기를 좋아했지만 당시 몹시 가난했던 가정의 막내아들이었던 나는 읽을 것이 없어서 장롱 속의 족보까지 꺼내어 달달 외울 정도였다. 그러던 차에 기독교 계열의 사립중학교에 다니던 형의 교과서 중에서 ‘성경 이야기’라는 책을 발견하고는 이야기체로 편집된 구약 성경 전체 내용을 줄줄 설명할 만큼 자주 읽게 되었다. 8월의 어느 토요일 날이었다. 여름방학 중에 열린 성당의 주일학교에서 매일 실시하는 성경시험에서 나는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쓸어 부모님을 기쁘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집에서 4km 정도 떨어진 성당 주일학교로 가는 길이었는데 역시 상우네 가게 앞을 거쳐야 했다. 그날도 상우는 가게에서 어머니 옆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는데 몰라보게 살이 빠지고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상우는 나를 발견하고는 매우 반가운 표정으로 ‘어디에 가느냐’고 물었고, 나는 자랑스럽게 ‘성당에 가는데 주일학교에서 교리 시험 쳐서 1등을 했다’며 떠들었다. 상우는 그런 내가 부러웠는지 한참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여름방학이 끝나 개학이 되었으나 상우는 계속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10월의 어느 날 아침, 선생님은 상우가 며칠 전에 죽었고 화장(火葬)했다는 이야기를 조회시간에 하셨다. 우리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어린아이들이었지만 친구의 장례식에는 가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이미 화장까지 마쳤다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밖에 없는 듯했다. 그것은 등하교 때 상우의 집 앞을 지나지 않는 일이었다. 행여 상우 어머니가 우리들을 보시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하는 생각에 모두가 이심전심으로 그 길을 지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우리는 6학년을 마치고 이듬해 2월, 졸업을 맞이하게 되었다. 졸업식 전날 소집이 있어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은 죽은 상우 이야기를 했다.
상우가 죽은 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상우 어머니는 학교에 오셔서 선생님께 졸업앨범에 상우 사진을 넣어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하셨다. 선생님이 난감해 하자, 상우 어머니는 ‘상우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친구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게 해 달라’고 사정을 하셨던 것이다. 졸업 앨범을 펼쳐 보니 과연 상우 사진이 우리와 함께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상우가 세상을 떠난 후인 11월에 우리가 졸업사진을 찍었으니 앨범 제작자에게 상우 사진이 있을 리 만무했다. 상우 어머니가 여럿이 찍은 가족사진에서 오려서 앨범 제작자에게 건넨 것으로 보이는 희미한 상우 얼굴은 희미하고 배경이 달라서 우리가 사진관에서 단체로 찍은 사진에 비해 금방 표시가 났다.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자식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는데, 상우 부모님은 그 큰 슬픔 속에서도 나를 비롯한 친구들의 기억에 상우가 영원히 살아있는 방법을 택하셨다.
우리는 이후에도 상우네 집 앞을 다니지 않았고 내 어머니를 비롯한 급우의 어머니들도 마음이 아파서 그 가게에서 장을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 같았다. 상우 어머니가 상처받고 마음 아파할까 봐 배려를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졸업한 몇 달 후 시장 통에서 상우네 가족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나이 들어 생각해보니 그러한 배려들이 오히려 상우 가족을 더 힘들게 해서 이사를 하게 만든 게 아닌가 하는 판단이 든다. 그리고 아픈 상우 앞에서 내가 주일학교 교리 시험에서 상 받았다 자랑한 사실 역시 부끄럽기 짝이 없다. 조금만 철이 있었다면 백혈병이 어떤 병인지 알아봤을 것이고 상우와 잠시라도 함께 시간을 보내는 등 좀 달리 대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자괴감 때문이다.
일찍이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진짜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인간의 앎(知)이나 판단이 지향해야 할 참된 모습을 지적하는 말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두고두고 가슴에 담아야 할 만한 명언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세월을 반추해보니, 과거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처나 아픔으로 남은 기억, 이유를 알 수 없는 죄책감이라고 해도 그 역시 지금의 나 자신을 있게 한 소중한 과거 중의 하나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나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고 보편적인 삶을 살아왔지만 그때 나에게 남은 기억은 나름대로 커다란 의미를 가지며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지난 일요일에는 운전하던 차를 돌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의 그 재래시장을 들러보았는데 옛날 상우네 가게 자리가 보였다. 쓸레이트 집이었던 상우네 가게는 이미 사라지고 대신 반듯한 삼층 건물로 변했고 낯선 여인이 여전히 채소와 식품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세월의 언덕을 넘기 전인 어린 시절 상우가 그 자리에 서있는 것 같아 코끝이 찡했다.
6. 유년시절 기억의 끝자락
내가 아주 어릴 때 어머니에게 손을 잡힌 채, 아니면 등에 업혀서 간 특정한 그 장소를 지금도 기억한다. 내가 세 살 정도일 때, 세탁소집의 아내로 가난에 쪼들렸던 어머니는 세탁소 일 외에도 ‘수예(手藝)’라는 일을 하고 계셨다. 천주교 초량 성당이란 곳에서 일감을 얻기 위해 코흘리개 어린아이인 나를 데리고 그곳에 가신 것이다.
50년 가까이 지난 세월이지만 흐릿한 기억에 초량 성당은 언덕 위에 있었고 성당 입구에서 본당 건물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계단을 걸었던 것이 생각나곤 했다. 그 어린 시절, 그렇게 해서 마침내 도착한 성당에서 내려다본 언덕 아래에는 부산항이란 커다란 부두와 도로, 기와집(적산가옥)들이 즐비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3~4살 때 기억 말고는 그 성당에 가본 적이 없는데 과연 그 기억이 맞을까? 하는 점 때문이다. 출장 시, 여행 시 기차를 타기 위해 부산역을 들르는데 부산역 대합실을 나오면 지금도 항상 정면 두 시 방향에서 2km 정도 떨어진 초량 성당 건물이 보인다. 그때마다 나는 항상 궁금했었다. 계단이 있었던 초량 성당, 그 기억이 과연 맞기나 한 것일까? 하는 점 때문이다. 휴일, 작심하고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다. 몇십 년 만의 궁금증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그 날, 나는 어머니와 함께 성당 입구에서 많은 계단을 거쳐서 성당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과연 낡은 콘크리트 계단이 위의 사진처럼 지금도 남아있다. 그런데 부두 쪽의 고층 건물에 가려서 바다는 보이질 않았다.
그러나 사진의 이 계단만은 분명히 뇌리에 남아 있다. 계단을 걸어 들어간 성당에서 사무실에서 뭔가 이야기를 하던 어머니를 기다리다 지쳐 구슬치기하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그날……. 미사포나 손수건에 수를 놓는 일감을 구하지 못했다고 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그간의 오래된 모든 궁금증이 풀린 날이었다. 부산역을 오갈 때, 운전하며 이 근처를 지날 때마다 유년시절 기억의 끝자락이 맞는지 늘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약 60년 전, 부부가 된 두 사람은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었다. 그리고 알고구마 같은 자기 핏줄을 얻는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서식하고 있는 둥지를 지키고 아버지는 사냥을 나갔다. 가시덩굴에 긁히고,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고, 맹수한테 쫓기고, 독사한테 물리고, 추위와 더위에 시달렸다. 헐떡거리며 사투를 벌인 결과 얻은 사냥 노획물을 둥지 속에서 자라는 자식들에게 제공했다.
그렇지만 세상의 모든 아들, 딸들은 그러한 사냥꾼과 둥지였던 부모님의 아픔과 절망과의 사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고독과 소외감에 몸부림칠 때 가난과 무능력을 탓하고 추궁했던 기억들은 중늙은이가 되어가는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6. 25 전쟁 이후 10년 정도가 지났을 그때, 살기가 참으로 막막할 때, 부모님 두 분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며 사셨고 위기를 이겨내셨는지 새삼 경의를 표하고 싶다. 삶은 모호한 만큼 때로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결과를 터무니없이 수월하게 이루어 보이곤 한다. 삶이라는 잿빛 덩어리는 수많은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그 우연을 교묘하게 숨기고 단지 애매한 겉모양만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닐까?
7.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나이가 드니 아침나절 일은 잊어버려도 아주 어린 시절 일은 또록또록 생각이 난다. 전에도 언급한 바와 같이 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읽을 책이 없어서 장롱 속의 족보를 꺼내어 달달 외우거나, 엿장수 아저씨가 가진 낡은 야담류 책 등을 독후감으로 적어 방학숙제로 제출하는 바람에 선생님께 야단을 맞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개신교 계통의 사학에 다니는 큰형의 책꽂이에서 <성경 이야기>란 기독교 중학교 교과서를 발견했다. 그 책은 구약성서 창세기부터 신약성서의 복음서까지를 중학생이 읽기 쉽게 풀어서 서술한 책이었다. 생각해보시라! 인류가 만든 책 중에서 구약 성경을 능가할만한 이야기 구조를 가진 대서사시가 있었던가? 나는 물을 만난 고기처럼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약 100번가량 읽었을까? 선천적으로 암기력이 좋은 데다 읽을 책이 그 책밖에 없었으니 몇 달 동안 계속 읽다 보니 구약 성서와 신약성서 중 복음서를 달달 외우는 수준까지 갔다.
네 살 때 유아 영세를 받았으나 어머니가 냉담(冷淡)하는 바람에 성당에 다니지 못했던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학급 친구의 권유로 성당에 다니게 되었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 오후 2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한 시간은 교리 공부고 나머지 한 시간은 어린이 미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두 시간은 오로지 나를 위해 존재하는 시간이었다. 꿈이 없던 소심한 소년은 드디어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깨닫고 세상을 향한 자신감을 채우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성당에서 실시하는 수십 번의 각종 교리 시험에서 나는 한 번도 빠짐없이 만점을 받았고 상이란 상은 혼자서 싹쓸이했기 때문이다. 6학년 담당 주일학교 선생님은 그러한 나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장미꽃이 만발한 4월 어느 토요일 오후, 성당 교리실에서 스무 명가량의 남녀 아이들이 눈을 빤짝이면서 주일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영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덧니가 유달리 기억나는 선생님은 20대 중반의 키가 크고 글래머 몸매를 한 미인이었는데 항상 초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니셨다. 선생님은 그날 성경 교리를 가르치지 않고 <기적>이란 영화 이야기를 한 시간 동안 하셨다. 5분 정도 늦게 지각한 나는 어쩔 수 없이 비어있던 선생님 바로 옆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선생님 몸에서 풍기는 향긋한 체취와 향수 냄새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여자 형제 없이 자란 가정환경의 영향도 있었겠으나 孟春, 날씨가 너무 좋았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여름방학 때 우리는 선생님과 함께 부산의 가장 구석 자리에 있는 다대포 해수욕장에 소풍을 갔다. 선생님은 점심 도시락과 버스비만을 준비해오라고 했는데 실제 해수욕장에 가니 비치파라솔 등을 빌리지 않고 해수욕장 구석 외진 곳을 찾아서 걷고 또 걷는 것이 아닌가? 탈의장과 파라솔 사업을 하는 젊은 남자들이 우리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선생님, 이리 와요!”
“예쁜이 선생님! 잘해 드릴 깨여!”
선생님은 그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인적이 드문, 외진 모래사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평상복 차림의 선생님은 바위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나왔는데 갑자기 빨간색 비키니 차림으로 변신했다. 이후 선생님은 자비로 대형 튜브 한 개를 빌려서 일일이 아이들을 자신의 품에 안고 물놀이를 하셨다. 물론 나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비쩍 마른 초등학교 6학년 아이의 등에 부드러운 선생님의 품이 느껴지는데 사춘기가 시작하는 시기였는지 순간 나는 좋아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선생님은 내 귀에 대고 고운 목소리로 "집에 누나가 있느냐?"라고 물었다. 나는 "형만 둘 있어요."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 6시경에야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그런데 차가 막히는 바람에 귀가시간이 너무 늦어 통금시간인 12시 가까이에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 부모님들이 경찰서에 <아동 실종신고>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몇몇 부모님은 성당의 주임신부님께 항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든 그 발랄하고 예뻤던 선생님은 그 일로 징계를 받았는지 그날 이후 주일학교에서 더는 만날 수 없었다. 후임 선생님에게 물어보니 대답이 너무 간단하여 더 이상의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서울 갔다!"
그렇게 해서 그해 여름이 가고,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 고등학교에 가고 또 어른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이성을 사귀게 되었다. 성인이 된 후 돌이켜 보면 그간 내가 이성을 바라보는 기준이 그때 그 선생님과 연관되어 있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살아가면서 가끔 나 자신, 행복에 관한 천부적인 감각이 있다고 생각했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을 좋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만져지지 않는다고 굳이 부정해야 할 이유도 없다. 나에게는 늘 세 가지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해줄 누군가가 있을 것 같았다. 그 선생님이 그 누군가가 아니었을까? 나는 당시 정리정돈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일에는 천치지만, 늘 비현실적인 즐거움을 원했다. 어렸을 때 꿈꾸었던 프루스트적인 웅장함을. 그러나 한편으로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그 그리움과 동경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불혹의 사십이 지난 어느 날 그 선생님을 찾아서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니 그때 교리실에 함께 있던 꼬맹이의 큰누나와 그 선생님이 친구였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술을 무척 좋아하는 그 친구를 퇴근 무렵 시간에 불러서 통사정 투로 이야기했다.
“철수야, 그 선생님 어디서 무엇이 되어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한 번 연락처를 수소문해 주면 안 되겠니?”
“아하, 그렇구나! 그렇게 하자. 그 당시 내 누나와 선생님이 친한 사이였으니 누나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이후로 건망증 심한 친구에게 몇 번이나 닦달하였다. 그리고 두 달 후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나에게 물어보았다. 그 선생님, 우리에게 교리 가르칠 때가 대학 4학년 때였는데 이후 결혼하려고 미국 갔다가 L. A 공항 근처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하더라.”
아아,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한숨만 연거푸 쉬다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런데 궁금하다. 이성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내가 수십 년간 선생님을 향해 가졌던 감정,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8. 사라진 고향
내 기억 속 고향의 행정 주소는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읍 내동이었는데 그 지명은 근래에 김해시 내외동으로 바뀌었다. 할아버지는 제법 큰 농사를 지으셨는데 머슴을 셋이나 두었다. 큰 머슴, 작은 머슴, 꼴머슴 등이다.
우리 옛 속담에 ‘늙은 쥐가 독 뚫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 일이 있었기에 생긴 속담일 것으로 여겨지는데 나의 할머니는 직접 보셨다고 했다. 어린 시절 나는 방학 때 큰집인 김해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는데 머슴 방에 가서 가마니 짜는 것, 새끼 꼬는 것, 멍석 엮는 것 등을 자주 보았다. 할아버지 소유의 논밭이 많았고 집은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큰 채, 아래채(사랑채도 있었던 것 같다) 또 별채가 있었고 또 뒷간 채도 있었다. 뒷간 채는 한쪽은 여자용이고 한쪽은 남자용인 걸로 기억한다. 아래채에는 큰 광이 있었는데 컴컴하고 무서웠다. 그곳에는 큰 독이 아주 많았다.
일곱 살이 되지 않은 우리 꼬마들은 숨바꼭질이나 깡통 차기 할 때 광에 들어가서 숨으면 들키지 않았다. 광이 넓고 컴컴했고 또 빈 독들이 있어서 개구쟁이들은 큰 독에 들어가 숨었다. 꼬마들이 둘씩이나 들어가는 독이 있었고 그런 독에는 주로 곡식과 고구마, 감, 술 등을 넣어두었다. 그런데 쥐가 많았다. 또 큰 뱀(진대라고 했다)이 쥐를 감아 집어삼키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가까이 가서 봐도 위험이 없었고 어른들은 그 뱀을 ‘찌금’이라고 해서 쫓아내지 않고 그냥 두었는데 내쫓으면 집안이 망한다는 것이다. 이 큰 뱀은 제멋대로 다녔는데 작은 방, 부엌으로, 광으로, 헛간으로, 심지어 지붕 위로 기어 다녔다. 쥐가 많으니 그런 뱀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놀라시겠지만, 부엌의 시렁 위에 도사리고 있는 것도 보았다.
할아버지께서는 광이 붙은 방에 주로 기거하셨다. 할머니는 허리에 주머니와 함께 열쇠 꾸러미를 차고 계셨는데 광을 여닫는 것은 할머니의 권한이고 큰어머니나 어머니, 숙모님 등 며느리들은 시어머니께 열어 달래서 출입을 했다.
할머니는 쥐가 독을 뚫는 것을 직접 봤다고 하셨다. 한잠 자고 일어나셨는데 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문틈으로 자세히 들여다보신 것이다. 마침 달이 밝아 공기(환기) 창으로 달빛이 비쳐 들어와 광의 일부가 환했다고 한다. ‘똑똑’하는 소리가 나기에 유심히 보니 몇 마리 쥐들이 밑에서 받쳐주고 큰 쥐가 입에다 돌을 물고 독을 두드렸다. 어찌하는가 하고 가만히 두니 날이 새도록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그 쥐들이 독을 성공적으로 뚫어서 곡식을 먹었다고 했는데 과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한 손엔 영어 단어장 들고
가름젱이 콩밭 사잇길로 사잇길로 시오리를 가로질러
읍내 중학교 운동장에 도착하면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해에
함뿍 젖은 아랫도리가 모락모락 흰 김을 뿜으며 반짝이던,
간혹 거기까지 잘못 따라온 콩밭 이슬 머금은
작은 청개구리가 영롱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팔짝 튀어 달아나던,
내 생에 그런 기쁜 길을 다시 한번 걸을 수 있을까
- 이시영 시집 '마음의 고향 4 - 가지 않은 길' 전문
할아버지는 할머니 몰래 이웃 동네 과수댁 할머니를 방에 데리고 와서 주무시다가 할머니에게 들켜 봉변을 당하셨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상당히 재미있게 사신 분이셨다. 할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 돌아가셨다. 운명하시던 날 아침 대청마루에서 마당을 내다보시며 "마당에 웬 군인들이 이래 와 있노?" 하셨는데 순간 어린 나를 비롯해 모두 마당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숨을 거둘 때 저승사자가 나타난다고 하는 속설이 있는데, 내가 직접 목격한 일이라 나는 그 말을 지금까지 믿고 있다.
이웃에 우리 집안과 친한 동네 할머니가 한 분 계셨다. 아들이 셋으로 막내아들과 함께 그곳에 사셨는데 패물을 상당히 많이 갖고 계신다는 소문이 있었다. 특이하게도 주머니 하나에 귀한 보물을 넣어서 그 주머니는 항상 차고 있었다. 언제나 몸에서 빼지 않았다. 위의 두 며느리는 서로 자기 집에 모셔가려고 애를 썼다. 큰 며느리는 큰 며느리대로 모실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막내며느리는 지금 자신이 모시고 있으니 그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며, 가운데 며느리의 주장은 이랬다. 딱 가운데 자식이니 자신이 맡는 게 이치에 맞는다는 이야기였다.
세 며느리가 서로 모시려고 하니 즐거운 비명이었다. 팔십이 가까웠으니 이제 돌아가실 때도 얼마 남지 않았고 잘만하면 그 주머니에 든 보물은 자신의 것이 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으로 보인다. 그런데 막상 그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동작 빠른 큰 며느리가 재빨리 주머니를 챙겼다. 그런데 손아래의 두 며느리는 불만이 많았다. 큰 동서가 그 보물(?)을 혼자 다 차지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주머니를 장롱 속에 단단히 넣어두고 봉한 후에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그렇게 하고 장사지낸 다음 장롱을 열어보니 똘똘 말은 헝겊에 싸여서 겹으로(주머니가 두 개) 싼 주머니 속에 든 것은 보물이 아니고 여러 색깔의 돌멩이 몇 알이었다. 며느리들 속만 보이게 했던 유명한 동네의 일화이다. 동네의 글줄이나 읽었다는 문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의 나이 많은 어머님들이여, 절대로 자식들에게 전 재산을 몽땅 주지 말지어다. 다 주고 나면 공일이 되는데, 어찌 앞의 그러한 극진한 대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어쨌든 볼일이 있어 창원으로 가다가 나의 옛 고향인 김해시 내외동을 거치게 되었다. 어릴 적 추억 속의 초가집과 들녘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신하여 그 자리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파트 단지만 빼곡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는데 그 자리가, 옛날 할아버지의 집……. 아버님이 태어나고 자라나셨던 그 장소, 내 어릴 적 놀던 장소임을 아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것들, 옛 선비는 '산천은 유구한데 인걸은 간 곳 없네'라는 시를 읊었지만, 산천은 몰라볼 수밖에 없는 현대 도시로 변했고 그리운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9. 아버지의 로맨스
아버님이 항상 부러워하는 고향 친구가 있었다. 그분이 결혼할 당시 신부 측에서 혼수를 많이 해오는 바람에 온 동네에 '굉장한 혼수'에 관한 소문이 자자하게 났기 때문이다. 아버님의 부러움은 어머님의 인내심을 자주 자극하고 있었다. 내용은 아버님 친구의 부인이 시집오면서 소 한 마리, 돼지 한 마리, 개 한 마리, 닭 한 마리, 자전거 한 대 등 당시로는 파격적인 혼수를 해왔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집안이 파산 상태였던 처가의 혼수와도 비교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님은 매우 균형 잡힌 사고를 하신 분이셨다. '로마이 신랑 이야기'가 그것이다. 당시 경남 김해 지방에는 로마이 신랑 사건이 유명했는데 나는 이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좀 귀찮을 정도로 자주 들었다.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이웃 동네에 신혼부부가 있었다. 신랑은 신부 측에서 해온 부실한 혼수가 항상 불만이었다. 당시에는 로마이라는 양복이 유행했는데 신부는 신랑이 은근히 원했음에도 형편이 좋지 않았는지 혼수로 그 양복을 해오지 않았다. 로마이는 '로만 스타일'이라는 말에서 연유된 이중 재킷형의 양복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틈만 나면 '내 친구 아무개는 혼수로 로마이를 해왔는데 너는 뭐냐'는 식으로 신부를 구박했다. 그런데 그 빈도가 굉장히 심했던 모양이다. 신부는 로마이에서 비롯된 압박을 견디다 못해 친정 오빠에게 그러한 내용을 편지로 자세히 쓴 뒤 자살해 버렸다. 어쨌든 사람이 죽었으므로 동네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전통 장례식에서는 크게 소리 내어 ‘어이구, 어이구!’ 하며 곡을 하게 된다. 신랑이 곡을 하자 신부 오빠가 제동을 걸었다.
“자네는 ‘어이구, 어이구~’ 곡을 하지 마라! 로마이 때문에 내 동생을 죽게 했으니 ‘로마이, 로마이~’라고 곡을 해야 맞지 않겠나?”라고 하며 신랑을 면박 주었던 웃지 못할 사건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부드러운 성격의 아버님과 남자 같은 성격의 어머님은 잘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가난 탈출이라는 목표에는 두 분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 지극히 근면 검소한 부분은 쌍둥이처럼 닮아있었다. 부부싸움 후에도 다음날이면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평온한 집이었다. 두 분이 주신 무형의 정신적인 유산의 영향으로 오늘날 내가 밥을 먹고 빚 없이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초등학교 5학년 즈음의 어느 날이었다. 늦은 저녁 시간의 하굣길로 기억한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20분 정도 걸리는 길이었는데 도중에 참을 수 없을 만큼 소변이 마렵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닥다닥 붙은 집 사이에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으로 들어가 적당한 전봇대를 하나 발견했다. 지금은 어쩐지 모르겠지만, 인적이 드문 골목의 전봇대는 아이들 방뇨 장소로 안성맞춤이다. 시원하게 소변을 보다가 건너편 전봇대 옆에서 인기척을 발견하게 되었다. 뭐 하는 사람들일까? 어둠이 깔려 가는 시간이었지만 먼 거리가 아니어서 자세히 쳐다보게 되었다. 그런데 중년의 남녀가 다정스레 손을 잡으며 밀담을 나누고 있었고 이후 가볍게 포옹하는 모습을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누구일까? 자세히 보니 여자는 누구인지 모르겠고 남자는 아버님이 확실했다. 아침에 출근할 때 입고 나가셨던 옷차림 그대로.
초등학교 5학년의 나이였지만 그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대충 알만한 시기였다. 나는 애가 멍청했는지, 아니면 무조건 그래야 한다고 믿었는지 이 이야기를 40대가 될 때까지 함구하며 살았다(아버님은 내가 스무 살이던 해에 별세하셨다). 아버님은 항상 다정다감한 분이었기에 아버님께 권위의식이나 무서움을 느끼며 살진 않았던 것 같다. 왠지 이유는 모르지만, 평생 비밀로 지켜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셈을 해보니 그때 아버님 연세가 44세였던 걸로 계산된다.
내가 40대 중반이던 어느 날,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사촌 동생과 퇴근길에 연락이 되어 소주를 마실 기회가 있었다.
소주잔이 몇 순배 돌자, 나는 동생에게 어릴 때 우연히 목격했던 그 날 아버님의 모습을 털어놓았다. 동생은 매우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형님, 이야기를 들으니 큰아버지는 참으로 멋진 분이셨네. 그 당시 큰집도 얼마나 가난했어요? 큰엄마는 호랑이 같았고. 요즘 말로 하면 숨도 쉬지 못할 것 같은 분위기에서 로맨스를 간직하며 사셨던 큰아버지는 멋쟁이 중의 멋쟁이가 아닐까?”
핫하, 뭐가 맞는 건지 모르겠다. 동생 이야기를 들으니 그런대로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몰래 간직했던 아버님만의 비밀, 아버님만의 로맨스가 있었다. 나이가 드니 그 비밀을 지켜주었던 유년시절의 나 자신이 대견스럽다. 그런데 중년의 아주머니는 대체 누구였을까? 이후 많은 시간이 흐른 요즈음, 그 사건의 모든 것은 아무것도 없음, 무위(無爲)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다. 모든 사람은 삶의 힘든 어떠한 시점에서 벗어나길 원한다. 아버님도 그랬을 것이다. 세상에는 하루아침에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집이나 일터를 떠나,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지켜보아야 알 수 있는 것도 있다. 먼지처럼 가벼운 참을 수 없는 우리 인간의 존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10. 풋술을 마시다
고교 시절 절친한 친구였던 그는 대학에 들어간 후 연극에 미쳐있었다. 그는 수업도 듣지 않고 거의 날마다 학교 연극부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학교 내의 행사인 정기 연극 공연 때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언제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녀석 때문에 대학 시절 보았던 <우리 읍내>라는 연극을 기억하고 있다. 이 연극에서 지금도 내게 깊은 감동적 인상으로 남아있는 장면이 있다.
여주인공이 아이를 낳다가 그만 죽어버리고 만다. 그녀는 무대감독을 맡은 상징적인 신(神)에게 나는 이대로 젊은 나이에 죽을 수는 없다. 내 일생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한 번쯤 돌아가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그러자 무대감독이 묻는다.
“당신이 행복했던 것은 언제입니까?”
여인은 대답한다.
“내가 열 살 때의 생일이었어요.”
소용없는 일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무대감독은 여주인공을 열 살 때의 시절로 되돌려 보낸다.
장(場)이 바뀌면 열 살 때의 생일 아침이다. 어머니는 딸의 생일상 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때 여인은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어머님이 저처럼 새파랗게 젊으실까.”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 옆에서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그러나 어머니는 딸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옆에서 말을 걸어도 듣지 못하고 있으며 옆에서 붙잡아 끌어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결국, 여인은 행복했던 추억이란 과거로만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이 그처럼 아름답다 해도 되돌려 재현시킬 수 없다는 절대적 명제 앞에 깨끗이 과거의 미련을 떨쳐버리고 자기 죽음에 승복하는 것이다.
왜 갑자기 연극의 한 장면을 떠올리는가 하면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립기 짝이 없는, 그날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고2 때의 겨울방학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 삼 형제는 세 살 터울로 내가 막내였는데 큰형은 국립대 공대 기계과를 졸업하고 거제도에 있는 대기업 조선소에 근무하고 있었고, 공고를 졸업한 작은형은 울산에 있는 대기업 조선소에 제도사로 취직하여 야간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부모님들이 고생한 보람이 있었는지 아들 형제들은 무난하게 사회의 중간층으로 편입되는 중이었다. 문제는 나였다. 고1 때 사춘기를 유달리 혹독하게 겪으며 방황을 많이 한 탓으로 학교 성적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재능을 갖고 있었던 미술 공부는 가족의 반대로 아예 엄두조차 내지 못했으며, 시인이 되겠다던 꿈 역시 스스로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게다가 성당에서 알고 지냈던 동년배 여학생과 주고받았던 연서(戀書) 사건은 자신을 문제아로 만들어 자책의 구렁텅이 빠져드는 등 나 자신도 이러다가는 아무것도 안 되겠다는 판단을 할 정도였다.
투명한 유리그릇에 물을 가득 담고 그곳에다 흙을 넣어보시라. 당장은 흙으로 인해 흙탕물이 되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흙은 바닥에 가라앉고 그릇 속의 물은 다시 맑아진다. 자기 정화력(自己淨化力). 이 말은 자연현상에 사용되는 용어지만 인간사에도 적용된다. 고2로 넘어오면서 나는 평정심을 찾기 시작했고 무슨 일이든지 최선을 다하면 뭔가 길이 보일 것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 그러니 아무 생각 않고 공부만 열심히 해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바둑판처럼 정돈된 골목 길가의 내 창은 새벽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코피를 줄줄 흘리어가며 공부를 했다. 연세가 들어 퇴역한 예비역 육군 중령인 앞집 아저씨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동네 산책을 하시는 모양인데 그때까지 내 창에 불이 켜져 있음을 항상 발견하시고는 칭찬을 하셨다.
“저 집 막내아들 공부하는 걸 보니 뭐가 돼도 큰 인물이 될 거야!”
그러던 어느 날, 토요일 근무를 마치고 저녁 어스름에 울산에서 부산으로 넘어온 작은형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야, 어디에 가서 우리 한잔할까?”
“형, 내가 고등학생인데 어떻게 술을 묵을 수가 있노?”
형은 헐~ 웃으면서 말했다.
“녀석,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어디 있겠니?”
그래서 둘은 부모님 몰래 집을 빠져나와 동네 시장통에 있는 한산한 막걸리 집에 도착했다. 당시 고등학생 머리인 스포츠머리를 한 나는 미성년자가 술집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형이 옆에 있기에 두렵지는 않았다. 형은 부침개. 튀김과 삶은 게, 회무침 등과 막걸리를 시켰는데 주인아저씨는 내가 고등학생인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안주와 술을 내놓았다. ‘풋술’이란 용어가 있다. 사전에는 없는, 남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낱말인 것 같은데 ‘처음 마시는 술’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풋술은 보통 남자들 주량의 서너 배는 된다는 것이 통설이고 보면 그날 내가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갈 ‘지(之)’ 자로 비틀거리던 나는 형과 함께 겨우 대문 앞에 도착했다. 대문 옆에 있는 벨을 누르면 집 안에 있는 사람이 문을 열어주는 구조였는데 그날따라 벨을 누르니 집안에 계시던 아버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까지 오셔서 손수 문을 열어주셨다. 순간 나는 당황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술 냄새를 풍기지 않으려 숨을 멈추며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금방 아들 둘의 상태를 알아채셨다.
“이놈의 자슥들! 너그 술 묵었제? 어린 나이에 술 묵으면 머리 나빠지는 거 모르나!”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왠지 대견 해하시는 표정이었다. 나는 곧장 방으로 달려가 요를 깔고 잠들었다.
솔솔 부는 봄바람
쌓인 눈 녹이고
잔디밭엔 새싹이
파릇파릇 나고요.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우리는 그 집에서 살았다. 밤이 오면 세든 뒷집의 어린아이들이 우리 가족(세 살 터울인 형들과 부모님) 앞에서 소프라노와 알토로 노래를 부르곤 했다.
11. 어른이 되기 위해 떠났던 여행
그해 대학 입학 예비고사와 본고사를 치른 후였다. 우리는 고교 졸업과 대학입시 시험 결과 발표를 앞두고 있었다. 유달리 감성이 뛰어났던 같은 반 친구 두 명과 나는 무작정 완행열차를 타고 동해 바다로 떠나기로 했다. 한 명의 이름은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으나 나머지 한 명은 누구인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당시 유행했던 송창식의 ‘고래 사냥’이라는 노래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시험을 평소 실력에 비해 잘 치지 못했다고 생각들 하고 있었으므로 시험 결과 발표는 두려웠으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기대 하나로 버티고 있던 시간이었다. 그렇게 무작정 집을 떠나기로 한 것은 아마도 입시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과 앞으로 살아야 할 날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부산의 중심지 서면에 있는 부전 역에서 울산, 포항으로 그래서 종국으로는 강릉까지 가서 ‘신화처럼 숨 쉬는’ 고래를 만나자는 그야말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계획이었다. 철없는 초급 청년 세 명은 간단한 배낭에 옷가지 몇 점과 만 원짜리 지폐 서너 장을 쥔 채 열차에 몸을 맡겼다. 여행을 도모한다고 했지만 기실, 학교에서 한 수학여행을 간 것 외에는 아무런 경험이 없는 처지들이었다. 완행열차인 비둘기호가 부산 시내와 해운대를 지나 현재 기장군 지역인 좌천역이라는 바닷가 시골 역에 도착했을 즈음이었다.
승객을 모두 태웠음에도 열차는 출발하지 않고 계속 멈춰있었다. 열차가 고장 났다든지, 다른 기차를 보내기 위해 잠시 멈춘다는 식의 차내 방송 또한 없었다. 그때 친구들과 내가 바라본 차창 밖 플랫폼에는 열차 차장과 승객 한 명이 승강이가 벌이고 있었다. 열차에서부터 강제로 하차된 승객은 10대 후반 정도의 뚱뚱하고 키가 작은 청년으로 보였는데 짧은 스포츠형 머리와 허름한 점퍼를 입은 채 보퉁이를 하나 든 상태로 선한 눈매를 갖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청년은 무임승차를 했고 차장은 빈 좌석이 많은 열차임에도 눈감아 주지 않았을까? 차창 밖 광경을 구경하던 우리는 궁금증 속에 그들을 주시했다. 강제로 하차된 청년은 다시 열차에 올라타야 한다는 애절하고 간절하기 짝이 없는 눈빛을 차장에게 보내며 계속 승차를 시도 중이었다. 그러다가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연이은 열차 탑승 시도가 저지되자 청년은 차장에게 항의라도 하듯 입은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앗! 이럴 수가……. 무료하게 열차 안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승객들은 모두 경악하고 말았다. 점퍼를 땅바닥에 내던지고 스웨터를 벗고 상의 속옷까지 벗으니 나신이 되었는데 아주 큼직한 젖가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는 이어서 차장이 저지할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바지와 팬티까지 벗고 전라(全裸)가 되었는데 그 청년은 여자였다. 당황한 차장은 무전기로 역무원들을 불러 담요로 여자를 감싼 채 역 구내로 강제로 데리고 갔고 잠시 후 열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출발했다.
친구 둘과 나 사이에는 몇 분 동안 계속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무엇이 저 사람이 저런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을까?”
당시 우리는 열아홉에서 스무 살로 넘어가는 애송이의 나이였지만 나름의 소설 같은 추측을 할 수 있었다. 다른 친구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나이가 20세 전후이고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발달 장애 또는 정신 지체 상태일 것이다. 아마도 보호된 시설 또는 주변 사람으로부터 어린 시절부터 숱한 성폭행을 당했을 것이다. 그래서 반복되는 괴롭힘을 당하다 못해 그곳을 무작정 탈출하여 자유로운 곳으로 가기 위해 무임승차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하다시피 곧 열차 승무원에게 적발되었고 그 상태는 그녀에게는 다시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공포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녀는 온전한 정신상태가 아니었지만, 예전의 지옥과 같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뭔가 반대급부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터득했고 그것은 성(性) 일 것이다.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오늘 저렇게 하고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묵묵히 듣던 다른 친구가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른이 되어 넓은 세상으로 나가야겠지. 그러나 이렇게 잔인하게 움직이고 있는 험난한 세상은 참으로 무섭구나.”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지만 나는 그때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일은 내 인생에 많은 교훈을 남겨 주었다. 요즘의 관점에서는 소외된 계층의 복지 차원에서 접근될 문제겠지만, 당시 우리는 인간이 지닌 배타적인 속성을 단적으로 목격했다.
그해 겨울, 강릉에 도착한 애송이 셋은 그 노래 가사에 나오는 신화처럼 숨 쉬는 고래를 만나지 못했다. 세상을 향해 다가간 우리에게 보이는 것 첫째부터가 돌아앉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살이는 험하고 인간은 이기적이며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세속적인 세상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해 준 날이기도 했다. 엄동설한의 겨울날, 무작정 옷을 벗어젖히던 그 소녀가 만난 험한 세상을 우리도 나아가야 하리라는 것을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철부지 19살의 우리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따라 각자 적성에 맞지 않는 학과를 선택했고 서로 다른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세상의 시정(市井) 일이 항상 그러하듯, 꽃답고 아름답다는 것은 한 번 그늘지고 시들기 시작하면 절정일 때만큼 더 처참하고 황폐하기 마련이었다. 이후 함께 여행을 갔던 두 친구 중 한 명은 다른 나라로 이민하였고, 다른 한 명은 중년이 시작될 즈음에 지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둘 다 그 여행 이후로는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살다 보면 오랜 친구 간이라고 하더라도 의견의 차이나 감정의 대립으로 원수 같은 사이가 되기도 한다. 오랫동안 그리워할 수 있는 사이는 축복받을 만한 일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서 우리는 삶의 어느 한 부분을 지적하며 특히 그것을 꽃다운 시절이라든가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삶이 하나의 긴 여행이라면 그 굽이에서 우리는 숱하게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들 중 어떤 경우는 단 한 번의 스쳐 지나가므로 끝나는 이가 있었고, 만나긴 했지만, 도무지 어떻게 해서 만났는지 기억조차 없는 사람도 있다. 세월의 길목에서 쓰라림과 외로움을 함께 나눈 지난날의 벗들, 세월이 흐르더라도 그때의 기억만은 살아남아 가끔 그리움으로 떠오르는 시절이다.
12. 딩동댕 그해 여름
내가 고1 때 MBC 방송에서 '대학 가요제'라는 게 시작됐다. 당시 군사 정권 시절이라 들을 만한 노래가 드물었기 때문에 모두 공연 실황을 보고 충격에 가까운 새로운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대상을 차지했던 ‘나 어떡해’는 물론이고, ‘저녁 무렵’, ‘꿈나라’, ‘다시 핀 목련꽃’, ‘하늘’, ‘가시리’ 등 모든 노래가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의 곡은 ‘회심’이란 대구에 사는 여대생이 부른 노래였다. '랄랄라 콧노래 따라 흥겹게 불던 오늘도 사랑의 피리, 피리를 부네~'라고 시작되는 이 노래는 요즘 말로 하면 ‘랩’과 비슷한 노래 속 독백이 곡 전체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데, 여대생의 가슴 아린 실연의 독백이 인상적이었다. 교실에서 누군가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학급의 분위기는 ‘슬픔의 연못’ 속에 빠지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급기야 이 노래를 부른 그다지 예쁘지 않은 그 여대생이 헤어짐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까지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친구 중에 피아노를 음대생 수준 이상으로 잘 연주하던 수경(여자가 아니라 남자다)이라는 녀석이 있었다. 녀석과 나는 우리도 몇 년 후면 대학생이 될 거니까 그때를 대비해서 대학가요제에 출전할 곡을 미리 만들어 준비해 두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2 여름방학 때였다. 그래서 둘은 배낭에 텐트와 버나를 넣고 울주군 서생면에 있는 진하해수욕장에 가기 위해 시외버스를 탔다. 글을 잘 쓰는 내가 노랫말을 만들고 그 가사에 음악 신동인 녀석이 곡을 붙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몇 년 후 대학생이 되면 대학 가요제에 나가서 대상을 받아 그 돈으로 대학 4년간의 장학금으로 사용하자는 실로 꿈같은 계획을 세워 둔 상태였다.
애송이 고등학생 둘이서 도착한 시골의 해변 여름 바다는 시원하고 상큼하며 정겹기 짝이 없었다. 일단 적당한 민박집을 얻은 후 천천히 시상(詩想)과 악상(樂想)을 가다듬자는 계획을 세웠으나 처음 오는 어촌 마을 어디에서 어떻게 민박집을 구하느냐가 문제였다. 때마침 해변에서 연세대 로고가 그려진 셔츠를 입고 배낭을 멘 채 길을 찾고 있는 잘 생긴 대학생을 만났다. 그를 따라가려다가 머뭇거리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둘이서 민박집을 계속 찾고 있는데 그 동네의 불량 학생들이 냄새나는 화장실 바로 앞의 공터를 가리키며 사용료를 싸게 받을 테니 이곳에 텐트를 치도록 하라며 강요했다. 순간 적잖이 당황했지만 애써 무시하고 민박집을 계속 찾았다. 그들에게 강요당하는 순간, 공포로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불량소년들이 우리에게 해코지하면 대응할 수 있는 대책을 미리 세워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아까 그 대학생을 우연히 또 만나게 되었다. 그는 반갑게 우리를 대하면서 자신도 민박집을 찾고 있는데 함께 구하자고 했다. 그래서 그 형님을 따라 안전하게 민박집을 구할 수 있었다. 연세대 국문학과 2학년 최병규. 지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데 2학기가 끝나면 입대할 거라고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 형님은 우리에게 담배를 권했는데 우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못 피운다고 하니 맑은 표정의 흐뭇한 미소를 지었던 게 기억에 남는다. 그 형님은 한참 동생뻘인 우리 둘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는데 그 기억 때문인지 지금도 연세대 출신들에게 나는 호감을 느끼고 있다. 어쨌든 그 형님 때문에 입 구(口) 자의 구조로 된, 마당이 넓은 민박집을 수월하게 얻고 짐을 풀면서 집주인 가족들과 인사할 기회가 생겼다. 주인 할머니 외에 사촌 사이로 보이는 자매가 둘 있었는데 한 명은 서울에서 시골 할머니 집에 방학을 보내러 내려온 경복여상 3학년 여학생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그곳에서 할머니와 함께 사는 듯한 스물한두 살가량의 처녀였다. 그네들은 틈만 나면 우리와 잡담을 나누었는데 수줍음이 많던 친구 녀석과는 달리 나는 용감하게도 이런저런 말을 걸어 친숙해지기를 시도했던 것 같다.
바닷가로 녀석과 산책하러 갔다가 늦은 저녁이 되어 다시 민박집으로 돌아왔는데 넓은 마당 귀퉁이의 수돗가에서 젊은 여성이 손바닥만 한 비키니 차림으로 샤워를 하고 있었다. 남자 친구로 보이는 이는 술에 취한 상태로 우리가 묵은 옆방에 짐을 풀고 있었다. 알고 보니 우리가 얻은 방은 민박을 놓기 위해 시골집의 큰방을 베니어합판으로 대충 두 개로 나눈 허술하기 짝이 없는 방이었다.
당시의 민박집은 별도의 세면 시설이 없었던 관계로 마당의 수돗가에서 그녀는 샤워 겸해서 씻고 있었던 것인데 아슬아슬한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채로 큰 물통에 담긴 물을 바가지로 온몸에 퍼붓는 정도였다. 해수욕장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으로 나신(裸身)에 가까운 여성의 그 모습을 금방 잊어버리고 둘은 저녁밥을 지어먹고 자리에 누웠다. 내 머릿속에는 좋은 시상(詩想)을 기원했고 녀석은 김창훈(산울림 구성원)을 압도하는 악상(樂想)을 꿈꾸었을 것이다.
해변의 밤,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와 함께 시원한 바람은 불어왔고 바다 냄새와 해조음은 감미롭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옆방에서 악다구니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까 세면장에서 봤던 그 처녀와 남자가 싸우는 모양인데 “철썩!”하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이 씨발놈아, 와 때리노? 아직 아버지한테도 뺨 안 맞아봤다!”라는 소프라노 소리가 들리고 또 “철썩!”하는 뺨 때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둘이서 싸우면서 주고받는 대화 내용을 들어 짐작해보니 남자는 미혼의 택시 운전사이고 여자는 그의 애인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남자는 술버릇이 안 좋아 술만 마시면 여자에게 손찌검하는 그런 부류의 인간인 것 같았다. 급기야 민박하던 사람들과 주인 가족 모두가 그들의 싸움을 생중계 방송처럼 청취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장시간 버스를 탔었고, 해변을 싸돌아다니는 바람에 피곤했는데 그들의 싸움으로 인해 친구와 나의 잠은 완전히 달아나버렸다.
30분가량 지났을까? 싸우다 지쳤는지, 싸움 소리를 듣다가 지쳤는지, 모두 잠이 들었고 사방이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잠을 이루려고 하니 또 문제가 생겼다. 세상이 어둠만큼 고요한 가운데 그들 둘이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벽을 타고 우리 방에만 들어와 친구와 나의 귓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희야, 사랑한데이. 나는 니 없으면 못 산데이!”
그러면서 “쪽! 쪽! ……쯔읍!” 하는 소리와 함께 남녀의 거친 신음과 숨소리가 계속해서 벽을 타고 들려왔다(아이고, 이렇게 표현하려니 민망하기 짝이 없다). 친구 녀석과 나는 요즘 용어로 '라이브 포르노 생중계'를 들으면서 진하에서의 첫날밤을 보낸 것이다.
다음날 아침밥을 지어먹고 녀석과 나는 민박집의 마루에 앉았다. 옆자리에는 예의 그 자매 둘도 앉게 되었다. 민박집 방 밖의 장소에서는 앉을 곳이라고는 그곳밖에 없었으니까. 어젯밤에 지지고 볶던 옆방의 남녀가 짐을 싼 후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 대문 밖으로 나가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자매 중 언니인 처녀가 입을 열었다.
“미쳤다. 요새도 여자를 쌔리는(때리는) 넘이 있나!”
곧이어 동생이 말했다.
“어젯밤 그렇게도 많이 두드려 맞더니만 저 여자도 미친 거 아냐?”
나는 친구랑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많이 끓인 바람에 여분으로 한 잔이 남았다. 서울에서 왔다는 고3 여학생에게 권했는데 뜻밖에 미소를 지으며 받아주어서 기분이 마냥 좋았다. 핫하, 눈빛으로 느낌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지금도 그렇다,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몸에 밴 여성이 아무리 서울말 연습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금방 그 출신지를 알아차릴 수 있다. 부자연스러움까지 고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워서 감미롭게까지 느껴지는 정통 서울말을 사용하는 또래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니 마치 구름 위에 뜬 기분이었다. 언니는 그 모습을 보고 씩 웃고 있었다. 아마 순진해 보이는 어린아이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겠지.
글을 쓰면서 나 자신, 기억력에 대해서는 천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나보다 더 기억력이 좋은 이가 있다. 동행했던 친구 녀석이다. 십 년 전에 연락이 끊겼다가 최근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내가 그해 여름 진하해수욕장에서의 일을 기억하는 것은 여기까지 인데 녀석은 내 기억의 세 배쯤을 더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연상의 그 여학생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며칠 후 짐을 싸고돌아올 때 어떤 표정이었는지를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바다와는 전혀 관계없는, 교회 찬송가의 가사 구절 같은 ‘빛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노랫말을 내가 만들게 되었고 친구는 곡을 아예 만들지 않았다. 그전에 곡을 만들었거나 이후에도 곡을 만든 적은 없으니까.
참고로, 우리가 여름을 그렇게 보내고 난 뒤, 몇 달 후, 늦은 가을에 열린 제2회 대학 가요제에서는 부산대학교의 ‘썰물’이라는 중창 팀이 부른 ‘밀려오는 파도 소리에’라는 노래가 그랑프리 대상을 차지했다. 친구와 나는 이런 노래를 만들기 위해 그곳에 간 건데 라이브 포르노 중계와 정통 서울 말씨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바람에 여행의 본래 목적을 잊어버린 것이다. 본말전도(本末顚倒)가 이런 경우일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전국 방방곡곡에 가라오케나 노래방이라는 '노래 발표 무대'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대학가요제에 출전하지 못한 녀석과 나는 약속이나 한 듯이 조영남이 부른 일사후퇴 때 피난 내려왔던 내용의 ‘고향 충청도’를 화음과 고함을 섞어가며 절규하는 톤으로 불러댔을 뿐이었다.
14. 실연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그리고 내가 원하던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캠퍼스의 잔디는 푸르고 하늘은 맑았다. 새로 산 양복을 입고 교문에 들어서니 그 순간 세상은 모든 게 내 것일 것 같았다. 그 기분은 언제까지 지속하였을까? 한 달 정도 시간이 지나니 대학생활에의 회의가 생겨났다. 학과. 동문회. 동아리 등에서 열어준 잦은 환영회와 회식은 나를 술독으로 빠뜨려 무절제한 방탕 생활로 이끌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해 4월 말부터 비상계엄이 확대되는 바람에 정국은 급랭했고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라며 TV 뉴스에 나오던 대머리 군인이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건 확실하게 보였다. 교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카메라를 들고 구석구석 포진하기 시작했다. 이후 5월이 되자 광주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났다는 소문이 꼬리를 이어 계속되었다. 캠퍼스 고층 건물마다 '군부독재 타도하자!'는 전단이 바람에 날렸고 건물 벽의 대자보에는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惡)의 편이다'는 글귀가 분노의 감성을 자극했다.
그러는 사이에 캠퍼스에서 고교 동창 녀석을 만났다.
"혁, 어떻게 지내니?"
"그냥 살고 있어. 너는?"
"이렇게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지 말고 내가 나가는 모임에 같이 가자. 여러 학교 학생들이 만든 영어독서 토론회 모임이다."
4월부터 교문 앞에 무장한 군인들과 탱크가 늘어서더니 무기한 휴강이 계속되었다. 술집을 찾지 않고 뭔가 공부할 수 있는 모임이려니 하여 몇 번 참석한 모임에서 내 마음을 흔들게 했던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나를 그곳에 데려간 친구 녀석과 같은 교회에 다니는 지인인 모양이었다. 모임 때마다 누군가가 유심히 나를 쳐다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녀석이 그녀가 내게 관심이 있는 것 같다며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모임의 발표회에서 유달리 지성미와 여성미를 발산하는 그녀에게 나 역시 관심이 컸던 터였다.
다리 저는 장애인이 앞에 걸어가면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앞질러 가지 못하던, 길가의 걸인을 만나면 버스비를 빼고 가진 돈 모두를 주고 나서야 돌아서던, 아프리카의 굶주리는 아이들 사진을 보며 울음을 터트리던 그녀 모습은 목표 없이 살아가는 나에게는 밤하늘에 홀로 빛나는 별과 같은 신성한 그 무엇이었다. 당시 그녀는 신이 내게 주신 그 모든 가치, 그 모든 아름다움의 정점에 서 있었고, 당연히 그 결과는 무위(無爲)였다고,라고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러한 날들이 두 달 남짓 되었을까? 모임이 있는 날에는 함께 많은 시간을 가졌던 그녀가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뭔가 심상찮은 느낌에 친구 녀석을 닦달해보니 이유는 딴 곳에 있었다. 유명 대형교회 목사의 무남독녀인 그녀는 이단 종교(?) 신자인 내가 못마땅하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성경 및 문학에 박식한 학문적인 청년으로만 알았는데 천주교 신자여서 실망이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 개종(改宗)시킬 요량으로 계속 만나왔는데 도저히 손댈 수가 없을 정도의 모태신앙과 독불장군식의 현학(衒學)을 갖추고 있어서 이제는 그만 결별 하노라 전했다. 독서회 회합이 끝난 후 뒤풀이로 이루어지는 회식자리에서 나를 지켜보니 소주 두세 병은 예사로 마시고 게다가 담배까지 피우는 모습을 목격하니 사탄(satan)의 종자(從者) 임을 재차 확인했다는 그녀의 말을 들은 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탈레스는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고 단언했다. 그리스의 철인들은 스스로 변화하거나 운동하는 것은 생명 자체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변함'의 본질을 주변의 전언을 토대로 나름대로 정리해보니 이랬다.
그녀는 독서연구회에서 알게 된 ‘나’란 인간을 전도(傳導)해서 아버지의 교회로 데려갈 생각을 했는데 여러 차례 만나다 보니 도저히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여질 위인이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 대개의 사람은 예수나 불 타를 막연하게 신비로운 존재로 생각하는데, 당시 나는 종교의 창시자라고 일컫는 예수ㆍ불타ㆍ모하메드를 신비한 인물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서 살았던 인간적인 존재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인간으로서 지닌 한계를 어떻게 인식했으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려고 하였는지를 항상 생각했다. 그녀로서는 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찮은 불타와 같은 레벨로 생각하는 점, 술. 담배를 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청교도적인 면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자유분방함에 당황했으리라. 그래서 자연스레 ‘사이’를 정리해야겠다는 결심을 정했고, 메신저로서 또 친구 녀석에게 연락한 것이다.
스무 살의 나에게 그 여파는 견딜 수 없으리만큼 혹독했다. 이유 없이 몸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나는 식음 전폐 수준이 되어 방바닥에 드러눕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친구들은 내가 상사병(相思病)에 걸린 것이라고 단언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그녀를 만나 설득하면 이해를 구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느 날 등굣길의 발길을 돌려 그녀가 다니는 학교 방향의 버스를 탔다. 해당 단과대학의 게시판에서 수업시간표를 확인하고 기다렸으나 만나지 못했다. 온종일 아침부터 이 교실 저 교실 앞을 서성거리다 저녁 무렵에야 도서관 입구에서 겨우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다방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함께 커피를 마셨으나 이야기는 서로 겉돌고 있었다. 차갑고 냉랭한 분위기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자리를 옮긴 칼국수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단념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아마, 그럴 수 있지요.”
“연락드려도 될까요? 전화번호를 좀…….”
“아니요. 제가 전화를 드리지요. 전화번호를 주세요.”
이후 몇 달이 지난 후에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복학생 선배에게 고민 어린 상담을 해보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어리석기 짝이 없구만. 싫다는데 찾아간 것부터가 이상한 거야. 버스가 떠났는데 자네 혼자서만 고통스럽게 손을 흔들고 있는 거지.”
결론은 분명했다. 해결책은 그녀에 관한 모든 기억을 단칼로 무를 자르듯 정리하는 것이었는데 그게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2년 후 입대하는 그 날까지 괴로움은 계속되었다. 차라리 그녀가 피카소를 좋아하는 모더니스트, 르누아르를 좋아하는 로맨티시스트, 하는 식으로 구획된 삶을 살고 있고, 그렇지 않은 내가 싫다고 말했다면 그토록 너절한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누구라도 만일 자신이 꿈꾸는 어떤 가능성이 자신의 의사와 반해서 배반당할 것이라면 그런 가능성은 차라리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부터 아예 지워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번연히 그녀에게 배반당할 줄 알면서도 실낱같을 가능성을 꿈꾸며 살아야 한다면 그런 삶이야말로 지옥에 불과할 것이다.
결국, 나는 그녀에 대한 감각들을 이후에도 고스란히 자신의 내부에 남겨둔 채 어떤 관념 속에서만 그녀와 헤어지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당시에 나는 사람이 만났다가 헤어진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 되는가를 비로소 알게 된 시절이었다.
14. 모든 것은 변한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나날이 늘어가기만 했다. 사랑과 운명이라는 단어들은 장난스러운 언어유희로 보였다. 인고의 정신과 인문학도로서의 자만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뜨거운 가슴은 어두운 밤과 차가운 바람에도 식을 줄 몰랐다. 그리움의 감정은 여전히 몸속 깊은 곳으로부터 배어 나오고 있었다.
“달면 불길처럼 뜨거워지고, 식으면 얼음처럼 차가워진다. 가만히 있으면 연못처럼 고요해지고, 움직이면 하늘까지 뛰어오른다. 사나운 말처럼 가만히 매어져 있지 않은 것, 이것은 무엇일까?
이 글은 중국 춘추시대 철학자 장자가 쓴 <장자>에 나온다.
답은 “사람의 마음”이다. 장자는 연이어 말했다.
“인간의 마음처럼 간사한 것도 없다. 오늘 좋다가도 내일은 싫고, 오늘 기쁘다가도 내일은 우울하고, 오늘 사랑하다가도 내일은 미워하고, 오늘 선(善)을 베풀다가도 내일은 악(惡)을 저지르고, 오늘 웃다가도 내일은 우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스무 살 그 시절, 야한 여자를 지독히도 싫어하는 친구가 있었다. 녀석은 야하게 화장한 여자나, 손톱에 새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여자를 보면 기겁할 정도로 질색했다. 반면, 화장도 하지 않고 순수하게 다니는 여자를 보면 호감을 느꼈다. 그래서 친구는 자신과 결혼할 여자는 절대로 화장을 하지 않는 수수한 여자라야 된다고 늘 생각하고 지냈다.
친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교회에 다녔는데,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어느 날인가부터 화장도 하지 않고 머리도 수수하게 하고 다니는 한 아가씨를 알게 되었다. 이러한 타입의 여자를 좋아하던 그는 그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아가씨의 성격이 수수해서 차림새도 수수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친구는 그 아가씨에게 반했고, 10년 동안 끈질기게 구혼을 한 결과 결혼 승낙을 얻어내서 마침내 자신의 이상형인 그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건은 결혼하고부터 시작되었다. 이상형이라고 생각했던 부인은 매우 게을렀다. 아침에도 10시가 넘어서야 일어났고, 밖에 나가지 않는 날에는 온종일 얼굴에 물 한 방울도 대지를 않았으며, 당연히 머리도 감지 않고 빗지도 않았다. 옷도 아무것이나 입고 자주 갈아입지도 않았다. 부인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그때야 그는 깨달았다. 부인이 처녀 시절에 수수하게 하고 다녔던 것은 성격이 수수해서가 아니라, 바로 게을러서 꾸미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틈이 날 때마다 내게 말했다.
"사랑? 웃기지 마라. 모든 것은 헛거다!"
나는 잽싸게 대답했다.
"모든 것은 변하는 거다. 너는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야!"
어쨌든 그는 부인의 게으름에 질려 버렸다. 스무 살 때 야한 여자에게 질렸던 그가 이후 화장도 하지 않은 수수한 여자를 보면 오히려 질려 버렸고, 오히려 야한 여자를 동경하는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20대 초반, 그 시절 나 역시 짙은 화장을 한 젊은 여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후 세월이 흐르니 짙은 화장을 한 여자를 무조건 나쁘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살아보니 화장도 부지런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수한 것을 좋아해서 화장하지 않는 여자도 있지만, 게을러서 화장하지 않는 여자도 상상외로 많다는 사실을, 화장한 여자를 싫어하는 젊은 남자들은 알아야 한다.
아름다움이란 말할 수 없는 주관적 본능이나 직관에 있는 것이지 말할 수 있는 객관적 경험이나 합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것이 더 자극적이고 효과적인지는 상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쨌든 이제는 남녀 간에 선택하는 쪽이나 선택당하는 쪽, 유혹하는 쪽이나 유혹당하는 쪽이 가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마음은 자연의 변화만큼이나 늘 변화하며, 그러므로 세상 모든 것에는 절대적인 것이란 없다. 따라서 순수함이 불결함으로 변할 때도 있고, 미가 추함으로 변할 때도 있으며, 미소가 간사함으로 변할 때도 있고, 침묵이 음흉(陰凶)으로 변할 때도 있으며, 진실이 거짓으로 변할 때도 있는 게 아닐까.
모든 것은 변한다. 만나면 헤어지고, 태어나면 반드시 죽고, 젊음은 늙어가고, 부귀는 빈천으로 돌아가며, 모인 것은 반드시 흩어지게 마련이다. 변해가는 실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집착하거나 붙잡으면 반드시 괴로움이 뒤따라오게 된다. 우리가 늘 괴로운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하는데 붙잡고 집착하고 욕심을 부리고, 자신의 마음대로 세상이 만들길 바라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힘든 존재일 뿐이다. 사랑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변한다. 집착하면 아름다운 마음이 없어지고 미운 마음이 생길 수 있다. 모든 것은 시간 속에 변하고 영원한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나의 마음도 변하는데 어찌 모든 것이 변하지 않길 바라겠는가?
그런 것이었다. 인간의 사랑이란 것은 반드시 자줏빛 망토를 휘날리며 백마를 타고 저 먼 데서 오는 건 아니었다. 변하고 또 변하는 것이었는데 철없던 스무 살의 우리는 애써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것은 봄날이 오기 전에 봄날보다 먼저 두꺼운 거름을 밀치고 돋아나는 단단하고 뾰쪽한 마늘 싹처럼 불현듯 돋아나 순식간에 무럭무럭 자라는 신기한 그 무엇이었는데도 그 시절 나는 그녀를 잊지 못하고 '사랑'이란 추상적인 관념 속에서만 계속 붙잡고 있었다.
15. 가을 동화 원본
내가 좋아하는 유명 소설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과 성을 같은 것으로 혼동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불행한 미신이다. 프로이트 같은 사람들의 과장과 번식기가 아닌데도 사철 성을 즐기는 인간의 호색 근성이 야합하여 만들어낸 편의적 미신. 아마도 그 강력한 미신에 대한 지성의 마지막 저항이 지드의 <좁은 문> 일 것이다.'
사랑(또는 性)을 자동차 운전에 비유한 사라 러딕의 말은 타당하다. 자동차에 오르기 전에 대부분 보통 사람은 여러 법규의 정당함이나 자기 생명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 번 운전석에 오르고 보면 그들은 어린애 같은 흥분과 쾌감에 그 모든 것을 망각하고야 만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에 빠지기 전의 우리는 부도덕한 관계나 무모한 사랑의 위험을 잘 알고 있다. 또한, 그로 인해 맞이하게 되는 삶에 가해질 위해를 피하려고 다짐에 각오를 더하기 일쑤다. 그러나 한 번 사랑에 빠져 버리면 그 장본인은 이내 비정한 쾌감과 잔인한 위기에 휘몰려 그 모든 것을 잊고 만다.
저어 휘파람을 부세요. 네? 그러면 제가 당신께로 가겠어요.
저어 휘파람을 부세요. 네? 그러면 제가 당신께로 가겠어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모든 사람이
뭐라고 절 꾸짖고 야단들을 해도 저는 무섭지 않아요.
저어 휘파람을 부세요. 네? 그러면 제가 당신께로 가겠어요.
하지만, 오실 땐 부디 조심하세요.
그 싸리나무 문을 열 때까진 오시면 안 돼요.
그때까지 가만히 울타리 옆에 숨었다가 시치밀 딱 떼시고 들어오세요.
예배당에서나 저자에서 만나더라도 못 보신 척하시고 지나가세요.
하지만, 그 검은 당신의 눈으로 살짝 한번 눈짓만 하세요.
안 보신 척하시면서 보고 가세요.
안 보신 척하시면서 보고 가세요.
언제든 저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세요.
이따금 조금씩은 칭찬하셔도 괜찮으시지만…….
하지만, 딴 여자분하곤 절대로 놀아서는 안 돼요.
당신을 빼앗기면 전 못 살아요, 당신을 빼앗기면 전 못 살아요.
위의 작품은 영국의 시인 로버트 번즈의 시 <휘파람을 부세요. 네? 그러면 제가 당신께로 가겠어요>이다. 가만히 읽노라면 막 첫사랑에 눈이 뜬 어느 소녀의 순결한 속삭임이 애틋하게 느껴진다.
소녀는 휘파람 소리만 들려와도 벌써 임의 목소리임을 알아본다. 그러면 하던 일을 모두 내동댕이치고 그이에게로 달려간다. 주체가 소녀라고 해서 생기는 문제는 아니다. 소년이라도 마찬가지다. 누가 뭐래도, 설사 부모님이 나무라실지라도 정녕 당신만을 사랑하는 나는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랑을 위해서라면 불이고 물이고 가리지 않는 것이 사랑에 눈이 뜬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그들은 이렇게도 말한다. 예배당이나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자기를 만나더라도 그저 살짝 눈웃음만 해 보이고 아는 척은 하지 말라고. 그래도 자기만은 당신의 사랑을 모두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누구를 만나서 자기 얘기가 나오면 몇 마디쯤은 칭찬해 주어도 상관은 없지만, 남들은 자기를 아주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무시한다 해도 당신만이 알아주신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다고 독백한다. 자신의 사랑은 오로지 당신만의 것이고, 당신이 있으므로 해서 자신은 무한히 행복하다고 말한다. 자기의 온갖 것이 모두 당신의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나는 남녀 간의 사랑이 영원히 지속할 것이라는 믿음들에 지금도 회의(懷疑)적이다.
이야기의 순서대로 내가 군대에서 있었던 중에 일어난 사건들을 계속해야겠다.
군 생활을 2년 이상 같은 내무반에서 나와 함께 한 후임병 한재희는 나보다 두 달 늦게 입대했다. 속초에서 전문대학을 다니다 입대했다는 그는 공교롭게도 나와 동갑이었다. 그가 자대에 전입해 오던 날은 매우 추운 겨울날이었다. 그날 내가 한재희에게 더플 백을 풀어주며 부모님이 그립지 않으냐고 물으니 예상과는 달리 ‘딸내미’가 애타게 보고 싶다고 했다. 딸내미? 결혼하여 낳은 딸이 있냐고 물으니 여자 친구 즉 애인이라고 했다. 그와 애인과의 사연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았다.
한재희의 아버지에게는 둘도 없는 죽마고우가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 부부가 10년 전 교통사고로 동시에 세상을 떠났다. 한재희의 아버지는 졸지에 고아가 된 친구의 어린 딸을 양녀로 입적시켜 재희와 함께 키웠다. 둘은 한 살 나이 차이로 호적상의 오누이로 함께 자랐지만, 사춘기로 접어들 무렵 둘은 서로에게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되었다. 재희는, 호적상 동생이자 타인인, 아버지 친구의 딸과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가 고교를 졸업하는 시기는 자연스레 둘을 갈라놓는 계기가 되었다. 지방에서 수재로 불리던 그는 호랑이로 상징되는 서울의 K대에 입학했고 그녀는 1년 뒤 속초의 모 전문대학에 입학했다. 그들이 만나지 못했던 1년 동안의 시간은 서로에게 고통과 번민의 나날이었다. 사랑하는 그녀와 가까운 곳에서 생활해야겠다는 생각은 서울에서의 학업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말았다. 결국, 그는 부모 몰래 K대를 자퇴하고 그녀가 다니고 있는 속초의 전문대로 편입했다. 재희의 부모는 그런 그를 만류하고 타이르고 야단쳤으나 아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아들의 행동에 실망한 그의 부모님은 그의 감정적인 행동을 정리할 시간을 벌기 위해 그에게 입대를 강권했다. 재희는 둘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부모님에게 할 수 있는 모든 항의를 했다지만, 입영통지서 앞에서 무력했다. 결론적으로 어쩔 수 없이 입대했다고 하지만 그의 뇌리에는 항상 그녀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3년이라는 짧지 않은 군 복무 시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희가 내게 보여준 그녀의 편지에는 흔히들 사용하는 ‘재희 오빠’ 또는 ‘재희야’, ‘재희 씨’ 등의 호칭이 아닌 ‘재희 분’이라는 깍듯한 존칭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녀가 보낸 마지막 편지였다. 그가 육군훈련소에서 훈련 중일 때 도착한 편지였다. 그는 내게 다음의 편지를 보여주며 좌절하고 또 좌절해했다.
'간절하고 진실히 내가 사랑하는 재희 분……. 저는 이제 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으로 나갑니다. 재희 분 댁도 떠납니다. 재희 분도 이제는 입대했으니 부디 저를 잊고 건강히 제대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아아, 아프게 내가 사랑하는 재희 분, 이제부터는 저로 인해 생긴 모든 고통을 버리시고 행복하시기만을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그들의 러브스토리 마지막 부분이다. 재희는 그녀가 그에게 몸과 마음을 바쳤기에 힘들게 공부하여 들어간 대학을 자퇴하고 부모와의 인연을 끊는 등 그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쳤노라고 한탄했다. 나는 재희로부터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별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못했다. 뭘 알아야 면장(面墻)을 하는 건데 그 부분 나 자신이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 아는 것은 백지에 가까웠던 탓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대하는 그 날, 대부분 남자가 군대의 모든 것을 그곳에 반납하듯이 나도 한재희라는 이름의 그 후임과 그에 대한 모든 기억을 국방부에 반납하기로 했다. 사랑에 집착하여 모든 것을 외면한 채 '사랑에 대한 기억'하나를 안고 안타깝게 살아가는 그가 못마땅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한 여자를 사랑한 한 남자의 순정이 부러웠던 이유가 더 클 것이다. 당시 나에게는 그만한 순정마저 없었으므로. 무슨 이유였는지 제대 후 J와 나는 서로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생각해보니 그에게 매사 냉정하게 대했던 나에게 그가 서운했을 것이라는 후회도 생긴다. 요즘처럼 휴대전화기나 SNS가 있던 시대도 아니었기도 하지만, 어쩌면 당시 매사 원리원칙과 인습에 충실한 내가 그에게는 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도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16. 결핍 없는 곳에서 목 놓아 울다
시간이 날 때마다 K 선생님의 글을 즐겨 읽곤 한다. 사물의 팩트(사실)를 바라볼 때 지엽적인 부분이나 감정적으로 흐르기에 십상인 선입관에 휘둘리지 않고 핵심을 직시한 후에 주변을 생각하는 부분은 모두가 본받아야 할 점이다.
최근에 블로그에서 읽은 선생님의 재미있는 글은 ‘그리팅맨(greeting man), 미안!’이라는 글이었다. 조각가 유영호 씨가 만든 그 조각품은 발가벗은 남자가 인사를 하기 위해 허리를 15도 숙여 인사하는 장면인데, 이 작품의 감상 포인트는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존중한다는 뜻을 음미해보는 것이고 타인을 배려하는 겸허한 태도라는 설명을 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 사람이 작가의 메시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벗은 조각에 달린 남성 심벌(상징)만 유심히 본다는 것이다. 작가가 조각상에 옷을 입힐 경우, 옷 입은 형태의 조각을 만들었다면 이념, 인종, 계급, 종교를 불문하고 인류가 가져야 할 존중과 배려가 눈에 띄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우리나라 남자들의 남근과 정력에 대한 광신적인 집착의 뿌리는 어디서부터 인가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그러다가 군 복무 때 매우 친하게 지내던 두 사람이 생각났다. 한 사람은 유달리 우람한 성기 때문에 고민했고 또 한 사람은 견딜 수 없는 성욕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
지금도 그런 제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1980년도 초반 내가 입대할 때는 <단풍 하사>라는 제도가 있었다. 두 사람은 제대 즈음에 하사가 예정된 이들로 나와 같은 이등병 출신과는 성분이 달랐지만 서로 끌리는 뭔가가 있어 친하게 지냈다. 성대와 중권이. 선량하기 짝이 없었던 두 사람에게도 세상살이는 요지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울 근처의 위성도시에서 공고를 졸업하고 전자제품 부품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다 입대한 영교의 첫인상은 ‘아름다운 청년’이라는 표현이 적합하겠다. 전형적인 서울 말씨에 선량한 눈매를 한 그는 영화배우라고 해도 괜찮을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보다 계급과 짬밥 개월 수가 적은 일병들이 하대해도 애써 무시하며 관계를 유지하려는 평화주의자로 기억하는데 그와 복무 개월 수가 비슷한 이들은 기간병이든 부사관 학교 출신이든 모두가 ‘말 X’라고 그를 지칭했다. 여기서 ‘X'는 남자의 생식기를 한 음절의 단어로 표현한 것으로 국어사전에는 ’ 남성의 성기를 비속하게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실제로 그와 함께 목욕한 적이 있었는데 남근의 크기가 정상인보다 엄지손가락 하나 정도는 더 길었고 굵기 또한 그러했으며 몽둥이의 색깔은 유달리 검어 퉤퉤 해서 별명은 빈말이 아니었다.
솔직함이 화근이었을까? 어느 날, 야간 보초를 서면서 그는 자신의 과거를 고백이라도 하듯이 ‘여성 혐오증’과 같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자연 포경이 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자신의 성기가 또래보다 유달리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의 중학교 3학년 누나가 벽에다 소변보는 자신을 유심히 훔쳐보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 누나와 동네 근처의 포도밭에서 첫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냥 누나가 시키는 데로 응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어린 나이에 동정을 잃은 셈인데 이후로 사흘이 멀다고 하고 그 요구는 계속되었고 그 누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취직하여 동네를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했다. 햐, 내가 놀란 표정을 하며 그를 쳐다보자 그는 말을 이었다.
“얘, 윤 일병, 너는 몰라. 대부분 여자는 너무 밝힌다. 내가 피해도 자꾸 따라다니니, (한숨) 나는 차라리 여자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이후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가 고등학생이 된 후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알게 되어 관계한 또래의 여자들이 여럿 있었던 모양이다. 선량하기 짝이 없고 바른생활의 대명사 같은 그였지만 항상 정에 이끌려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 만든 참사가 아닌가 나름대로 정리해보게 된다. 경기도 시흥에 산다고 했는데 지금도 ‘시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다.
넓적한 얼굴에 눈이 퉁방울 같았던 병철은 경북 영주가 고향으로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주에서 사과 농사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2년제 무슨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입대했다고 했다. 키는 180cm가 넘었고 군살 없는 몸매는 마치 잘 빚어진 조각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성품이 어땠느냐면 '법 없이 살아도 될 사람'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게끔 선량하고 또 어질었다. 그런데 문제는 유달리 성욕이 강해서 치마만 두른 젊은 여자라면 아무에게나 성욕을 느낀다는 점이었다.
선임병들은 나보다 군대 짬밥이 두 달밖에 많지 않은 병철에게 지나치게 호의적이라며 떡이 되도록 나를 구타하곤 했다. 그는 지나치게 과묵한 성격이었고 나 또한 우울했던 시절이었으나 둘은 보초 근무 때마다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우정을 쌓아갔다. 그런 그였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행정반에서 근무하다 알게 된 것인데 병철을 향한 장교들의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았다. 기간병들과는 달리 상병반 출신은 토요일 누군가가 면회를 오면 외박을 보내는 것이 상례였는데 유독 병철에게 면회 오는 아가씨들이 많았다. 작전 장교 윤 대위는 ‘면회 일지’를 펼쳐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 새끼, 저거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면회 때문에 외박을 나가는구먼. 그런데 면회 오는 아가씨들 이름이 모두 다르네. 저 새끼 카사노바 아니야?”
인사 장교가 안 중위가 대답했다.
“상병반은 토요일 면회 때 외박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육군 규정에 그래 되어 있습니다.”
“육군규정이라니? 나발 같은 소리 마시오. 저런 새끼 때문에 대한민국 처녀들 씨가 다 마른다니깐. 앞으론 안 되는 것으로 하시오!”
그날 밤, 달은 푸르고 배는 꾸르륵 또 고팠다. 병철은 그러한 내 심경을 알기나 하는지 이렇게 물어왔다.
“윤 일병, 애인 있나?”
내가 답했다.
“없어. 그런 게 가능할 사람에게 물어봐야지.”
“그렇구나. 그러면 여자 손도 한 번 못 잡아 봤겠네.”
“히히…….”
웃으면서 내가 답했다.
“언젠가는 내게 찾아올 그녀를 위해 묵묵하게 기다려야지.”
그렇게 대답하고 나니 갑자기 그에 대한 여러 풍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궁금증을 풀 기회였다.
“그런데 면회는 누가 그렇게 자주 오는 거야? 약혼이라도 한 거야? 윤 대위는 벼르고 있던데? 그 동네 아가씨들은 헤픈가 봐?”
병철은 내 말을 들으면서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적어도 사병 중에서 나처럼 장교들이 그를 어떻게 보고 있다는 고급 정보를 전하는 이는 없었을 것이다.
겸연쩍어하던 그는 자신을 면회 오는 이 중의 한 명과 어떤 계기로 인하여 꽉 잡힌 상태가 되었는데 앞으로는 아무리 성욕이 발동하더라도 그 여자가 아닌 다른 여자와는 관계하지 않겠다고 했다.
“K 읍의 괜찮은 여관이라고 해서 돈 주고 들어갔는데 그 여관방이라는 것이 큰 방 하나를 베니어합판 같은 것으로 둘로 나눠 놓은 데였어. 둘이서 방에 들어가니 옆방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리더군. 남녀가 약 10명 정도 모여서 고스톱을 치는 듯했지. ‘고!’ 또는 ‘스톱!’ 그리고 ‘피박!’ 등을 외치는 소리가 계속되었으니까 말이야. 방을 두 개로 나누긴 했지만 방음 장치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았어. 내가 미닫이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니 고스톱 치며 떠드는 소리가 그렇게 다 들리더라. 그리고 내가 여자에게 ‘약속처럼 그냥 잠만 잘 것'이라고 밖에서 한 말을 확인하는 말을 재차 하고 걔가 ‘믿겠다’는 대답을 했지.”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지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 만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갑자기 옆방에서 떠들던 소리가 그치고 쥐 죽은 듯 조용해지데. 멀리 영주에서 여기까지 온 것도 나름의 각오를 하고 온 것 아니겠어? 나랑 손만 잡고 자려고 면회 온 것은 아니잖아? 그러나 일이 쉽지 않았어. 약속과 다르지 않으냐며 얘가 반항하는 거야. 힘으로 제압하려는데 이게 불가능한 거야. 왜냐하면, 이 가스나가 고등학교 때 전국체전에도 출전했던 육상 선수였거든.”
“달리기 선수. 그런 거 말이야?”
“아니, 투포환 선수. 투포환은 물론이고 투창도 도(道) 기록을 가지고 있더라. 힘이 너무 세서 내가 도저히 얘를 이길 수 없는 거야.”
병철이 정도라면 남자 중에서도 키가 크고 체격이 우람한 강골 스타일인데 그가 당해낼 수 없는 체력이라면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아시아의 마녀로 불리곤 했던 투포환 선수 백옥자. 아니면 다가올 해에 열리는 L. A 올림픽 국가대표 여자 농구팀의 주장 박찬숙이 떠올랐다. 힘 좋은 여자 장사, 괴력의 포워드, 이런 신문 기사를 자주 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욕정을 삭히고 포기했지. 힘으로 안 되니 도저히 다른 방법은 없는 거잖아. 그런데 쥐 죽은 듯 조용하던 옆방이 다시 시끌시끌해지기 시작하더라. 와글와글……. 모두 화투판을 끝내고 밖으로 나가는 것 같았지. 미닫이문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카랑카랑한 여자 목소리가 들리더구먼. 그 소리 때문이었지. 걔가 마음을 바꿔 먹고 몸을 내어준 것은.”
“옆방에서 너희를 보고 뭐라고 했는데?”
“‘예까지 따라왔으면 가시나가 좀 참지!’ 하는데 그 소리가 우리 둘에게도 들렸어. 움찔하는 것 같은데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지. ”
나는 밤하늘에 큰 소리가 울려 퍼질 정도로 ‘하하’ 웃고 말았다. 얼마든지 병철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임에도 그러지 않았던 여자의 행동은 나름대로 진정성이 존재한다는 그야말로 엉뚱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영교와 병철. 두 사람의 고통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신은 공평하지 않아서 두 사람의 고통을 각자에서 반씩 교환하게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면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 고통을 그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결핍 없는 곳에서 목 놓아 우는 자들에게 물어본다. 그들에겐 사는 방법은 주어진 그 길뿐이지 않은가. 아니면 또 무엇이 기다리는가?
17. 그날로 돌아가자
귀향열차(歸鄕列車)에서
병영兵營을 뒤로하고
귀향열차歸鄕列車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면
경사傾斜 굽이굽이 마다
끝없이 이어진 포도밭과 구릉丘陵.
자인면에서 남부 터미널까지 버스를 타고 온 길
이곳저곳에는
호수湖水가 지천至賤으로 널려 있었다.
푸른 제복의 스무네 살 청년은
기다림이 무엇인지 몰랐고
오로지 어지러움과 피곤함 속에서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간 시절의 기억에 대한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속 깊은 곳 할 말은 가득해도
다가 올 앞으로의 시간에는 무엇인가
또 다른 의미가 오겠지
결국 마지막 별리別離의 순간에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목표目標하고 특정特定하며 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졸릴 때도 행군行軍을 해야 하는 것처럼
무작정 가고 살아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3년의 세월은 가르쳐 주었다.
이윽고 열차가 도착하고
남성현을 지나고 유천을 건널 때
가벼운 신열身熱과 현기증眩氣症을 느끼고 있었다.
덜컹이는 차창車窓에서
사라지는 풍경風景에서
그간 숨기고 있었던 삶의 역겨움이
하나둘씩 흐르고 번지기 시작했다.
열차列車는 정조준正照準되어 고향으로 가고 있는지
사라져 간 표적標的사이
흩어지는 눈물을 뒤로하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회상回想하며
작은 소리를 되뇌어 보는 것이었다.
떠나오기 전 그날로 돌아가자,
그날로 돌아가자.
( 1984. 10. 24 )
위에 적은 글은 제대하는 날 귀향 열차에서 적은 엉터리 시다. 드디어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제대 날짜였다. 3년 전, 내가 처음 자대에 전입한 후 이틀이 지나자 선임병이 한 명이 전역했다. 현역 사병 모두 모여서 부대 정문 앞까지 배웅했는데 그때 그는 울고 있었다. 몇 달 후, 그다음의 전역병도, 또 그다음의 전역병도 같은 모습이었다. 대부분 전역병이 부대 문을 나설 때의 보였던 모습처럼 그날, 나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성하(盛夏), 훈련소에서 쓰러져 타는 갈증으로 들판에 고인 구정물을 마셨던 기억. 훈련소 퇴소식 다리 절던 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던 불쌍한 나의 어머니. 이유 없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뺨을 때리던 신병 시절의 내무반장. 결코 용서 못 할 그놈의 핏발 어린 눈자위와 욕지거리에 담긴 야만과 폭력. 식사 없이 종일 굶은 채 보초 서던 눈 내리던 탄약 창고. 온몸에 멍을 만들던 야전삽과 각목에의 공포, 끊임없이 계속되던 구타와 얼차려. 기약 없이 무너졌던 내 젊은 날의 자유 의지. 그 모든 기억이 한줄기의 눈물로 정리되고 있었다.
입대 전 나는 삶이 역사에 기여하기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3년 동안의 생활은 살기 위해 세상에 나온 것이지 기여하려 태어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선사했다. 어떤 굴욕과 야만과 폭력 속에서도 견디고 살아야 한다는. 역사를 위해 기여해야 한다는 거대 담론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야만 했던가. 모든 병사는 군번과 함께 그 절망을 잠재의식 속에 받고야 만다. 모든 것을 타아(他我)에 맡겨 버린 자아의 절망. 우리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생명까지도 병사는 자기 것으로 가지고 있지 않았겠지. 내가 가진 것은 철저한 무(無)였으리라.
역 대기실에서 각자 고향으로 향하는 열차표를 끊은 뒤 독수리와 나는 포옹을 하고 헤어졌다. 열차에 타서 정해진 자리에 앉으니 카트를 끌며 음료와 과자를 팔던 홍익회 직원 아저씨가 예비군복을 입은 나를 보더니 한마디 했다, "제대하시는 모양이네요. 아, 좋으시겠다."
달리는 차 창 밖으로 저녁 어스름도 이제 막 사라져 갈 때, 옆자리에 앉은 낯선 여자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정말이지 인간의 삶은 감옥 같아요!"
삼 년 동안 나와 함께 복무하던 독수리도 여러 차례 습관처럼 그렇게 말했었다.
그녀의 밑도 끝도 없는 소리에 다소 당황했지만 나는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무모한 선언과도 같은 그 여자의 발언은 어쩌면 황당함, 자체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반응이 없자 그녀는 더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 흘렀던 침묵은 예의와 범절을 제일 덕목으로 삼고 살았던 나 스스로에게도 당혹스러웠다. 그 여자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녀 쪽을 쳐다보면서 나는 혼잣말로 대꾸했다.
"그래요……. 꿈이었나요? 저는 삼 년 동안 감옥보다 더한 곳에서 살았답니다."
차창 밖으로 가로수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세월 동안 기다가 뛰다가 이 세상에서 문득 사라지고 싶은 날들이 많았다. 그 여자도 나처럼 그랬을지도 몰랐다.
이제는 잊어야지. 삼 년 동안 잊지 못했던, 아직도 미련처럼 아주 가느다란 실(絲)로 희미하게 남아있던, 그녀에게 부치지 못할 마지막 편지를 썼다.
그대, 그간 잘 있었는지요. 삼 년이 지나고 말았소. 당신이 잠들어 있던 시간에 나는 그대에게 마음속 편지를 쓰곤 했다오. 그대는 항상 공사다망했었지. 감옥 같은 생활이었지만 나의 하루도 내 나름대로는 온통 사랑과 슬픔으로 공사다망(公私多忙)했었다오. 이제는 안녕히.
열차를 타고 집에 도착한 나는 미친 듯 끝없는 잠에 빠졌다. 그날 밤 너무나 생생한 꿈을 꾸었다. 그리고 꿈꾸는 그 순간에도 끊임없는 의문을 던졌다. 지금 꾸는 서글픈 이 꿈은 현실인가, 아니면 깨어나서 맞이하는 현실이 꿈인가?
18.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3년 만에 복학한 나는 한동안 정신적인 공황 상태를 겪어야만 했다. 많은 이유를 필설(筆舌)로 다 할 수 없을 만치 사고(思考)가 정체되어 도무지 앞길이 보이지 않는 공황 상태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해 전두환 정부의 간선제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는 날로 격해져 갔고 4층 이상의 캠퍼스 건물에는 연일 '군사정권'을 반대하는 전단이 날아다녔다. 전단이 날릴 때마다 숨어있던 사복 경찰들이 그곳을 향해 뛰어갔다. 봄날 하늘을 날아다니는 하얀 전단들을 보며 그 모습이 흡사 떨어지는 하얀 꽃잎 같다고 생각했다. 그해 봄, 서울대의 김세진·이재호 두 학생이 분신자살을 했다.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
나는 마종기 시인의 시를 읊으며 하늘을 향한 학교 뒷산을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복학한 학과에는 여학생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말없이 수업에 들어갔다 나가곤 하는 내게 말 붙이는 이는 없었다.
입대 전, 내가 속했던 비밀 공부 그룹은 중정(中情)의 사찰로 와해한 지 오래되었고 강제 징집되었던 리더인 선배(지금은 S일보사 논설위원으로 근무 중이다)는 제대하여 힘겹게 학교로 돌아왔다. 그는 나를 비롯한 후배들에게 선언했다.
“그간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 공부했지만 내가 파악한 투쟁 방향의 본질은 주체사상이었다.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전두환의 군사독재와 다를 게 뭐가 있을까? 그들의 세습 독재는 남한보다 훨씬 퇴행적이고 악랄하며 반민주적이다. 그들과 달리 남한의 지성들은 스스로 민주주의를 쟁취할 역량이 충분하다. 그간 우리가 추구했던 평등한 세상과 민주주의는 주체사상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자율적으로 공부한 민주주의에 관한 내용은 앞으로 맞을 군사정권이 사라진 민주 사회를 위해 사용하도록 하자. 우리 모임도 이 즈음해서 해체토록 하겠다. 그러나 우리 사이의 인간관계는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친구 녀석이 잔을 던지며 반발했다.
“선배! 그간 당신을 믿고 싸우다 감옥에 가고 퇴학당한 후배 동지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소!”
녀석과 대립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선배의 판단에 공감하고 있었다. 반미 자주화의 목적으로 주체사상이라니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었지만, 일부에서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냉엄한 현실이기도 했다.
어용 교수로 지탄받던 군 미필자인 30대 중반의 지도교수는 눈을 부라리며 “쓸데없는 짓을 하면 용납하지 않겠다.”는 말로 매일 엄포를 놓고 있었다. 군사 정권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기생충,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다름 아니었다.
장학금을 받아서 집안의 생계를 도우려는 복학생 중 일부는 그에게 홍등가(紅燈街)의 술과 성 접대를 제공하여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다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취업 준비를 위해 도서관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으면 핸드 마이크를 들고 도서관 열람실에 뛰어든 학생회 후배들의 흥분된 목소리가 조용한 공간의 적막을 깨뜨리곤 했다.
“민주 학우 여러분! 전국 곳곳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외침들이 가열합니다. 도서관에 숨어 있는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피 흘리는 민중들과 동지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니 고교 후배 녀석이 빨간 띠를 머리에 두르고 절규하듯 외치고 있었다. 학교 정문 앞에는 학교 밖으로 진출하는 학생 시위대를 막기 위해 경찰의 장갑차가 매시간 최루탄을 쏘아 올리고 있었다.
복잡한 심경에서 고골리의 <외투>를 다시 읽었다. 여전한 감동이었다.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의 보잘것없는 생애를 이 거장은 무한한 연민과 공감으로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우리는 모두 <외투>에서 나왔다’라고 말한 도스토옙스키의 격찬은 과장이 아님이 분명했다. 자만에 빠진 주지주의, 허영에 찬 의식의 흐름, 호들갑을 떠는 실존, 그들은 모두 헛된 바벨탑을 쌓아가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식자들은 현대라는 세기가 마치 인류사의 한 이변이라도 되는 것처럼 과장하면서, 오직 그들만이 선택된 인간인 것처럼 선량한 민중으로부터, 대지와 생명에서 멀리 떨어진 허공에다 탑을 쌓고 있지만 알고 보면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얄팍한 생존 술일 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이크를 들고 외치는 그 친구나 그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자, 모두 민주주의라는 핑계로 자신의 영달을 구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자신의 기발한 상상력이나 엉뚱한 속단, 또는 온전히 허풍으로만 이루어진 그들만의 상형문자를 평범한 학생, 그리고 민중들이 해독하지 못한다고 온갖 조롱과 야유를 퍼붓고 있었다. 하지만, 기실 내부적으로 민주적이지 못한 그들이야말로 자신이 그토록 비판한 부조리나 소외감 ㆍ 독선 ㆍ 독재 같은 것에 미쳐 죽거나 종국에는 무너져 내릴 그 바벨탑과 더불어 땅에 떨어져 묻히지 않으면 안 될 것임은 필연적이었다.
그런 혼돈스러운 심경을 정리하기 위해 틈만 나면 시를 적기 시작했다. 당시(1985년) 군사 정권에 대한 분노,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에 대한 의문 등이 주된 내용이었다. 내가 쓴 '엉터리 시'를 누군가가 많이 잃어주었으면 좋겠다는 객기(客氣)에서 몇 편의 시를 완성하여 학교 신문사에 투고했다. 그 '엉터리 시'의 내용은 군부대의 바리케이드와 철문을 형상화하여 그것이 자신의 사고(思考)를 억압하는 '벽'으로 상정하고 그리운 '누군가'를 '당신'이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푸른 제복을 입은 청년의 좌절된 의지를 나름대로의 서정적인 운문으로 정리한 것이었다.
그런데 학보사에 기고(寄稿)한 지가 한 달이 지났지만 학교 신문에 시는 실리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나는 대학신문사를 찾아가서 원고를 회수하기로 했다. 그런데 학보사에서 만난 담당 기자는 같은 학과(學科) 같은 학년의 후배 여학생이었다. 수업시간마다 만나는 사이였으므로 통성명을 할 필요는 없었다. 학교 뒤쪽의 하숙촌으로 통하는 방향에 '개구멍'이라고 불리는 작은 문이 있었고 그 문 옆의 남루한 슬레이트 집에서 그 후배가 자취하고 있었는데, 저녁 무렵 그곳을 지나치면서 그녀가 근처의 구멍가게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그 구멍가게에서 친구와 막걸리를 마시다가 마침 부식(副食)을 사러 온 그녀와 합석한 적이 있었다. 김세진·이재호 두 학생이 분신자살한 다음날이었다. 막걸리가 두 잔 정도 들어가자 그녀는 내게 탄식하듯 말했다.
“선배님, 우리나라에서 이젠 최소한의 민주주의마저 죽었어요!”
한 시간 째 소주에 막걸리를 탄 ‘막소’를 마시던 나는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대답했다.
“후배님, 막소 때문에 나도 죽었소!”
그 말이 끝나자 말자 그녀가 ‘푸핫!!’하고 웃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입속의 막걸리가 사방으로 튀어 단벌이던 내 양복 상의가 엉망이 되었던 기억도 있다.
그 후배에게 학보에 나의 시가 실리지 않은 이유를 물으며 원고를 되돌려 줄 것을 요구했다. 후배가 찾아온 나의 원고는 이리저리 빨간 색연필로 난도질이 되어있었다. 학교 신문사를 총괄하는, 문학평론가로도 유명한 국문과 교수가 당시 학보 담당교수의 검열을 고려해 이곳저곳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표현들을 지적하다 보니 일어난 결과였다. 원고를 되돌려 받고 돌아서는 나에게 후배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무척 드는 시였다……. 안타깝다……. 기자로서 미안한 마음뿐이다……. 황지우의 시를 읽는 기분이었다.……. 대단한 실험 시라고 생각한다……. ' 그런 위로의 변을 들려주었다. 틈만 나면 학과 공부와는 별도로 치열하게 문학 공부를 했다고 자부해왔지만, 나의 과문(寡聞)함 탓이었는지 처음으로 황지우라는 시인의 이름을 들은 날이었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에 모 TV 방송사의 사회부 여기자가 고속도로변에서 취재 중 교통사고로 즉사한 사건이 있었다. 그 참변을 당한 여기자가 위에서 언급한 후배이다. 고향이 거제도였던 후배의 집은 바다가 보이는 어촌의 언덕 동네였는데, 유년 시절부터 하도 바다를 자주 바라보아서 눈 흰자위가 시퍼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세월이 흐른 어느 봄날, 책장을 정리하던 아내가 낡은 앨범을 뒤적거리다 내게 한마디 했다.
"어머, 이 사진, 대학 다닐 때 ○○와 둘이서 찍은 사진이네요. 대학에 갓 입학한 그때 둘 다 객지였든 지라 참 친했어. ○○는 지금쯤 저 세상 좋은 곳에 있어야 할 텐 테."
앨범을 들여다보니 맑은 봄날 벚꽃이 흩날리는 동산에서 이제 막 어른이 된, 고등 학생티가 철철 넘치는 숙녀(淑女) 둘이서 밝은 웃음으로 화장(化粧)한 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이 한 장 있었다. 해마다 봄이 오고 꽃잎이 휘날리면 생각난다.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김리나 기자. 황지우 시인의 '연혁'을 이야기하던 그 후배, 숨차게 달렸던 그녀의 짧은 생애를 아쉬워하며 늦게나마 명복을 빌어본다.
19. 1986년 4월의 학우들
인간이 언어를 발달시키고 그 결과 운율 형식에 의해 자신의 정의(情意)를 표현한 것을 우리는 시(詩)라고 일컬어 왔다. 운율은 일상 세계를 어떤 미묘한 커튼으로 격리해서, 독자의 마음을 ‘눈뜬 황홀’의 상태로 유도하기 때문이다. 시인들이 참지 못할 정의(情意)대로 흔히 노래해 온 것처럼 삶이 하나의 긴 여행이라면 그 구비에서 만났던 사람들 또한 길동무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그러한 동행자들을 '도반(道伴)'이라 부르는 것 같았다. 인생이라는 길을 걸어오면서 만난 그들 중에는 단 한 번의 마주침으로 스쳐 가 버리는 사람이 있었고 , 또는 첫 만남의 서먹함이 사라지기도 전에 헤어져 종국에는 기억에서조차 사라져 버린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갈림길을 빨리 만나 가슴속의 진심을 전달하지 못하고 잃어버린 풋풋한 기억 속의 친구 역시 마음에 남아있다. 뒤돌아 생각해보면 갑자기 마주한 삶의 어려움과 신산함이라는 고통에 시달릴 때 빛처럼 다가오던 지혜의 스승들이야말로 갚지 못한 오랜 부채처럼 내 마음에 남아있다. 그리고 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오랜 시간의 지우개로부터도 살아남아 문득문득 그리워지는, 거칠고 비정한 삶의 길목에서 추억으로 아련하게 기억하게 하는, 지난날의 벗들이 있다.
그해 3월 신학기에 복학하였으나 대부분의 입학 동기들은 졸업한 상태였고 그 공간을 3년 후배들이 채우고 있었다. 원래 남학생들이 주류여서 여학생을 구경하기 어려웠던 우리 과(科)는 3년 전 이상 현상으로 여학생들이 대거 입학했던 연유로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많은 여자 초과 학과(女子超過學科)가 되고 말았다. 1학년을 마치고 해병대에 입대하여 제대하여 복학한 동기 한 놈이 노장(老將) 티를 내며 학급의 어른, 즉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열다섯 명의 복학생들은 대부분 행정고시나 공기업 및 대기업 입사 공부를 하고 있었고, 나는 방향조차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상태였다. 이유는 해체하지 못한 ‘운동 동아리’때문이었다. 학생운동의 방향이 주체사상으로 확인됨에 따라 리더인 선배가 모임의 해체를 결정했지만, 구성원들의 인간관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틈만 나면 모여서 시국을 걱정했고 그 마무리는 부질없는 술자리로 이어졌다. 자연스레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서 비관적인 토로가 난무했고 공부를 해서는 뭐하겠느냐는 회의론 속에 휩싸였기에 취업에 대한 고민은 뒷전에 밀려있었다.
이듬해 3월 서울대에서는 공개 투쟁기 구인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를 결성하고 그 산하에 ‘반전반핵 평화옹호주쟁위원회’를 결성하여 대학 2학년생들의 전방입소 의무 군사교육을 ‘양키 용병 교육’이라고 규정하며 전면적 거부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와중에 서울대 학생인 김세진(자연대 학생회장)과 이재호(반전반핵 평화옹호 투쟁위원장)는 분실 자살하여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전국에 알려지자 학교는 다시 한번 소용돌이 속에 빠지고 전두환 군사정권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교내에 다시 사복 경찰들이 진을 치기 시작했다.
총학생회는 김세진·이재호를 추모하는 의미로 특정일의 모든 수업을 거부한다는 내용의 대자보를 학내 모든 게시판에 붙였다.
문제는 그다음 날에 터졌다. 전날 자신의 수업에 학과 4학년 학생 전원이 수업 거부한 것을 확인한 독신의 40대 여교수는 격분한 채 수업 서두를 열었다.
“여러분들은 유감스럽게도 전원이 어제 나의 수업을 거부했다! 여러분들은 지성인이 아니라 학생의 기본을 모르는 양아치로 보인다. 이제는 내가 수업을 거부하겠다. 나는 폭력 집단의 똘마니들에게 수업할 수 없다!”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그녀는 교실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갑자기 모든 학생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해병대 출신의 동기가 교단으로 나갔다.
“여러분! 폭력 집단의 똘마니라니요! 이거 민주주의에 무식한 어용 교수의 폭력 아닙니까? 이젠 더는 참지 맙시다!”
군중심리란 그런 것이다. 모든 이들이 흥분하게 되면 강경파의 뜻에 따라 나머지는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되는 법이다. 자크 라캉을 흠모한다는 여자 후배 한 명이 불을 붙였다.
“여러분! 우리의 인격을 짓밟는 ○교수는 또 다른 독재의 상징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많이 당해왔습니다. 이제는 참지 말고 싸웁시다!”
마치 사전 연습이라도 한 듯 ‘○○학과 ○교수 타도 비상 임시 위원회’라는 것이 금방 만들어졌다. 당시 우리 학년 학생은 50명이었는데 '○교수를 응징하기 위한 임시 대책 위원'으로 남학생 4명, 여학생 4명이 추대되었다. 누가 추천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습게도 얼떨결에 이 멤버 중에 내 이름이 올려지고 말았다.
8명이 자리를 옮긴 학교 앞 중국집 골방에서 ‘○교수의 사과를 요구하는 성명서’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여학생들은 ○교수의 평소 독선적이고 비민주적인 사례들을 열거하기 시작했고 각각 사법고시와 행정고시를 준비하던 동기 두 녀석은 법률적이고 학구적인 측면에서 교수를 비난하는 논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료들을 취합해서 최종 성명서를 만드는 일은 학과의 문사(文士)로 알려진 내 몫으로 정해져 버렸다.
여학생들은 ○교수의 문제점을 낱낱이 적은 대자보를 교내의 모든 게시판에 올려 그녀를 학교에서 완전히 매장하자는 의견이었지만, 군대를 갔다 온 나름대로 인생의 산전수전을 맛본 복학생들의 견해는 달랐다.
“매장하자고? 그래도 스승인데 지나치지 않은가?”
투쟁 이념의 세례를 받은 냄새가 풀풀 풍기는 후배 여학생들은 ○교수에게 그간 받은 감정의 상처가 컸는지 이날을 기다렸다는 듯 강경 일변도였다.
“선배님들이 어떻게 하든 우리는 싸웁니다! 저는 협박 전화라도 해야겠어요!”
팽팽한 의견이 대립할 경우에는 강경파가 항상 승리하는 법이다. 그런 와중에서 내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고수(高手)들이 바둑을 둘 때는 단 한 집이라도 승리가 확인되면 굳이 대마(大馬)를 잡지 않는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사를 충분히 밝혔으니 ○교수에게도 출구(出口)를 만들어주어야 하겠지. 서로 일방적인 평행선만 주장할 때의 결과를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르봉이 지적한 것처럼 ‘군중(群衆)은 군중 속에서 자기를 잃고 익명화되면 무책임한 행동을 서슴지 않아 왔다. 비이성적인 광기에 빠지기 쉬우며, 거짓인 줄 알면서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군중이란 원래가 이상한 정열에 휘말리면 성난 파도처럼 휩쓸어 갈 수도 있으나, 일단 각자의 얄팍한 타산과 실리(實利)가 그 정열을 제어하게 되면 가을 벌판의 가랑잎처럼 흩어져 가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각자가 요구했던 내용이 앞으로 전개될 득실 계산과 맞물리기 시작하자 강경파 여학생들 모두 꼬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우습게도 취업 공부에 불붙어 있어야 할 대학 4학년 학생들이 성명서 한 장을 만들기 위해 대여섯 차례나 학교 앞 중국집의 담배 연기 자욱한 골방에서 회동해야만 했고 그때마다 전원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만취된 상태로 귀가한 버스를 타야만 했다는 점이다. 내가 작성한 '○교수의 폭언에 대한 ○○학과 학생들의 입장(立場)'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성명서가 인쇄소에서 복사되었고 그 전단이 학과 전 학년에 배포되었다. 얼마 후 고교 선배인 학과 조교 선생의 부름에 따라 학과 사무실에 갔더니 그는 자신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겠노라고 하면서 해결해 볼 테니 며칠간의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학교 총장에게 이 사건이 보고된 상태라고 했다.
이후 ○교수는 슬그머니 수업에 들어와서 학생들을 자극하는 발언을 삼갔고 학생들은 나름대로 예의를 표하기 시작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니까 말이다.
세상살이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반드시 일장일단이 있기 마련이다. 좋은 일은 이 사건 덕분에 학과의 모든 후배 여학생들과 매우 친한 사이가 되었다는 점이고, 나쁜 일은 그때 모였던 우수한 성적의 우등생 6명 모두 졸업하는 날까지 장학금을 한 푼도 못 받는 신세가 되어 집안의 생계를 어렵게 만든 점이다. 그리고 그 모임의 동기 한 명과 여학생 한 명, 두 남녀의 불미스러운 애정행각 스캔들로 인해 졸업 후 모두가 상종하기를 거부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렇지만 가끔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눈이 오는 날 좋아하는 사람이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연출하는 순백(純白)의, 그리고 거의 완전한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그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즐기고 싶은 마음이 그리움으로 솟고, 또 그 아름다움이 이내 스러질 것이란 것 때문에 그 그리움은 더 강렬해지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기대라든가 희망이란 말들과의 까닭 모를 혼동 때문에 환상을 품는다는 것은 종종 낙관적인 삶의 태도로 오인되는 수가 있었다. 무엇이든 아름답고 완전한 것, 가장 귀한 것은 기대했던 현실 속에 있지 않았다. 그 시간이 지난 후 반추해 볼 때 그 귀함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가끔 생각나는 그리운 얼굴들. 모두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20. 엇갈린 인연(因緣)
현자(賢者) 가라사대. ‘여자와 장작불은 자꾸 쑤석 대지 마라. 연애는 깨지고 장작불은 꺼진다.’
사랑은 인간이 시(詩)란 표현을 찾아낸 이래 가장 흔한 주제였고, 애정 편력은 한 시인의 전기(傳記)에서 종종 가장 정체(精彩) 있는 형상으로 나타났다. 근대 이후 구전민요로 전해져 오던 ‘갑돌이와 갑순이’ 이야기는 어쩌면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정(情)의 문화를 중시한, 자신의 내밀한 정서를 상대에게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한국인들만이 만들 수 있었던 숙명적인 비극은 아닐는지.
현자(賢者)는 계속해서 말했다. ‘사랑을 사랑답게 하려면, 첫째 말을 절약하고 다음에는 우정이 깊은 분위기가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말의 역할이 지나치면 사랑은 관념적이 되고 반드시 피로와 혼란이 오게 되고야 만다. 우정이 깊은 분위기도 그 나름의 장점은 있지만 결국에는 사랑을 실속 있게 만드는 연애감정을 해치게 된다.’
4학년이 시작되어 첫 수업을 받는 날이었다. 히스테리와 냉소적임이 특징이었던 독신의 여교수는 새 학기에 입학한 대학원생들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학과 대학원에 수석으로 합격한 학생이 본교 출신이 아니고 지방의 모 국립대학교 학부 출신임을 이야기했다.
“우리 학과 학부생 수준이 이것밖에 안 돼요? 나는 자존심이 상해서 비참함을 넘어 끔찍한 기분이야!”
당시 내 생각은 이랬다. 저 할망구 또 시작하고 있구나……. 40대 후반 노처녀의 히스테리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 것이고, 저 논리대로라면 그 대학원생은 우리 학교 학부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교수로부터 대학원 졸업하는 날까지 테러에 가까운 고문을 받고야 말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며칠이 지난 후 학과의 다른 과목 수업을 받는 날이었다. 그날따라 나의 눈에 유난히 띄는 한 여학생이 뒷자리에 앉아 수업을 받고 있었다. 대단한 미모로 비교적 작은 키였지만 커다란 눈매에 깜찍한 느낌의 개성 있는 화사한 외모가 단번에 나를 사로잡았다. 온몸에 전율이 오는듯한 느낌.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내 마음에서 봄바람이 갑자기 불어옴이 느껴졌다. (앞으로 그녀를 J라고 칭하겠다) J는 이후로도 몇 번 더 수업에 들어왔는데 그 여학생이 누구인지를 동기들에게 물어보았으나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얼마 후 알게 되었지만, 그 여학생은 ○교수가 이야기하던 대학원에 수석으로 입학한 아가씨였다. 어떤 날 J는 단짝인 듯한 후배 여학생 한 명과 함께 수업에 들어오기도 했는데, 얼핏 보기에 그 둘은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둘은 학교 아래 하숙촌에서 단칸방을 얻어 같은 방에서 함께 자취하는 처지였다. J와 같이 자취를 하는 같은 학과 3년 후배 K는 지난해 학교 근처 전철역 옆의 성당에 미사 보러 갔다 서너 번 만난 적이 있고 학과의 우등생으로 소문난 여학생이었는데 그녀 역시 경남 마산에서 유학 온 경우였다. K는 비교적 큰 키에 조용해 보이는 인상이었으나, J는 작은 키에 성격도 괄괄한 것 같아서 어찌 보면, 남자 성격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씩씩해 보였다. 서로 반대되는 성격끼리 만난 것 같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J를 향한 나의 관심은 커져만 갔다. 여간해서 잘 웃지도 않는 그녀의 표정은 차가운 듯하면서도, 지극히 절제된 모습에서 지적인 느낌을 주는 그런 인상이었다. 그렇게 그녀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하여 말을 좀 걸어보았으면 하였지만 그럴 기회가 좀체 주어지지 않았다.
J는 대학원생이었지만 군대를 갔다 온 나보다 학부 학번을 적용하면 2년 후배였고 고향 집이 청정 지역인 지리산 근처인 산청의 한옥이라는 사실도 흥미롭게 느껴졌다. 어쨌든 대학원생에다 여학생이니 더더욱 조심스럽고 어렵게 느껴졌다. 이후 학과 사무실에서도 비록 많은 말을 나누진 못했지만 거의 매주 만났다. 서로 익숙해지긴 했지만 우정 어린 분위기만 유지한 채, 사귈 기회는 끝내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고민 끝에 내가 찾아낸 묘안은 같은 방에서 자취한다는 후배 K에게 중간 가교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매사 과묵하고 신중한 K에게 그런 부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골똘히 생각해보니 내가 J와 사귈 방법은 그것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졸업을 얼마 남기지 않은 4학년이고 취업 공부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 남자 선배가 여자 후배에게 소개를 주선해달라는 말을 꺼낸다는 자체가 창피스러운 일이라 생각하고 아예 포기하는 심정이 되어 버렸다.
5월이 되자 학교는 축제 기간이어서 한 주일 동안 휴강에 들어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대학에서 보내는 축제 기간이었다. 군대 가기 전에는 그 기간 필름이 끊어지도록 술만 들이마셨고 복학해서는 도서관에만 머물러 있었기에 이렇게 지나가는 대학의 마지막 축제 기간이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그 흔한 데이트 한 번 못해보고 대학 생활이 끝나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머리를 식힐 겸해서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있는데 그곳에서 K후배를 만나게 되었다.
“선배님, 뭐 하세요?”
“아, 공부하다가 잠시 쉬고 있어요.”
“선배님, 대학 극장에서 가요제 한다는데 지금 같이 보러 갈래요?”
갑자기 이게 웬 떡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따라 공부가 안 되는 날이기도 했거니와 행여 K 후배와 시간을 보내다 보면 J와 만남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K와 두 시간 동안 나란히 옆자리에 앉아 가요제를 보았고 이후에는 함께 저녁까지 먹었지만, 그 많은 시간 중에서 나는 K 후배에게 차마 그런 부탁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조신하기 짝이 없는 K 후배가 평소 내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게 된 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나는 그해 11월에 원하던 회사의 입사 시험에 응시했고 최종 합격 통지를 받게 되었다. 석 달 동안 연수원에서 신입사원 교육을 받고 졸업식에 참가하기 위한 특별 휴가를 이틀 얻었다. 4학년 2학기 때는 수업이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취업이 확정되어 근무하는 경우에는 수업에 출석한 것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 당시 관례였기 때문이다.
졸업식을 앞둔 전날 밤, 학교 앞의 포장마차에 K 후배와 내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K 후배는 내게 말했다.
“같이 자취하는 J언니도 부를까요?”
K 후배가 공중전화 박스에서 전화를 하니 이윽고 자췻집에서 쪼르르 내려온 J가 K 후배의 옆자리에 앉았다. 세 명이 즐거운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에 K 후배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좋은 회사 합격하신 거 축하해요! 원래 제가 마음에 두고 있던 분을 K가 이렇게 낚아채어 갔군요. 두 분이 결혼할 사이라는 소문이 학과(學科)에 파다하데요. 이렇게 직접 보니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시네요!”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J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와 나는 서로서로 짝사랑하고 있었다는 결론이었다. 갑돌이와 갑순이의 비극은 전근대적인 봉건 사회의 비극이 아니라 인간이 사는 세상이면 항시 적용될 수 있는, 나에게도 적용되는, 엄연한 현실임을 절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 결혼 20주년 기념일이던 날, 아내에게 숨겨두고 있었던 이 이야기를 드디어 가감 없이 풀어놓을 수 있었다. 아내는 내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하하"하고 웃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날, 포장마차에서 J 언니와 당신 두 사람의 눈빛이 동시에 애절하다는 느낌이 유달리 들더니만 다들 이유가 있었네요. 하하, 진작 내게 이야기하지 그랬어? 히히, 내가 둘이 잘 되게 주선해주었을지 어찌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