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소프트웨어 개발자라는 직함을 달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도 몇 년. 전역하고 복학한 뒤, 제대로 된 코딩 경험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흔히들 말하는 군대 빨 하나만 믿고 무턱대고 전과해서 Vim이니 Emacs니 하는 용어를 처음 듣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몇 년 전 내 모습을 생각하면 감개무량하기도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내 모습이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중학교 때부터, 혹은 초등학교 때부터, 혹은 6, 7살 때부터 프로그래밍을 해왔고, 개발이 즐거워 어쩔 줄 몰라하는 천직 개발자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면, 퇴근한 뒤에는 개발이니 프로그래밍이니 하는 것들 하고는 사실상 담을 쌓고 지내는 내 하루하루가 어찌 그리 한심해 보이는지.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될까? 내가 지금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동료들은, 다른 개발자들은 매시매초 새로운 신기술을 익히기 바쁘고,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고, 오픈소스에 기여하고, 세상을 바꿀 아이디어를 연구하는데, 헬스장 가서 운동이나 하고, 전공하고는 아무 관련 없는 책들이나 뒤적거리고, 다른 개발자들이 만든 게임에 열중하는 내 하루하루는 과연 의미가 있는 걸까? 그런 생각들이 제 자존감을 낮게 하고 또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몇 달 전,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지인들과 식사를 하면서 이런 고민거리를 털어놓았던 적이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프로그래밍도 늦게 시작했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막 개발이 즐겁거나 하지는 않아요. 주변에 어떤 친구들은 집에 가서 앱을 만들어서 출시를 하기도 하고, 자격증 준비를 하기도 하고, 같이 모여서 스터디 그룹을 하기도 하는데, 나는 솔직히 그런 것들보다는 다른 것들을 하는 게 훨씬 즐거워요. 내가 개발자로 이렇게 살아갈 수나 있을까요?
지인들의 우려나 걱정, 혹은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훈계를 기대했는데 생각과는 다른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나 역시 그렇다는 지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소프트웨어 개발이나 프로그래밍이 싫다거나 지루한 것은 아니지만, 또 그렇다고 다른 것들보다 더 즐거운 것도 아니라며, 개발자로 일을 하는 이유는 이 일이 그래도 내 적성에 맞고 또 내가 덜 스트레스받고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지 나 스스로 이게 천직이라 생각해서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또 그런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도 들고 기쁘기도 했다.
그 뒤로, 내 고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한다. 분명 쉬는 시간에도 개발을 하고, 공부를 하고, 최신 업계 트렌드를 따라가기 위해 노력한다면 더 좋은 개발자, 더 좋은 전문가가 되기 훨씬 수월할 것이다. 그 부분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다만, 소프트웨어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져가는 시대에, IT 테크놀로지 외의 분야에 대한 이해, 개발자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고 평범한 한 명의 시민으로서 즐기는 여가시간에서 알게 모르게 얻는 생활 속의 경험도 분명 도움이 되는 순간이 있지 않을까? 개발자이기 이전에, 나는 한 명의 인간이다. 나에게 있어서 개발이라는 것은, 내가 그 과정에서 얻는 희열과 기쁨, 성취감이 얼마나 큰지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직업이고 내 밥줄이다. 즉, 나의 삶에는 개발자로 보내는 직장인으로의 삶 외에, 남들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나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쓸 수 있는 여가인으로의 삶이 남아있다. 한번 사는 인생, 굳이 남들이 이렇게 하니까, 남들이 저렇게 하니까라고 비교하면서 초조해하고, 여가시간마저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억지로 하면서 보낼 필요 있을까? You Only Live O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