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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 Jan 11. 2024

불닭볶음면의 효용성

지금 내 표정이 어떤지 안 봐도 비디오다.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고 눈에서는 레이저가 나가고 있을 것이다. 아이의 뒤통수가 참으로 뻔뻔하게 생겼다는 생각을 하며 언제 말 폭탄을 터뜨릴지 기회만 보고 있는 중이다.

세상에, 어떻게 아침에 학교에 가는데 이를 안 닦고 가나. 저러니 여드름이 나을 기미가 없지. 머리를 저렇게 안 감을 거면 차라리 숏컷을 하든지. 머릿속에서 온갖 말들이 떠다니는데 이 혼란을 잠재울 길은 멀어보였다. 기어이 아이에게 소리를 지른다. ‘이 닦으라’고 했을 뿐인데 아이는 이를 닦으면서 운다. 그 모습을 보니 또 화가 치민다. 나이를 이만큼 먹었어도 어떤 때는 이성의 제어보다 말이 나오는 속도가 더 빠르다. 결국 그 말을 뱉고야 말았다. 너 오늘 축구 가지 마.

한바탕 난리가 날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아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 멋쩍어진 나는 “학교 끝나고 바로 와. 엄마랑 얘기 좀 해야겠어”라는 말을 덧붙인다. 한 순간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오랫동안 저질러온 너의 만행에 대한 대가라는 말투다. 아이는 또 순순히 그러겠다고 대답한다. 뭔가 서늘한 것이 가슴을 때리고 지나가는 것 같다.     


축구를 시작하고 중학생이 된 아이는 어느 날부턴가 일어나서 눈곱만 떼고 학교엘 가기 시작했다. 6시에 일어나 한 시간 동안 공부하기로 약속을 했으니 일어나자마자 공부를 하고 아침을 먹고 가방 메고 그냥 나간다. 어느 아침에는 교복을 입고서 공부하는 아이를 목격하기도 했다. 옷이 제멋대로 구겨진 걸 보니 전날 입고 잔 모양이다. 그걸 그대로 입고 나가는 아이를 본 날,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아이 방에 들어갔다.

나는 여러 감각기관 중 코가 가장 예민하다. 방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게 무슨 냄새지?’하는 질문이었다. 아침부터 라면을 끓여먹었을 리도 만무한데 라면 스프 냄새가 났다. 냄새도 냄새지만 그 근원이 왜 책상일까.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 같은 기분으로 서랍을 여니 불닭볶음면 컵라면 용기가 잔뜩 쌓여 있었다. 먹고 난 음식물 쓰레기도 그대로였다. 여드름이 왜 점점 심해지는지, 아침마다 애 얼굴이 왜 부어있는지 그제야 이해가 됐다. 얘는 스트레스 풀이를 불닭볶음면으로 하는 구나. 처음 알았다.

침대는 또 어떤가. 옷이 쌓여 있어서 이불을 덮을 수나 있는지 의문이었다. 옷을 하나하나 바닥으로 내리는데 어디선가 운동화가 떨어진다. 신고 다니던 운동화가 왜 침대에 있을까. 한국인이 참지 못한다는 아메리칸 스타일인가. ‘나머지 한 짝은 어디에 있지’ 하는데 뭔가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떨어졌던 것이 기어간다. 거미다. 신발과 옷 더미에 둥지를 틀려고 했던 것인데 뜻밖의 침입을 받은 모양이다. 평소라면 미안했을 텐데 이번엔 전혀 미안한 마음이 안 든다.

베개 밑에서는 숟가락, 휴대용 배터리, 빵 봉지가 나왔다. 아이의 꿈자리가 뒤숭숭했겠다 싶었다. 대체 이러고 어떻게 여기서 잠이란 걸 자는지 불가사의했다. 모든 걸 쏟아놓고 보니 방이 가득 찼다. 유튜브에서 가끔 보던 쓰레기 청소 업체에 나오는 방의 풍경과 비슷했다. 고민하고 말 것도 없이 큰 쓰레기봉투에 다 쓸어 담았다. 재활용 분리수거 같은 원칙은 진즉에 내다버렸다. 분노와 연민과 안쓰러움이 마구잡이로 비벼진 채 갈 곳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 아이에게 할 말은 어떤 감정을 담고 있어야 할까. 분노일까, 슬픔일까. 처음엔 분노였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슬픔에 가까워졌다. 이 정도라면 부모로서 나의 개입이 너무 늦은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불닭볶음면으로 다 쓸어 삼켜 버리는 건 아니었는지. 슬펐다.

“그건 그냥 먹고 싶어서 먹은 건데. 엄마가 못 먹게 하니까.” 하교한 후 아이를 붙잡고 물어보니 생각 외로 그저 단순한 이유였다. 해소되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 같은 건 없고 그냥 해맑고 간결했다. 분노가 사그라드니 그곳엔 슬픔이나 연민 같은 보다 이타적인 감정이 들어서는 것 같았다. 그렇게 단순한 아이라니. 그 사실이 다행이라 여겨질 줄은 나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주고 싶은 메시지도 간결해졌다. “지금 학교생활과 운동을 병행하는 게 버거운 거 같은데 그러면 한 가지를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니냐. 그게 학교일 수는 없는 것이니 운동을 그만둬야 하는데 수긍할 수 있겠냐.”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협박이었다. 앞으로도 아침에 이조차도 안 닦고 학교에 가면 네가 두 가지를 병행하는 데 버거움을 보이는 사인이라고 알겠다. 그럼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 그런 얘기였다.

아이는 마치 자기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자기 얘기를 듣는 것 같은 표정으로 “알았다”고 대답했다. 이내 오늘 훈련에 빠지게 돼서 생긴 이 여유 시간을 “뭐 하며 보내지?” 했다. 신나 보였다. 그걸 보니 잠재웠던 분노가 끓어오르려는 게 느껴졌다. 다행이었다. 감정이 폭발하기 전에 내 앞에서 사라져서.


늘 그렇듯 아이들은 어른보다 유연하다. 나 혼자만 복잡하게 여러 번 꼬아서 생각하고 나름 전략을 짜서 말을 한다. 그런 과정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것이 자식들의 특기다. “몰라”, “그냥” 한 마디 밖에 모르나 보다. 전투의지를 한 순간에 무력화시키는 단어이자 태도다. 중학생쯤 되면 이런 삶의 태도쯤 하나 탑재하는 게 국룰인가.

중학교 3학년 아이를 둔 엄마한테 이런 얘기를 하니 국룰인 게 분명한 것 같았다. “말해 뭐해. 그거 얘기해도 소용없어. 빠지지 않고 학교 가 주는 것만도 감지덕지지.” 나도 애가 3학년쯤 되면 저런 여유를 부릴 수 있을까. 언젠가 그때가 오긴 오겠지만 그 과정이 모두에게 같을 거라는 보장 또한 없다는 걸 잘 안다.


매일 한결같이 운동에 참석했던 아이가 빠지자 축구팀 단톡방에 약간의 소란이 있었다. 개인의 프라이버시이니 ‘이를 안 닦고 다녀서 훈육 하려고 운동에 빠졌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 정도는 존중해줘야지 싶었다. 다만 감독이나 코치에게만은 알려야 했기에 설명하다 보니 만행의 사례 하나쯤은 말해야 했다. 다음 날 아이를 불러놓고 감독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 닦고 학교 가라. 아이는 그 순간을 ‘창피했다’고 표현했다. 그걸 안다니 다행이다.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좀 나아지려나. 혹은 이 약발이 언제까지 가려나. 살면서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고 내려놓는 일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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