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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윤 Oct 27. 2019

<논픽션>의 눈으로 <버닝> 들여다보기

 [2018 BIFF 영화 리뷰]


탈진실 시대의 호모루덴스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논픽션>은 주인공들의 핑퐁 대화를 다양한 관계 구도 속에서 리듬을 타듯 연출한다. 짧은 호흡의 장면 전환과 다양한 쇼트를 활용해 전체적인 재봉질이 매끄럽기 그지없다. 영화 전반에 걸쳐 대화와 토론의 향연이 시시각각 벌어지나 지루할 틈이라곤 없다. 깨알 같은 블랙 유머와 뻔하지 않은 전개를 그저 따라가기 바쁠 뿐.

 
허나, 이 영화를 단순히 유쾌하고 가벼운 코미디로 여긴다면 오산이다. 감독은 급격한 변화의 시류에 놓인 출판업계의 현황과 현대인의 일상을 솜씨 좋게 엮어, 디지털 미디어 플랫폼이 변화시키고 있는 우리의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를 디테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관객으로 하여금 책이라는 매체와 책이 제공하는 정보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메타적으로 사유토록 이끌기도 한다. 텍스트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살아가는 소설가, 그의 편집자, 영화배우인 편집자의 아내, 그리고 소설가의 아내인 정치운동가의 관점을 중심축으로.
 
마치, 알랭 드 보통 스타일의 (세련되고 트렌디하며 철학적이기까지 한) 소설을 영상미디어로 감상한 느낌이랄까. 책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더욱 흥미롭게 즐길 수 있는 작품임에 분명하다.


좀 더 자세히 들어가 본다면, 극 중 인물 레오나르는 본인의 연애사를 가감 없이 자신의 글에 반영하는 소설가다. 그가 새롭게 내놓은 신작 또한 마찬가지. 오랜 친구이자 담당 편집자인 알랭(기욤 까네)과 그의 아내 알렉스(줄리엣 비노쉬)는 그의 신작을 두고 상반된 의견을 보이는데, 일견 각자의 합리적인 관점인 듯 하지만 그 이면에는 보다 감정적 근거가 존재한다.
 
레오나르는 자기 작품의 장르를 "팩션"이라 규정하지만, 픽션(가상)과 논픽션(현실)의 이 모호한 경계는 (소수이긴 하지만) 독자들 사이에 논란을 일으킨다. 그의 작품을 예술로 볼 것인가, 아니면 사생활의 폭로로 볼 것인가. 주장은 많으나 정답은 없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가 희미해져 가고, 참/거짓의 구분이 어려워지고, 사랑과 믿음이라는 관계적 문제 또한 새롭게 정의되기 시작한 시대 ㅡ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시대ㅡ로 인류는 이미 발을 들인 듯하다.
 
영화는 누군가의 입을 빌어 탈진실(post-truth)이라는 표현을 등장시킨다. 탈근대화(Post-Modernism)처럼, 우리 세상의 진실도 바야흐로 포스트의 시점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이 세계의 의미를 "진실", 인생의 의미를 "진리"라 명명해보자. 진실과 진리의 탐구를 위해 과거에 택했던 거의 유일한 방법은 책을 집어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범람하는 정보 속에서, 책에 담긴 내용은 진리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가능한 해석에 불과"(<테크노 인문학> 인용)하게 되었다.
 
미디어 철학자 빌렘 플루세르는 예전에는 현대인의 심리를 알고 싶으면 도스또옙스끼를 읽으라고 했지만, 요즘은 도스또옙스키를 읽고 알 수 있는 것은 현대인의 심리가 아니라 도스또옙스키의 심리라고 말한다. 절대 보편적 지식이 존재한다는 관점은 옅어지고, 입장과 맥락에 따라 상대적으로 판단 가능한 정보만이 있을 뿐이라는 관점이 확산되고 있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책은 더 이상 진리탐구의 must-it 아이템도 아니고, 굳이 돈을 주고 살 가치가 있는지 의구심이 생기기도 한다.
 
지금 시대 언론의 보도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예전 같지 않은 것도 상당 부분 이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뉴스와 신문을 통해 보고 듣고 읽는 것을 고스란히 믿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정보이기 때문이다. 정보는 특정한 목적과 취향이라는 필터를 통해 걸러지고 변형될 수 있으며, 공급자에 의해 이용되고 수요자에 의해 소비되는 성질의 것이니.
 
그 어느 때보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이나, 풍부하게 주어지는 정보를 균형 있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원하는 것만을 선택하여 받아들이는 경향 또한 강해지고 있다. 개인의 시간과 자원에는 한계가 있고, 시장을 지배하길 원하는 기업들은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소비자의 니즈와 선호를 정확히 공략하여 즉각적인 클릭과 반응을 유도한다. '무엇이 진실인가' 보다는 '무엇이 취향에 맞나'에 더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시류, '재미'가 문화와 비지니스의 중심에 있는 시대를, 우리는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 현상에 대해, 영화 속 알랭의 출판업 파트너이자 혁신전문가인 젊고 아름다운 내연녀는 가치 판단하지 않는다. 소셜 네트워크 상의 구어가 문어를 대체하고, 글에 담긴 사고의 호흡은 짧아지고, 읽기보다는 보고 듣고자 하는 소비층의 증가로 종이책의 가치는 평가절하되고, 지식의 권위는 사라지고, 진실의 의미가 전과 같지 않은 지금의 시대적 트렌드에 대해 "너는 이것이 마음에 드는가?"라고 알랭이 묻자, 자신은 단지 대중의 구매 욕구와 소비 감수성을 "읽고 예측할 뿐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수많은 의견과 주장이 넘쳐나지만 전문가의 윤리적 가치판단은 중지되고 있다. 지식과 정보가 이제는 신념보다는 비지니스의 영역으로 전이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진실의 분별이 어려운 시대에 지식의 서술과 정보의 전달은 "일종"의 스토리텔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스토리의 생명력은 생생한 전달력과 시청자 혹은 독자를 몰입시키는 재미에 있으니, "오늘날의 죄인은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루한 사람"(같은 책 인용)이라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 가치판단의 기준이 "참 / 거짓"에서 "재미있냐 / 지루하냐"의 구도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 모든 함의의 단초를 영화 <논픽션>은 군데군데 구석구석 재치 있게 담고 있다. 이 영화의 제목이 <논픽션>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이 영화는 픽션인 동시에, 지극히 논픽션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실재(reality) 보다 더 실재적으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작예술의 본질을 사운드와 영상 이미지로 이토록 잘 구현하였으니, 영화 <논픽션>은 그야말로 디지털 시대의 완성도 높은 결과물이며 그러한 자신의 정체성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다.
 
이제 리뷰의 논지를 사회학적 층위로 옮겨보고자 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을 통해.


시대가 변하고 가치의 기준이 달라졌으니 이상적인 인간상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윈의 적자생존 원리에 입각할 때, 새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상으로 진화하지 못한 인간은 도태된다. 진화는 긴 시간을 통해 서서히 진행되므로, 진화에 실패한 인류와 성공한 인류가 공존하는 일정 기간이 존재할 것이고, 그 시간 동안 두 인류 간에는 모종의 긴장과 갈등이 있을 것이다. 이 과도기에 구인류와 신인류 간에는 과연 어떤 사건이 일어날까? 나에게 <버닝>은 그와 같은 질문에서 출발한 영화 같았다.
 
소설가 지망생 종수(유아인)가 고향 친구이자 초등학교 동창 해미를 우연히 만나 술을 마시게 된다. 해미는 근래 재미 삼아 팬터마임을 배우고 있다며 귤을 까서 먹는 팬터마임을 보여준다. 요는 귤이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귤이 없다는 것을 잊는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가상과 실재의 위상이 역전된 이 발상...)


어느 날 그녀는 종수를 자신의 집에 초대해 자신이 곧 아프리카로 여행을 갈 것이니 그동안 고양이 보일이를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종수를 침대로 이끈다.
 
어느 날 돌아온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우연히 알게 된 벤을 종수에게 소개한다. 벤은 건강하고 세련된 모습에 고급 스포츠카를 모는 (종수의 눈에는) "수상한 개츠비"다. 무슨 일을 하느냐는 물음에 그는 "간단히 말하면 노는 거예요"라고 답한다. 그는 술에 취한 해미가 눈물을 흘리자 신기하게 바라보며 말한다. 자신은 "슬픔"을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눈물"이라는 증거 없이는 슬픔의 존재를 인지할 수 없다고.



"재미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벤은 고급스러운 취향과 안목을 지닌 인물이고 손수 요리하는 것을 즐긴다. 자신이 직접 재료를 준비하고 음식을 만드는 과정도 즐겁지만 그것을 마치 "자신에게 바쳐진 제물"처럼 자기가 먹는 것이 좋다는 벤의 말. 그런 그의 말은, 어딘가 위험한 뉘앙스가 풍기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메타포"를 활용한 비유적 사고와 표현이 능숙한 인물이란 암시 또한 은근하다. (cook이 "cook up"이란 구를 이루면 "이야기를 지어내다"란 의미가 되는 것은 재미있는 우연일 테지만, 피아제의 인지발달이론상 사람의 가장 고차원적 사고단계가 "추상적(비유적) 사고"라는 점은 영화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게다가 "해미의 몸에서 돌을 빼내는 마술" 장난에서 볼 수 있듯, 벤에게서는 재치 있는 상상력과 스토리텔링 능력까지 엿보인다. 21세기형 새로운 인간형, 우수한 사고력과 창의적 상상력으로 지적 유희를 즐기며, 일(labor)이 놀이(play)이고 미학이 곧 윤리학인 ‘호모 루덴스(유희인)’가 곧 벤이라는 인물로 체화(體化)된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런 그에게 비밀스러운 취미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쓸모없고 흉측한 비닐하우스를 찾아 몰래 태우는 것". 그에게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행위란 양자물리학 같은 것으로, 이를테면 그것은 "나는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는 원리"이며 "비가 내리는 것과 같은 자연현상"이라 비유한다. 가상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한 유비쿼터스(ubiquitous : 도처에 존재하는, 여기저기에 모습을 나타내는) 디지털 시대에는, 벤과 같은 호모 루덴스가 부를 장악하고 세상의 존재방식을 정한다. 유희하는 플레이어(player)이며 스토리의 창조자(creator)이자 세상의 프레임을 통찰하고 기획하는 결정권자(decision-maker)로써. 재미와 미를 제1 존재 당위로 설정한 호모 루덴스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줄 수 없는ㅡ자신의 미학에 어긋나는ㅡ존재는 소멸됨이 마땅하고, 그것은 윤리의 판단을 넘어선 자연법칙과도 같은 것.
 
해미 그리고 면세점 직원이라는 젊은 여성이 벤의 지인들 모임에 초대받아 엔터테이너마냥 스토리를 들려주는 장면은, 마치 그들의 존재가치를 검증하는 게임의 마지막 스테이지 같아 보인다. 두 번의 모임을 모두 지켜본 종수의 관점에는 적어도 그리 보인다. 종수는 벤이 ‘하품’을 하는 것 또한 목격한다. 로마시대 원형 콜로세움에서 황제와 원로회 위원들이 엄지를 내리면 경기장의 검투사는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가. 황제(벤)가 엄지를 내렸으니(하품을 했으니) 이제 그녀들에게 남은 것은 사형의 집행 이리라.


전지전능한 벤에 비해 종수는 어떤 인물인가.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와 집을 나간 어머니로 인해 학대받고 방치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지금은 대학을 휴학한 채 학비를 버느라 힘들게 노동하는 젊은이다. 호모 루덴스 단계로 진화하지 못한, 호모 이코노믹스(경제인)인 그는 전체를 보지 못하고 일부 부품만을 반복적으로 생산하는 공장 노동자처럼 인생이라는 게임의 판도를 읽지 못한다. "세상이 이해불가"한 그는 소설가 지망생이면서도 좀처럼 글을 창작하지 못한다. 구식 엔진으로 털털거리는 낡은 트럭처럼 에너지와 자신감이 고갈된 채 "가슴에서부터 비트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재미와 미가 경제의 기반이 되는 자본주의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미학적/유희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데, 종수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종수의 눈에 비친 벤은 어떤 존재일까.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고성능 스포츠카, 슬픔과 노동이 부재하는 신인류를 바라보는 구인류의 마음속엔 열등감과 부러움의 분노가 가득 찰 것이다.
 
이제 해미의 입을 빌어 종수에게 물어보자.
"이제 진실을 말해봐"



만약, 인생의 스크립트를 마음대로 쓸 권한이 종수에게 주어진다면, 그의 시나리오는 바로 <버닝>의 엔딩과 같지 않을까? 종수의 입장에서 벤은 소시오패스이자 살인자여야만 하며 그런 그는 종수의 손에 죽어 마땅하다. 실은 죽이고 싶을 만큼 부럽고 밉기에, 종수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 듣고 싶은 대로 듣고 / 믿고 싶은 대로 믿은 한 편의 스토리를, 관객은 함께 본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엔딩 장면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눈 내리는 추운 겨울, 종수는 벤을 칼로 찌른다. 벤의 피가 흩뿌려진 자신의 옷을 팬티까지 모두 벗어 벤의 차에 던져 넣고서 불태운다. 스포츠카를 활활 태우는 불이 신인류를 증오하는 구인류의 분노를 형상화한다. 하나의 메타포로써.
 
알몸의 종수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기처럼 덜덜 떨며 비틀비틀 걷는다. 마치 더욱 과거로, 이제는 호모 이코노미쿠스도 아닌, 석기시대 호모 사피엔스로까지 퇴행한 것 같은 암담함이 감돈다.


자, 종수의 스토리텔링은 여기서 끝이 났다.
이 영화가 교묘하게 제시한 단서들 중 무엇을 믿을지 혹은 어떤 ‘또 하나의’ 스토리를 상상할는지는 영화를 감상한 이들 각자의 고유한 필터와 취향에 달린 것일 테지만, 그것은 저마다의 유의미한 선택이자 유희일 것이다.




2018.10. 13. BIFF 웹진 작성글


http://www.biff.kr/kor/artyboard/mboard.asp?Action=view&strBoardID=9612_10&intPage=1&intCategory=0&strSearchCategory=|s_name|s_subject||&strSearchWord=김지윤&intSeq=67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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