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초량
부산 동구 초량동에 위치한 오초량은 부산에 방문하게 되면 꼭 방문해 보고 싶은 곳이었다.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349호로 일본식 가옥, 적의재산이라는 직접적인 표현 ‘적산가옥’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목조주택으로 일본식 평기와 지붕과 건물의 내부 공간, 정원 구성 등이 일본식 가옥의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푸른 정원과 연못을 품은 오래된 주택 외관과, 삼면이 고층 아파트로 둘러선 형국에 홀로 시간이 멈춘 오초량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입구에 들어선 순간, 오래된 집을 들어선 것처럼 고요함이 가득했다.
작년 5월, 재개관했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번 방문 계획을 세웠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일이 바빠 부산 방문이 미뤄지며 때때로 날씨 탓을 하며 방문을 멀리했다. 새해가 되어 드디어 부산에 머무르게 되면서 오초량에 입성할 수 있었다. 오로지 사전예약을 통해서만 입성할 수 있는 곳이라 예약을 늦게 하는 바람에 이번에도 실패하지 않을까 했는데 예약확정 문자를 받고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오초량의 이름은 풀밭에 난 오솔길을 뜻하는 지명 ‘초량(草粱)’ 앞에 감탄사 ‘오!’를 붙인 작명이다. 이름처럼 오초량은 초량을 떼고 생각할 수 없다. 부산역에서부터 텍사스거리, 차이나타운. 백제병원, 초량시장, 정란각, 산복도로까지 이어지는 부산 원도심과 근대문화 루트의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다. 근대에서 현대까지 격변의 시대를 겪으며 부산은 개항을 통해 다른 문화를 접촉하고 섞이며 변화하고 새로움을 생성했다. 그리고 그 변화를 지난 집이 이곳이다.
오초량은 1925년 신축되어 1931년, 광복 이후 두 차례의 증축과정을 거친 일식목조주택과 RC조 양식주택으로 구성됐다. 최초의 건물주 일본인 다나카 히데요시는 1876년 오카야마현 출신으로 경부선 신설공사를 수행하기 위해 한반도로 건너와 부산진 매축, 동해 남부선 공사 등 토목사업에 뛰어들어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본인이 거주하기 위한 지금의 오초량을 짓는다. 그의 넘치는 부는 공간 곳곳에서 드러나게 되는데, 일식 평 기와로 구성된 지붕과 외부창호 및 장식이 섬세하고 화려하며, 전형적인 일식주택의 히로마와 도코노마, 장지문, 다디미 등 세부적인 디테일들이 유심히 드러난다. 무엇보다 조경석을 사용한 일식 정원의 조성과 식재 등은 일본 전통건축 정원 원형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며 보는 내내 오!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정원 한쪽 편의 2층짜리 서양식 주택이 있던 자리에 직사각형의 긴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본래 양옥을 받치던 두 기둥만이 기념비적인 흔적으로 남아있다. 과거 주택에 붙어있던 70년대 지어졌던 양옥건물이 급하게 지어진 주변의 아파트 공사로 인해 철거과정 속에 균일과 파손이 됐다. 일식가옥은 균일 및 파손이 되더라도 조립 및 복원이 가능하나, 양옥건물은 한 번 철거가 들어간 순간 복원이 불가능하다. 그렇게 건물의 두 기둥만이 남아 이 자리에 건축물이 존재했음을 간접적으로 알리고 있다.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20년대에서 70년대까지 순차적으로 지어진 건물은 건축학적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지만 공사로 인해 균열 및 파손 그리고 목조주택 역시 복원과정에서 유화부터 전체를 해체하여 바닥부터 다시 올린 건물은 무분별한 개발과 잘못된 공사로 그 피해를 온전히 받게 된 것이다.
주택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정원의 독특한 풍경에 시선을 사로잡혀 걸으면 고층 아파트 사이로 햇살이 들어온다. 건물이 세워진 이후 20년간 일본인이 거주했지만 해방 이후, 남겨진 건물은 그 누구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방치됐다. 누구에게도 이 건물을 보살펴야 할 의무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일맥문화재단의 창립자 황래성 선생이 1971년 목조주택을 사들여 직접 거주하고 보살피기 시작하며 지금까지 일맥문화재단에 기부되어 보존되어 역사적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보살핌 아래 지내온 시간이 온전치 많은 않았다. 급변화하는 흐름 속 지역 일대가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었고 오초량을 포함해 주변 필지는 고층 아파트 네 동이 지어질 예정이었다. 무려 최소 평당 삼천만 원 이상 값어치의 땅이었다. 그러나 재단은 이곳을 후대에 물려줘야 한다는 가치 아래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세상에서 장소에 담긴 기억과 시간의 정체성을 지닌 오초량을 지켜냈다.
결국, 이 자리만을 덩그러니 남겨둔 채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당초 계획이었던 아파트 네 동은 세 동으로 변경되어 세워졌다. 그렇게 오초량은 삼면에 고층 아파트를 둘러선 다소 이질적이고 낯선 도시 풍경을 그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 서 있는 순간, 이질적이고 낯선 풍경은 이곳의 가치를 더 끌어올렸다고 생각한다.
좋은 집, 흔히 고급 주택이라고 불리는 곳에 가게 되면 비싼 재료와 정교한 기법 등을 사용하여 기능적인 측면을 넘어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요소들이 넘쳐난다. 예쁜 요소들이 필요 이상으로 넘쳐나는데 오초량의 내부의 모습이 그러했다.
가늘지만 단단해 보이는 서까래로 지탱되고 있어 다른 지지물은 없어도 되는 처마의 귀퉁이 아래에 묵직한 청동 장식물이 달려있다. 처마가 처지지 않도록 하는 기능적인 측면도 있지만, 격자문양의 트러스트 구조를 비싼 재료로 세심하게 만들어 달 필요가 있었는까 하며 신기해 할 수밖에 없다.
방과 방을 나누는 나게시(기둥과 기둥 사이를 연결하는 횡부재)와 천장 사이의 틈에 있는 세밀한 살로 만든 목판을 채워 넣고, 나뭇잎사귀를 새기기까지 했다. 그리고 종이 창호 가운데에 구멍을 내고 꽃문양을 섬세하게 음각한 유리창을 넣었다. 지금 다시 복원하라고 해도 손쓸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기능적인 측면에서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이지만 정교하고 세밀한 것들이 이 집을 돋보이게 한다. 젊은 나이에 타국에서 성공과 큰 부를 이룬 사람이 본인이 매입한 땅에 본인의 집을 지으려고 하니 얼마나 좋은 집을 짓고 싶었을까.
일식가옥답게 전체적으로 스기목을 뼈대로 건물이 구성됐다. 우리말로 삼나무인 재료는 피톤치드가 많이 나와 인테리어용으로 많이 사용되며 습기에 강하지만 경도가 약해 변형이 쉽다. 따라서 일식가옥은 보존하기가 힘든 편에 속한다. 장마철에는 물이 스며들어 문이 잘 닫히지 않아 장마가 끝나고 나무가 말라야 문이 다시 닫히는 등 기능적인 부분에 취약하다. 그래서 우리나라 한옥의 경우는 기후적 환경 때문이라도 삼나무보단 소나무를 사용하는 이유기도 하다.
재개관 후 열린 전시 <오! 분더카머> 일부 작품들이 아직 공간에 스며들어 남아있다. 분더카머란 호기심의 방, 경이로운 방이라는 뜻으로 16 -17 세기에 유럽의 지식인들이 자신의 저택에 온갖 진귀한 사물들을 수집하여 진열하고 모아두었던 공간을 의미한다고 한다. 기후와 풍토가 다른 지역, 각자 다른 물성과 시대적 맥락을 달리하는 미드-센트리 책상과 의자들, 100년 된 가옥의 기와, 창문. 한국 동시대 유리, 나무, 섬유, 도자 공예가 함께 놓인 풍경은 이질적이지 않고 제자리에 놓인 듯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전시 이후 오초량은 시간과 장소의 사회적 가치를 더하는 교육, 전시 등을 진행하는 교육복합문화공간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근대 개항을 기점으로 격변의 변화를 거친 부산의 중심에 자리 잡은 주택 오초량은 적산가옥임에도 한국 사람의 손길의 보살핌과 생활상이 담겼다. 거침없는 도시 개발과 역사, 문화적 장소의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곳에서 시간의 흐름이 멈춘 이곳 오초량은 도시의 작은 틈이다. 부산스럽지만, 부산스럽지 않은 고요가 지배하는 곳. 100년의 시간이 흐르고 앞으로 또 100년의 시간 동안 오초량은 어떤 공간으로 정의될까.
글 | yoonzakka
사진 | yoonzakka
내용자료 | 일맥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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