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아이템 얼마나 기발하게요.

by 율율

내 고향, 성주.


사람들이 “고향이 어디세요?” 하고 묻는다. 고향이 어디냐 묻는 이유는 내 말투에 사투리가 묻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경상도 어딘가라고 말하긴 해야 하는데, 진짜 내 고향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진짜 고향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가장 큰 도시인 대구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여기서 대구 어디냐는 질문이 뒤따라 올 때가 있다. “아, 사실은…” 하며 그제야 고향을 말한다.


그냥 처음부터 성주라고 하면 될 걸 왜 대구라고 대답하게 되었을까. 성주라고 하면 열에 아홉은 “상주? 곶감!” 하고 반응한다. 상주가 아니라 성주라고, 성주는 참외라고 대답하길 최소 수십 번. 그리고 다음에 만나면, “저 유리 씨 고향 알아요! 상주! 곶감!” 하며 알은체를 해 주신다.


스몰토크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닌가. 상대의 고향이 어딘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살 필요는 없다. 다만, 스몰토크라는 것도 서로 재밌자고 하는 건데, 난 매번 보는 재방송을 당신은 곧 까먹을 테니, 빨리 다른 채널로 돌리고 싶어 대충 대구라 둘러대는 습관이 생겼다.


농사에 대해 떠들어 봅시다.


성주를 떠난 지는 14년이 되었다. 본가는 여전히 성주에 있지만 명절에나 갈까 말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성주의 딸이다. 좋지도 싫지도 않은 정체성 하나일 뿐이었는데, 동경하던 서울 사람의 삶이 사실 별거 없음을 깨달은 뒤에는, 인구 4만의 성주 출신이라는게 조금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우리 부모님은 자의 반 타의 반 농부가 되었고 나도 밭일을 자주 도왔었다. 뇌를 꺼내놓고 다니듯 아무 생각이 없던 중학생 시절에, 참외 농사에 도전했다가 포기한 부모님을 보며 농업 전문가라는 타이틀은 거저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서울살이 힘들어 “귀농이나 할까”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떽! 하며, 어느 직업군보다 큰 결심이 필요한 이직이라고 일장 잔소리를 늘어놓을 만큼 의외로 내가 농사에 대해 아는 게 많더라는 거다.


겨울철 참외 모종이 얼지 않게 하기 위해 이불(보온덮개)을 덮어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부모님이 참외 농사 지을 때만 해도 손으로 보온 덮개를 덮고 벗겼는데, 기계가 발명되고는 이 시간이 단축돼서 일조량이 늘어 참외 당도가 더 올라갔단다. 농사일도 어떤 설비에 투자할 것인가, 그것을 무엇으로 회수할 수 있는가 고민해야 하는 사업이며, 생명이나 기후 과학에 관심이 있어야 작년보다 올해 더 나은 품질의 과일을 수확할 수 있다.


농사 체험 예능 프로에서는 농사의 육체적 노동만을 강조한다. 출연자는 농부가 땀 흘려 힘들게 수확한 무엇무엇을 먹으며 감사하는 마음을 되새긴다. 난 언제부터인가 이런 클리셰가 불편하다. 농부는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여느 직업인처럼 좋은 품질의 상품으로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 또 체력뿐 아니라 한 농장을 운영할 만큼의 사업적 역량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이런 사실을 미디어에서는 드러내지 않는다. 농사는 #인심 #땀 #정직으로 표현될 뿐이다.


인류 최고 발명품은 모두 농촌에 있다.


최근에 이런 저런 경험이 얽히며 지역민으로서의 자부심과 자존심이 생겼는지, 뭔갈 표현하고 싶어졌다. 성주 참외 비닐하우스 일러스트를 시작으로, 농사 아이템을 그리고 있다. 성주에 살던 나에게 너무나 익숙했던 농사 아이템들을 서울의 내가 낯설게 그리다 보면 자주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이 충격이 재미있어 다음 아이템을 찾고 또 찾는다.


바퀴가 하나만 달린 수레를 구루마라고 부른다. 밭은 보통 이랑과 고랑이 있다. 이랑은 식물을 심는 높은 땅이고 고랑은 이랑 사이 좁고 낮은 땅이다. 좁은 고랑으로 사람이 걸어 다니고 수확한 것을 운반해야 하니 바퀴가 두 개 달린 수레는 다닐 수가 없다. 그래서 평지에서는 중심 잡기 어려운 구루마가 고랑에서 잘 다닐 수 있는 것이다.


다리 한쪽씩 고무줄을 끼워 입는(?) 스티로폼 방석이 있다. 딱 팬티 라인을 따라 고무줄이 위치하게 되는 이 방석을 처음 보면 참 민망하다. 방석이라기엔 두껍고 단단해 작은 의자에 가깝다. 여러 디자인이 나왔지만 가랑이를 가로지르는 고무줄이 있는 기본 구조는 어느 제품에서나 동일하다. 엉덩이에 딱 붙어 허리, 무릎, 고관절을 지켜주는 이 필수템이 없는 참외 농장은 단 한 곳도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이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는 대단히 유명한 말을 남겼다. 건축학과 공부하면서 그다지 와닿지 않던 이 말이 농사 아이템 그리면서 새삼 와닿는다. 농사템이 그렇게 생긴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유 없이 만들어진 물건이 하나도 없다.


@chamoe.vinyl.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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