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도 부모는 처음이라
시골 출신 아버지는 1남 5녀 중 둘째, 외아들이자 장남이셨고
섬마을 출신 어머니는 1남 3녀 중 장녀셨다.
군 전역 후 아버지는
원양어선과 건설 일을 전전하셨고
결혼 당시엔 덤프트럭 기사를,
어머니는 고등학교 졸업 후
의류 쪽에서 꾸준히 일하셨다.
지금도 아버지랑 술 한잔 하다 보면
"나는 네 나이 때 전국 팔도를 누볐다"라고 하신다.
결혼 전 아버지는
큰 교통사고를 겪으셨고
그걸 아신 어머니는
기사일을 반대하셨다.
그렇게 두 분은
중매로 만나 결혼하셨다.
결혼 당시
아버지 29세, 어머니 26세.
96년생 내 나이
현재 서른이다.
결혼 후 부모님은
고향에 아동의류 체인점을 열었으나
1년도 채 되지 않아 가게를 접어야만 했다.
90년대 초중반
피자가 대중 외식으로 떠오르던 시절.
도시에서의 두 번째 장사가 시작되었고
그때 나는, 태어났다.
피자집이 잘 되었으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하루에 두 판도 못 파는 날이 많았다.
옷가게의 실패.
줄어들지 않는 대출.
잘 되지 않는 장사.
오픈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랬을까.
아직 사람들이 잘 몰라서였을까.
그렇다고 당장 가게를 접을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금기된 기사를 다시 타셨고
어머니는 젖먹이인 나를 돌보며
홀로 가게를 지켜내셨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생활이 무너졌다고 한다.
지금도 그 기억 속에서
어머니는 종종 말씀하신다.
“그땐... 분유값도 없었어.”
부모님께선
잘 될 거라는 믿음 하나로 버티셨던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번의 장사 모두 체인점이었다.
만들어진 시스템이라 안전할 줄 아셨을까,
매뉴얼대로 하면 잘 풀릴 줄 아셨을까.
스물여섯의 나는
아버지께 사업성을 검토받았지만
그분들에겐
무엇 하나 확인해 줄 사람이 없었을지 모른다.
결국 반년도 못 채운 채
"이대로는 안된다"
"도저히 답이 없다"
가게를 접으려 하셨다.
제일 큰 문제는 오븐기계였다.
그 당시 수천만 원.
반년도 안 된 기계가
벌써 반값으로 감가 되어 있었다.
본사에 사정도 해보고
화도 내보셨다고 한다.
하지만 어쨌든
그 돈은 빚이었다.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부모님은
기계값이라도 건지기 위해
고향에서 정말 작은 피자가게를
다시 오픈하셨다.
그때를 떠올리며
아버지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도시에서 피자가게가
조금만 더 되었어도...
나는 그냥 다시 기사를 탔을 거다.
장사만큼은, 다시는 안 했을 거야.”
나는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본다.
감히 짐작하건대—
그때 그 선택 말고는
정말 다른 방법이 없으셨던 것 같다.
고향에서의 가오픈을 앞두고
부모님은 열 가지가 넘는 소스를 직접 개발하셨다.
며칠 동안 다양한 연령대와 성별의 지인들을 초대해
시식회를 열고 가장 대중적인 맛을 찾아내셨다.
전단지는 5천 매를 의뢰했지만,
발주 실수였는지
제작사의 착오였는지
5만 매가 인쇄되어 도착했다.
이 일화는 그날을 기억하는 에피소드로 남았다.
가오픈 기간 아버지는 아파트 단지를 돌며
그 전단지를 손수 붙이셨다.
그리고 처음 전단지를 붙였던 날.
가오픈 기간이었음에도
열 판 가까운 주문이 들어왔다고 한다.
"죄송한데 지금 주문되나요?"
"네 됩니다. 어디시죠?"
그날을 회상하신 아버지의 말씀은
정확히 이랬다.
“도시에서 한두 판밖에 못 팔던 놈이
전단지 붙이자마자 주문이 막 들어오더라.
오토바이를 어떻게 탔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날아다녔어”
그때부터 밀려들기 시작한 주문들.
가족여행은커녕
부모님이 쉬는 날조차 본 기억이 없다.
항상 배달만 다니시던 아버지.
피자만 만드시던 어머니.
어머니께선 주무시다 전화 오면 일어나 반죽을 하셨고,
아버지는 교대로 배달을 나가셨다.
어렸을 적 내 기억은
그 장면들로 가득하다.
스물여섯의 나는 돌아갈 곳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가업제안과 드론지원이 없었다면
개인사업 기회조차 없었을 텐데.
젊은 날 부모님은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였지만
또래의 부모님에겐
정말 돌아갈 길이 없으셨던 것 같다.
첫 번째 옷가게.
두 번째 피자집.
이미 두 번의 실패를 겪으신 분들에게
더는 물러설 자리가 없음이 분명했다.
인문계를 나오셨지만
어렸을 때부터 집안일을 도와야 했던 장남 아버지.
장사로 부유한 집안이셨다가
집안이 급격히 기울어진 장녀 어머니.
두 분은 대학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던 분들이었다.
아버지 29세, 어머니 26세.
결혼 안 하면 손가락질받던 시절.
그 나이조차 당시엔 늦은 축에 속했다.
그들에게 결혼이라는 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께도 사정이 있었다.
큰고모께선 사범대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인재셨고 아버지께서도 인문계를 나오셨지만,
"길을 알려준 선배나 스승이 없었다"라고 하셨다.
학창 시절 기타도 치며
감수성 좋았다던 아버지.
이 얘기조차 아버지의 친구분께 살짝 들은 이야기.
아버지 역시 나처럼
어린 시절 외부와 내부의 충돌 속에서
혼란을 겪으셨던 건 아닐까.
아버지는 지방에 있는 대학에 붙었지만
조부님께선 대학진학을 반대하셨다고 한다.
형편은 분명 넉넉지 않으셨다.
감히 생각해 보자면,
조부님께선 장남이 좋은 대학에 가는 걸
누구보다 바라셨을 것이다.
하지만 여섯 자녀를 둔 아버지로서
그 기대와 현실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했는지는
그분도 오래 고민하셨을지 모른다.
그렇게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이 편지 하나만 남긴 채
해병대로 입대하셨다.
아마 그의 선택은
성격을 바꿔야 하기 위함이었음을.
본연의 기본 성격은
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았음을.
나는 감히, 짐작한다.
어머니는 유년기 때 가난하셨지만
학창 시절 외조부모님께서
장사로 큰돈을 벌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갑자기 큰돈이 생기셨을 외조부모님께선
사회에 대한 깊이는 부족하셨을지 모른다.
결국 잘못된 보증으로 집안은 무너져 내리며
두 분의 이혼으로 마무리되었다.
어머니한테 들은 이야기지만
그 당시 서울에서 지내셨던 어머니는
"집안을 떠나고 싶었다"는 생각밖에 없으셨다고 한다.
외삼촌이 계신 지방으로 쉬러 오신 어머니는
그렇게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10년 넘는 세월 동안
부모님은 피자집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운영하셨다.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도 가장 어려운 건
'인력관리'였다.
배달 삼촌이 큰 사고를 낸 날.
친구를 태우고 오토바이를 몰다 다친 날.
오토바이를 사적으로 쓴 날.
전단지가 쓰레기통에 뭉텅이로 버려져 있던 날.
일은 잘해도 인성이 문제인 사람,
인성은 좋은데 일을 못하는 사람.
그 시절도 지금처럼
사람이 가장 어려웠나 보다.
많은 일화를 통과하며
시간은 그들의 주름을 깊게 파고들었다.
강해져야만 했던 시대 속에 살아오신 아버지와
가정의 흥망성쇠를 온몸으로 겪어오신 어머니.
스물아홉과 스물여섯 그들은
지금의 나보다 어렸다.
나는 첫째였고,
그들에게 부모라는 직업도 처음이었다.
내 나이 다섯, 아버지께 맞은 날.
그날 부모님은 크게 다투셨고
나는 다툰 장면을 오래도록 품었다.
다툼이 어떤 이유인지, 나는 짐작할 수 없다.
내 나이 열일곱, 맞았던 기억을 여쭈었던 날.
그 사건이 그들의 12년 세월을 지나며
각자의 가슴속에 어떠한 형태로 기억되고 있었다.
무슨 형태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짐작하고 있다.
하나 확실한 건
그들에게는 ‘감정을 다스리는 법’ 보다 ‘그럴 여유 자체'가 없었다는 것.
힘들다고 할 여유.
뒤를 돌아볼 여유.
그들의 젊은 날을
판단할 수도,
평가할 수도 없다.
다만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나는 잘 모르겠다"로
스스로 답을 내렸다.
치열하게 생존하신 그들이
자식들한테 가르쳐주려 했던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
자식들에게
'본인들의 약한 모습을 닮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일까.
자식들만큼은
'이런 삶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다'는 다짐일까.
분명 그것들이
지금의 나와 안정된 기반을
만들어 놓으셨음은 분명했다.
나는 어릴 적 부모님을 참 무서워했지만
이제는 안다.
두 분 모두 "단지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을 뿐"이었다는 걸.
중학교 입학을 앞둔 큰아들.
고학년이 되며 게임에 빠졌고
금고에 손을 대며 게임방에 들락거렸다.
내가 그렇게 자랄 줄은
그들도 몰랐을 것이다.
어느 날 부모님은 깊은 대화를 나누셨다.
아버지는 장사가 아닌 축산업을 희망하셨고
어머니는 사춘기에 들어설 나를 걱정하셨다.
그 해 유월.
아버지는 완공된 축사로 들어가셨고,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도시로 이사하셨다.
확실한 건
지금도 나는 첫째이고,
지금도 부모님은 처음 겪고 계시다는 것.
오늘의 시간은
"그들도 나도 처음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6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