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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 Yoorang Oct 13. 2020

Frontrunners

2014-2015 in Denmark

Frontrunners X. 늘 스티치와 함께 했던 나.


Frontrunners는 덴마크 Hedensted에 있는 Castberggård라는 곳에서 운영하는 프로젝트 중 하나다. 덴마크 농인을 대상으로 한 직업훈련 프로그램인 Navigator도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그 외에도 워크샵을 할 장소를 제공하거나 다양한 프로그램 및 프로젝트가 있다. 그 중 Frontrunners와 Navigator는 좀 큰 프로젝트라고 생각하면 될 거 같다.

Frontrunners는 세계 농인을 대상으로 한 프로젝트라서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농인들과 덴마크 농인들이 서로 스쳐지나가면서 각 프로그램 및 훈련을 받는다. 물론 그 외 작고 큰 다양한 프로그램이 덴마크 정부에서 지원을 받아가면서 운영되고 있어 Castberggård가 도시 외곽에 있지만 꾸준히 숨쉬며 생명력을 발하고 있다.


2004년에 시작된 Frontrunners는 올해 코로나로 시끄러운 2020년 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16기생들을 위해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나는 2014년 9월에 입학했고 동기 6명과 함께 약 9개월 동안 소중한 여정을 한 10기다. 우리 10기생들이 늘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건 10기 이전에는 늘 중도하차 혹은 퇴학 당한 학생들이 있었지만 우리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했었다. 그 당시에 우리 10기가 가장 적은 인원이었는데 그 다음 기수인 11기가 우리 기록을 깼다. 11기는 5명이었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두 다 끝까지 함께 Frontrunners 여정을 함께 했다. 지금까지도 10기, 11기 외에 입학 당시의 인원수로 끝까지 함께 졸업한 기수는 없다. 적은 인원이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함께 자리를 한 사람들끼리의 호흡도 맞아야 서로가 서로를 지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학교에 가게 된 계기는 적절한 타이밍에 알게 되어서 아닐까.

대학교 졸업 후 바리스타로 일하면서 간간이 자기계발 위해 여러 활동하고 있던 차에 국제수화 통역반에서 강사 소개 통해 알게 되었다. 사실 그때 미국수어 기초반 뗀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뭔가 새로운 걸 계속 배우고 싶었던 마음에 무모하게 국제수화 통역반을 신청했다. 그때 미국수어와 국제수화는 엄연히 다르구나를 호되게 배운 셈이었다.

강사는 Frontrunners 5기이자 최초 한국인 학생이었다. 간략한 설명이었지만 내 심장이 뛰는 걸 보아 수업 끝나고 집에 가서 이것저것 검색해본 결과 이 학교에 가지 않으면 후회할 거 같았다. 그리고 농학교는 한 번도 안 다녀봤기에 짧게라도 농학교 생활도 경험하고 싶었다. 덕분에 농문화를 더욱 더 알게 되었고 24시간 동안 국제수화만 사용하는 환경에서 지내선지 한국수어보다 국제수화를 사용할 때 더 자연스럽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지금까지도.


약 9개월 가량의 커리큘럼이 설명되어있던 홈페이지 소개글. 짧은 기간으로 인해 깊게 파고들지는 못 하더라도 나름 체계적으로 짜였던 커리큘럼이었다. 농학(농사회/정체성/역사/문화 등), 수어학, 미디어 활용법 등 배우는 거 외에 세계 각국 다양한 강사들이 와서 특강도 하고 세계 농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국제수화로 수업을 하면서 어울릴 수 있다는 게 내 마음을 움직였다.

세계에서 하나 뿐인 농인 대학교인 Gallaudet 대학교도 있지만 4년 수업을 듣기 전에 어학원에서 미국수어와 영어 공부도 해야 하고 어마어마한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1년도 안 되는 커리큘럼으로 짜여 있는 Frontrunners는 짧고 굵은 경험을 하기에 괜찮다 싶었다.


가장 마음에 걸렸던 건 부모님 설득이었다. 국제수화 수업 끝나고 강사에게 짧은 면담을 요청했다. 강사는 내 고민을 듣고 본인 경험을 이야기해줬다. 본인은 한 푼도 없이 갔다고 한다. 학비를 내는 방식은 3가지였는데 입학 전에 전액을 내거나 두 번 나눠서 내거나 매달 내기였는데 마지막을 선택하고 매달 어렵게 발품을 팔면서 여러 사람들 도움을 받으면서 아슬아슬하게 학비 해결했다고 한다. 어렵게 학비 해결하면서 학교 생활했지만 절대 후회 하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 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 가야지, 한 번 미루면 또 미루는 건 정말 쉽다면서 내가 정말 가고 싶으면 부모님 설득은 어떻게 해야할 지 내가 가장 잘 알 거라고 했다.


부모님 댁에 내려가서 부모님께 말씀 드렸을 때 아빠께선 영어를 잘 하는 동생을 불러서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학교 소개를 간단히 읽어보라고 하신 뒤에 나한테 질문 하나 하셨다.


"우리들이 반대하면 가지 않을 거냐?"

"반대해도 어떻게든지 부족한 돈을 채워서라도 갈 거예요."


그 이야기가 오간 후에 나와 동생은 바로 서울로 올라가야 했는데 나는 부모님 대답은 내일이나 모레쯤 오겠지 생각했는데 서울에 도착했을 무렵 부모님께 연락이 왔다.


"부족한 돈은 우리들이 도와줄테니 한 번 지원서 내보거라."


생각보다 빠른 답에 놀랐지만 내 마음을 알아준 부모님께 감사했다.

지원서 마감날이 얼마 안 남아서 서둘러서 서류 및 국제수화영상 준비해서 제출했다.

당연히 합격.


이후 바리스타 일도 정리하고 비자 준비도 차근차근했다. 주변엔 알리지 않고 그냥 덴마크행 비행기를 타서 알고 있던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나중에 그 소식이 퍼지자 다들 놀랐다고 한다.



복도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햇살 쬐는 소소한 행복이 참 좋았다.


10기 우리들 국적은 한국 1, 덴마크 1, 뉴질랜드 1, 네덜란드 2, 가나 2 그리고 남3, 여4 총 7명이었다.

뉴질랜드 친구 Mark는 이후에도 나와 각별한 관계가 계속 이어져서 특히 소중한 친구.


커리큘럼은 Module 1,2,3으로 나눠져 있는데 Module 1 때는 이것저것 배우는 시기.

Module 2 때는 그 동안 배웠던 걸 소화하는 시기라서 여행하든 인턴쉽하든 각자 계획을 세워서 그에 따라 자기만의 여정을 꾸려나가는 시기.

Module 3 땐 1, 2를 마무리하는 시기이자 이후에 뭘 할 지 고민하는 시기.

이에 대한 이야기는 2014년 기준이다. 현재 커리큘럼이 굉장히 많이 달라졌는데 더 체계적으로 되었고 반도 나눠져있다. 이는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http://frontrunners.dk 


정규직인 선생님은 3명이었는데 지금은 동기인 Mark도 포함해서 5명의 선생님으로 늘어났다. 특강으로 오는 선생님은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는데 이 또한 다 네트워킹으로 이어져서 Module 2 때 함께 일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동기 일부도 특강으로 만난 선생님 밑에서 인턴쉽했고 나 역시 특강 차원으로 다 같이 방문한 핀란드농아인협회 및 WFD(World Federation of the Deaf)에서 닿은 인연 통해 핀란드에서 인턴쉽 기회를 얻었다.


우리 10기들은 다양한 문화와 성격으로 인해 많이 부딪히기도 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많은 걸 배웠다. 특히 Module 1 끝나갈 무렵 Frontrunners 10주년을 준비도 해야 해서 더욱 더 힘들었다. 더디게 진행되는 준비와 비협조적인 동기도 있어서 Mark와 나는 막바지에 다른 일들까지 도맡아서 해야 했었다. 그때 협조하면서 일하는데에 호흡이 잘 맞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후에도 2년 더 같이 일하게 되었는데 이건 다른 글에서 풀 예정.


Module 1 때는 부족한 국제수화로 인해 수업 진도를 빨리 따라잡기 어려워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메모해뒀다가 쉬는 시간에 동기들에게 물어보거나 선생님 찾아가서 많은 질문을 던졌다. 심지어 스스로 너무 분해서방에서 몰래 울기도 했다.

'국제수화 연습을 더 해둘걸. 영어 공부 더 해뒀다면 PPT나 자료들 읽는데에 도움되었을텐데.'

Mark, 가나 친구들이 미국수어를 알고 있어서(가나수어는 미국수어 영향을 많이 받아서 미국수어랑 거의 비슷했음) 수업 중에 가끔 내가 어떤 단어를 이해 못 했으면 돌아가면서 미국수어로 설명해줬다.

수업 중에 좋았던 점들 하나는 언제든지 질문을 할 수 있었고 누군가가 이해 못 했을 땐 멈추고 끝까지 설명해주는 분위기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 했기에 신선했다. 토론할 때도 맞든 틀리든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비난이 오가는 분위기도 아니었단 게 매일 나에게 많은 놀라움을 선사했다.


Module 2 준비해야할 시기가 점점 다가오는데 겨울이라서(12월 말~2월초. 12월 말은 사실상 연휴. 보통 1월 2째주부터 시작) 어디에 연락해도 다들 휴가 혹은 뭐 준비하는 게 없어서 와도 할 게 없다는 대답이었다(다행히도 현재 기수들의 Module 2는 봄으로 늦춰져서 Module 1 기간이 더 길어지고 Module 2 기간이 더 짧아졌지만 더 수월하게 진행된다고 한다). 나는 워크샵여행으로 다 같이 핀란드에 1주 정도 방문했을 때 만나는 사람에게 받았던 명함에 적혀 있는 메일로 무작정 모든 사람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 중 한 사람에게 정말 아무거나 일해도 된다면 핀란드농아인협회에 오라는 긍정적인 연락이 왔다. 그 사람 또한 처음에 거절했지만 발을 동동 굴리는 내가 안쓰러워선지 도와준 눈치였다. 핀란드에서의 인턴쉽은 1달. 1월 초중순부터 시작한다고 해서 그 전엔 뭐할까 고민하다가 전부터 늘 가고 싶었던 포르투갈에 가기로 했다.



Lisbon, Portugal

이 또한 여러 사람 도움으로 포르투갈 리스본에 사는 한 분의 집에서 홈스테이할 수 있게 되었다. 방 한 켠을 내주셨는데 정말 아무  것도 안 받으셨고 늘 예뻐해주셨다. 처음엔 그저 친절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이겠지 생각했지만 리스본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몇 농 친구들도 만나면서 이야기 나누다가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이 포르투갈 농사회에서 크게 기여해서 많은 이들이 그 사람을 존경하고  있다는 걸. 깜짝 놀라서 그 이야기를 들은 날 밤에 그 분에게 이 귀한 분의 집 한 켠을 내어준 거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손사래 치며 우리는 친구니까 그 이야기는 신경쓰지 말고 편하게 지내라고 하셨다. 굉장히 겸손하신 분이셨는데 또 알게 된 건  WFD에서 명예훈장도 받았다는 거. 사람 일 정말 앞 일 한치도 알 수 없다는 게 딱 이 일 같았다.


이후 2019년 프랑스 파리에서 만나서 남편 소개도 하고 저녁 식사도 대접했다. 본인이 저녁 산다고 하는 걸 내가 1달 동안 리스본에서 신세진 게 굉장히 많은데 이것도 대접 못 하게 하면 섭섭하다고 하자 허허 웃으셨다. 지금도 감사한 분들 중 한 분.



Helsinki, Finland

포르투갈에서의 긴 연휴를 마치고 인턴쉽을 위해 핀란드 헬싱키로 날아갔다.

꽤 혹독했다.

포르투갈에서  어느 누구 만나더라도 따뜻한 환대를 받아서 한국과 비슷한 정을 느꼈는데 여기선 없었기에.

나중에 알고 보니 북유럽 사람들 중 핀란드 사람들이 유난히 차갑고 마음을 잘 안 연다고 한다. 그렇지만 한 번 마음을 열면 평생 친구가 된다고 한다.

핀란드농아인협회 내 미디어팀에 배정을 받았지만 거기서도 딱히 할 게 없어서 잡일을 하면서 여러 부서들을 돌아다니면서 어떤 일이든 불러달라고 이야기하면서 돌아다녔다.

어느 날 핀란드에 온 다른 나라 농인들을 위한 핀란드어 수업에 참관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그 후엔 죽 거기서 일했다. 수업은 초급반, 중급반으로 나눠져있었는데 나는 초급반에서 조교 비슷한 일을 했다. 초급반 학생들 모두 난민이었는데 본인 나라에서 학교 다닌 적도 없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수업도 더디게 진행되어서 핀란드어를 모르는 나도 반복학습으로 인해 학생들을 도와줄 수 있었다. 주 2-3회 3-4시간 정도의 짧은 인턴쉽이라 그 외엔 헬싱키 시내 구경하거나 홈스테이집 집 한 켠에 있는 내 공간에서 쓸쓸한 겨울을 지냈다. 사실 많이 외로웠다.  



Class


Module 3 때 스스로 놀란 점은 Module 1 때와 달리 수업을 따라잡기 쉬웠고 좀 더 편안해졌다. Module 2 때 다양한 농인들을 만나서 국제수화로 대화하다 보니 자연스레 늘어난 거 같았다.

슬슬 마무리하고 헤어질 준비를 해야 했을 때 심경 변화가 많았다. 많이 운 만큼 많이 웃고 매순간을 소중히 보내려고 노력했지만 서로 티격태격 싸우는 건 여전했다.


위 사진에 나온 알록달록한 이름은 10주년 준비할 때 아이디어를 내 만든 10년 동안의 학생들 이름이다. 거의 도움 없이 혼자 다 한 거나 마찬가지라서 애정있는 벽이었는데 수료 후에도 선생님들이 이 벽은 내가 남긴 유산이나 마찬가지라면서 나만 괜찮으면 이 작업을 계속 하면 좋겠다고 하셨다. 덕분에 매년 새 학생들이 입학할 때마다 미리 명단을 받아서 작업해서 국제 우편으로 보낸다.

올해부터  미국에 있지만 이 작업은 진행형. 중간에 한국인이 입학할 때는 더 일찍 학생 이름 명단을 받아서 작업한 뒤에 봉투에 봉인해서 그 학생 편으로 보냈다.


참고로 지금까지 Frontrunners에 간 한국인들은 16기 기준으로 총 6명(여5, 남1).

5기, 9기, 10기, 12기, 13기, 16기.    

16기생은 첫 남자이자 최연소. 국제수화 제자이기도 해서 더욱 더 애정이 가는 후배.


 Frontrunners는 지금 유럽 농사회 내에선 졸업장을 내밀면 학사 학위까지는 아니여도 나름대로 인정 받는 기관으로 더욱 더 견고한 입지를 다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10기까지는 공인된 졸업장이 아니라서 수료증이지만 정말 많은 선배들이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곳에서 작고 큰 활동을 하고 있다. 수료, 졸업을 떠나서 Frontrunners라는 이름이 학벌까지는 아니여도 점점 여기저기에서 인정하고 있어선지 우연히 선후배를 만나게 되면 금방 마음을 열고 서로 추억의 상자를 열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2015년 5월 중순쯤 Module 3이 끝난 후 유럽에 더 머무르기로 했다. 7월에 터키에서 WFD 정기총회 및 컨퍼런스가 열리는데 4년마다 열리는 큰 행사라서 꼭 참석하고 싶었다.



Det Kongelige Bibliotek in København


코펜하겐으로 가서 두 달 정도 코펜하겐살이를 하려고 어디서 머무를 지 알아봤는데 인복이 많아선지 코펜하겐 근처에 사는 한 가족 집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 친구네는 코펜하겐 시내와 버스로 20분 거리에 있는 거리에 있는 곳에 살고 있어서 거의 매일 코펜하겐 시내에서 돌아다녔다. 가고 싶었던 덴마크 왕립 도서관에도 갔는데 위 사진이 그 곳. 정말 크고 예뻤던 도서관이었다. 블랙다이아몬드 별칭이 단박에 이해되었다. 외관이 딱 그 모양이었기에. 시내 돌아다니기도 하고 가끔 친구들도 만나서 놀았다.


그런데 뒤늦게 찾아온 질풍노도 시기였나, 온 마음을 다해 학교 생활을 하다가 그 곳을 떠나서 그랬나 왜인지 몰라도 마음이 너무 아팠고 힘들었다. 한 달여만에 미국 워싱턴 디씨에 있는 친구의 방으로 도망갔다. 마침 그 친구는 오랜만에 한국에 가게 되어 그 방이 비게 되어 그 방을 나에게 내줬다. 그 때 비행기표 값은 생각 하나도 안 하고 바로 끊어서 짐 바리바리 싸서 새벽에 공항으로 갔다. 그 가족은 갑작스런 결정에 놀랐지만 괜찮다면서 언제든 돌아오라고 집 열쇠 들고 가라고 나를 다독여줬다. 그 따뜻한 환대 덕분에 좀 더 힘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미친 짓이었지만 그때의 패기가 아닐까 싶다.



Gallaudet university

그 친구 집은 Gallaudet 대학교에서 5분 거리도 안 되는 곳에 있었다. 비록 여름방학이라 텅텅 비었지만 교정을 거닐며 천천히 구경할 수 있었다. 한국인 유학생 외에 다른 나라 유학생들 몇 명하고도 교류할 수 있었고 시간날 때마다 무료 입장할 수 있는 박물관도 가보고 하염없이 여기저기 걷기도 했다.



WFD 정기총회 폐막식



드디어 WFD 정기총회와 컨퍼런스가 열리는 날이 코 앞으로 왔다. 터키로 향하는 여정은 고되고 힘들었다. 미국에서 코펜하겐으로. 코펜하겐에서 터키로. 경유를 세 번이나 한 셈. 워싱턴 디씨-코펜하겐 왕복 티켓, 코펜하겐-터키 왕복 티켓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정이었다. 코펜하겐으로 다시 돌아간 이유는 한국 - 코펜하겐 왕복티켓이었기에. 지금도 있는 티켓인지 모르겠지만 오픈티켓이라고 일 년 내에 돌아오는 날짜를 기입하면 되는 거라서 WFD 정기총회 이후에 무조건 코펜하겐으로 돌아가야 했었다.

그래서 터키 일정이 마친 뒤에 코펜하겐 홈스테이 친구네에 1주일 더 머무른 뒤에 한국으로 가게 되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터키에서의 일정은 즐거웠다. 세계 각국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있단 게 놀랍고 신기했다. 심지어 북한 농인들도 만났고. 관심 있는 발표 보기 위해 방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많은 정보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별로다 싶었던 이유는 이미 Frontrunners에서 많은 걸 배웠기 때문에 정말 새롭다 이런 건 별로 없었다. 만약 Frontrunners에 가지 않았다면 모든 발표가 새로웠을 거다. 그렇지만 그 세계 무대에 발을 들인 거만 해도 나를 굉장히 들뜨게 만들었다.


WFD 정기총회와 WFDYS(World Federation of the Deaf Youth Section) 정기총회는 같은 날, 같은 장소에 열렸다. Frontrunners 다닐 무렵 WFD, WFDYS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WFDYS 이사(임원) 활동 하고 싶었다. 4년 간의 긴 활동기간은 망설여졌지만 만 30세까지만 지원 신청서를 낼 수 있었기에 이번 기회를 놓치면 4년 뒤에는 나이 제한으로 인해 신청할 수 없었기에 신청할 수 있는 방법을 한 번 알아봤다. 나라별로 한 명만 지원할 수 있어서 한국농아청년회 내 조건을 알아보니 조건이 안 맞아 퇴짜 맞았다. WFDYS 정기총회 당일까지 지원서를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현지에 와 있던 한국농아청년회 회장단에게 한 번 더 물어봤지만 결국 지원서를 낼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10기 동기 친구 두 명(뉴질랜드, 가나)이 공약발표 및 당선된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정말 기뻤고 자랑스러웠다.


그 날 우리 셋은 이 약속을 했다.

2017년에 호주에서 개최될 WFDYS Junior camp에서 만나기로.

두 친구는 WFDYS 이사로, 나는 한국청소년팀을 이끄는 리더로.

이 약속은 지켜졌지만 지켜지지 못 했는데 이 이야기는 나중에 WFDYS에 대한 글을 쓸 때 나올 거라 조금 더 아껴두기로.


터키에서의 바쁘고 뜨거운 열기가 사그라들 무렵 코펜하겐으로 돌아가서 마지막 일주일을 잔잔하게 보냈다.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올 수록 마음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거 같았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내내 마음 속으론 비가 세차게 내렸다. 인천국제공항에 마중 나온 친구 만났는데도 반가우면서도 반갑지 않았다. 서울행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내 표정 한 쪽에 그늘이 내려졌나보다. 그 곳에 중요한 뭔가를 두고 온 거 같다면서 영원한 마지막은 아니라고 토닥여줬다. 고마웠어, 친구야.



학교 뒷편에 있던 오솔길 건너면 탁 트인 들판이 보였는데 거기가 내 아지트였다.



Frontrunners 여정기를 마무리하기 전에 그 당시에 내가 쓴 글 몇 개 공유하고 싶어 블로그에 비공개로 올려둔 글 몇 개 캡처했다. 지금 읽어보기엔 조금 오글거리긴 한데 그때의 감정은 글 아직도 느껴진다.  


'수용'
인연
관점


Frontrunners, Castberggård


항상 그리운 마음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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