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 작가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를 읽고 씀
그림책은 어린이, 어른 누구나 이해하며 함께 볼 수 있는 책이다. 글 없이 그림만으로 이야기를 전하기도 하고, 짧은 글과 그림이 함께 이야기를 전하기도 한다. 그중 글과 그림이 함께 있는 그림책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새로 나타나는 글과 그림 사이에서 이야기의 의미와 재미가 생긴다. 그림책 작가가 글과 그림을 둘 다 창작하기도 하고, 글 작가가 쓴 글에 그림 작가가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그림책에서 글은 그림을 말해주는데, 때로는 그림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남 일인 것처럼 시치미 뚝 떼고 다른 얘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림은 글이 말하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거나, 글이 말하고 싶었던 속 얘기를 알아채고 품에 안은 의미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하나의 글을 다른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 번역이고, 나의 경험과 생각, 감정을 글로 쓰는 것 또한 번역이라면, 나의 마음에 존재감을 드러내며 다가온 글에 그림을 그리는 것 또한 번역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글이 품은 의미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 글 작가가 글을 통해 전하려 했던 것을 그림으로 전하고 글의 심장에 가까워지는 것도 번역 아닐까?
한 권의 그림책은 과거 한 그루의 나무였으니, 그림책에서의 글은 나무의 굳건한 기둥이자 줄기라 할 수 있겠다. 강한 폭풍우에 곧 부러질 듯 부러지지 않는, 파르르 흔들리며 버텨내는 강인한 줄기. 이처럼 글의 줄기가 단단히 뿌리내린 덕분에 깊은 땅속으로부터 물과 영양분을 가득 끌어 올려 그림이라는 이파리를 틔우고 꽃을 피운다. 그리고 활짝 펼쳐진 그림의 이파리는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받은 영양분을 글의 뿌리가 더 튼튼히 뻗어나가도록 내려보낸다. 나무의 뿌리와 이파리처럼, 그림책의 글과 그림은 서로 돕고 힘을 주고받는다.
그림은 글이 든든하게 뿌리내린 것을 기반으로 더 위로, 더 높이, 더 멀리 뻗어나간다. 나무의 시야를, 책을 읽는 독자의 시야를 담장 너머로 지붕 위로 옮긴다. 그리고 그 너머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따라 더 넓은 세상을 보여준다. 담장 너머, 지붕 너머 어떤 풍경을 보여 줄지는 그림 작가에게 달려있다.
하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원글이 번역가의 몸과 삶을 통과해 나오는 것. 하나의 글에 번역가마다 다른 글이 나오는 것처럼, 그림책의 그림 역시 하나의 글에 그림 작가마다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나는 원작을 이렇게 읽었고, 이렇게 생각한다.’라는 번역가의 시선이 반영되듯, 그림책의 그림 또한 그림 작가의 삶의 경험에 따라 글을 읽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이, 그림으로 그려지는 내용이 다르다. 원글의 특징과 원작자, 글작가의 ‘어떤’ 목소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 그렇다고 글에 너무 메여있어도 안 되고, 글에서 과하게 벗어나도 안 되는 번역 그리고 그림책의 그림. 그래서 재미있다. 그림책의 그림은. 글과 그림이 만들어 내는 이 긴장감과 줄다리기에는 강한 중독성이 있다. 이 팽팽한 밧줄 위, 그림 작가는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 아슬아슬 쓰러질듯 하면서 우아하게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어떻게’ 균형을 잡고 ‘어떤’ 자세로 착지할 것인가. 이 수많은 선택이 작가만의 ‘스타일’이 되는 것 아닐까.
요즘 여러 기초 학문 연구 분야의 국가 예산 삭감 소식이 들린다. 국내 출판 지원 예산도 크게 삭감되어 출판 종사자들은 물론 프리랜서인 작가들도 걱정이 커진 요즘이다. 거기다 한 단체가 성교육, 성평등 관련 어린이 금서 목록 만들어 도서관 열람 제한과 폐기를 요구했다. 여기에 정치인들도 가세해 충남교육청 소속 도서관 19곳 가운데 14곳은 열람 제한을, 그중 10곳은 열람은 물론 검색까지 제한했다. 김장성 작가의 그림책 서평집 <사이에서, 그림책 읽기>의 여는 글에서 작가는 말한다. ‘사람이 괴물이 되기, 사람을 낳아 괴물로 키우기 쉬운 세상’에서 괴물이 아닌 사람답게 살기 위해 그림책을 함께 읽어보자고.
어른들은 그림책이 전하는 메시지가 어린 시절 배웠던, 자신이 전부 아는 얘기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많은 그림책이 말하는 타인을 향한 기본적인 예의와 배려를, 아이들에게 사려 깊게 알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본인이 행하며 살고 있는가? 결과에 상관없이 도전하는 용기와 그에 보내는 격려를, 시대에 뒤처진 비효율적인 얘기라며 코웃음 치고 있지는 않은가? 괴물 되기 쉬운 세상에서 반쯤은 괴물이 된 어른들이 잊고 사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림책을 보면 알게 된다. 위에서 말한 서평집처럼 사람답게 사는 게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다들 그림책을 보았으면 좋겠다. 글과 그림이 뿌리를 내리고 이파리를 펼치고, 꽃을 틔운 뒤 탐스러운 열매 맺을 때, 독자는 그 열매 똑 따서 맛보기만 하시길. 그리고 책을 덮은 뒤 입 안에 남은 그 맛을 충분히 느껴보시길 바란다. 가을이니까. 도서관에 많은 그림책 나무가 자기 열매를 맛보아 주길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