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떤 걸 신어볼까…?’
신발장 앞에서 이런 고민을 하는 성인 여성을 본다면, 보통은 그녀 앞 신발장 안에는 각양각색의 예쁜 구두들이 빼곡히 쌓여 있다고 상상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수많은 농구화 모델들로 빼곡히 쌓인 신발장 앞에서 어떤 걸 신고 잘 뛰어볼까를 고민하고 있다. ‘농구화로 빼곡히’라고 적고 보니, 구체적인 숫자를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하나, 둘, 셋, …, 서른아홉, 마흔! 많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지만, 숫자로 확인하는 것은 확실히 체감하는 바가 다르다. 아니 나는 대체 어쩌다 이렇게 많은 농구화를 사게 된 것일까?
2014년 말 팀에 조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코비 X 엘리트 로우(좌측 사진의 최하단 왼쪽에 위치한 블루 컬러 농구화)’라는 농구화를 샀다. 그 당시 나는 농구의 기본 요소인 드리블, 슛, 패스를 어설프게나마 다 할 수는 있었지만, 성인이 된 이후 실내 코트에서 각 잡고(!) 농구를 해볼 일이 없었기에 나에게 농구화는 전무했다. 생애 첫 농구화라 어떤 걸 골라야 할지 몰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가장 잘 나가는 선수 이름이 들어간 코비 시리즈를 선택했다(NBA 선수 시그니처 모델은 숫자가 붙어 시리즈로 출시되는지도 전혀 몰랐던 나였다). 그렇게 장만한 코비 농구화는 2017년 아디다스 크레이지 코트 3X3 대회를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일요일 정기 연습을 함께하는 ‘유일(唯一)’한 농구화였다.
언제나 “즐농”을 추구하던 우리 팀이 기업이나 지자체에서 주최하는 공식 대회를 나간 건 아디다스 대회가 처음이었다. 대회 참가 요건은 당사 최신 농구화를 구매하는 것이었고, 그 기회로 나는 두 번째 농구화를 샀다. 아니, 사실 마음에 들어서 샀던 것은 아닌지라 ‘사게 됐다'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리고 그땐 미처 몰랐다. 농구화는 그저 대회 참가의 자격 요건 중 하나일 뿐이었는데, 이후에 농구화라는 것이 나의 농구 라이프를 완전히 바꾸게 됐다는 것을!
그 당시의 나는 농구 신생아였지만, 팀의 에이스였던 멤버들과 함께 나간 덕에 예상 밖으로 준결승 진출이라는 좋은 성과를 이뤄냈다. 준결승에서 결국 패배해 대회는 끝이 났지만, 사실 나의 농구는 그때 시작됐다. 대회 준비를 위해 주말 새벽에 모여 연습하면서, 그리고 경기 내내 긴박한 분위기와 거친 수비 속에서 한 골이라도 더 만들기 위해 집중하는 순간을 경험하면서 농구라는 스포츠를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내가 조금 더 잘했다면(=개인 기량이 더 좋았다면) 결승까지도 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나를 각성하게 했고, 조금 더 '농구다운 농구를 해보자'라는 동기로 작용했다.
농구를 제대로 해보겠다는 다짐을 한 이후에는 이를 어떻게 실행으로 옮길지, 그 시작은 어디로 잡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뒤따랐다. 여러 접근법을 고민해 봤지만 그래도 ‘운동은 장비 빨’이라는 속설을 무시할 순 없었다. 해외/국내 유튜버들의 농구화 언박싱과 리뷰 영상을 줄기차게 찾아봤다. 이 신발은 이래서 좋고, 저 신발은 저래서 좋다고는 하는데 농구화에 문외한이던 시절이라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인지 감이 오지 않았기에 선택의 첫 번째 기준은 지금 가지고 있는 운동복과 어울릴만한 디자인과 컬러였다.
고심 끝에 두, 세 켤레의 농구화를 장만했다. 뭔가 투자를 했으니 충분히 자주 신어야 남겠다 싶었고, 자주 신기 위해서는 농구를 더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래서 개인 대관이 가능한 체육관을 찾아 주 4회 새벽 농구를 하기 시작했다. 출근 전 새벽 농구를 하니 매일 밤 다음날 농구하는 상상으로 출근하기가 덜 싫었고(?), 네댓 켤레로 늘어난 신발을 보며 내일은 뭘 입을까 코디하는 시간으로 소확행을 누렸다. 문제가 있다면, 코디를 하다가 ‘아… 이 색깔의 농구화도 있었으면 좋겠는데'라는 마음으로 또 새로운 농구화를 찾아보고 사게 됐다는 점…?
그렇게 코디하는 재미로 신발장에 농구화는 점점 늘어났다. 열 켤레를 갓 넘은 시점이었을까? 여러 신발을 매일 돌아가면서 신어보니 점차 신발마다의 차이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의 농구화 쇼핑은 제2막에 접어든다.
1년간의 새벽 연습으로 다양한 움직임들(각종 드리블, 슛 동작, 포스트 움직임 등)을 할 수 있게 되고 나서는, 농구는 오히려 하체 움직임(풋워크)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연습할 때 발에 더 많이 집중하게 되면서 신발 간의 차이가 더 확연히 느껴졌다. 내 발 모양에 맞는 신발이 무엇인지부터 농구화 기능들의 차이까지도 말이다. 신발을 신고 몇 번 뛰어보면 접지, 쿠션, 지상고, 피팅감, 코트필, 착화감 등이 어떤지 바로 판단할 수 있었다. 그제야 ‘농구화를 모르고 보던 시절 리뷰어들이 하는 이야기가 이거였구나!’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농구화의 대부분은 NBA 탑 플레이어들의 시그니쳐 모델들인데, 각 모델은 해당 선수의 포지션에 맞게 그리고 선수의 장점을 극대화하도록 만든 신발들이기 때문에 확실히 특징이 뚜렷했던 것이다. 기능이 어떻게 다른지 몸으로 느껴지니 다음 날 연습할 드릴에 따라(코디하는 재미는 배제하고) 신을 신발을 선택했다. 레이업이나 점프슛 위주로 할 때는 쿠션이 더 좋은 신발, 스텝 밟으면서 드리블 연습을 할 땐 가볍고 접지 좋은 신발을 고르는 등 나만의 기준이 생겼다. 농구화의 기능에 대해 눈을 뜬 이후부터는 신규 모델이 나오면, 디자인이나 컬러보다는 이건 내 발에 잘 맞을까, 실제 기능은 어떨까를 생각하며 결제하는 나를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무한루프 속에서 2~3년을 보냈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발목 부상과 아침 시간을 내기 어려워진 탓에 2020년 가을, 나의 새벽 농구와 농구화 쇼핑의 여정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2년 반 동안 평균 주 4회 아침 1시간, 도합 520시간과 40켤레의 농구화(합산 금액은 알고 싶지 않...)에 아낌없이 투자했었는데… 그 투자가 나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구기종목을 즐겨 해온 나는 개인적으로 어떤 종목이든, 내 몸과 공을 내 자유 의지대로 적절한 타이밍에 컨트롤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목표를 두는 편이다. 520시간 동안 무엇을 그리 연습했나 싶겠지만, 농구는 손과 발을 쉼 없이 움직이다 보니 다양한 조합의 동작이 있고 그 동작들을 제대로 하기까지 긴 시간과 꾸준한 연습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드리블은, 제자리 드리블로 공을 손에 먼저 익히고, 스텝에 맞춰서 드리블하는 연습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슛 동작도 원투 스텝, 합 스텝으로 공을 받고 바로 슛하는 것부터, 슛 페이크나 드리블 후 바로 슛으로 이어지도록 연습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공을 받으면 피벗이나 잽 스텝 후 슛 또는 돌파+레이업으로 연결하는 연습, 골 밑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레이업(오른손/왼손 + 반대 발/같은 발 도약 + 리버스 등) 등을 연습했다.
이러한 연습 루틴이 지루하게 느껴진 때도 많았고, 새벽에 일어나기조차 힘들었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내가 오늘 신는 농구화의 선수들로 빙의해서 연습에 몰입했던 것 같다. 커리를 신고 커리가 돼서 드리블과 3점 연습을 하는 것처럼, 웬만한 시그니쳐 모델은 다 있으니, 듀란트도 됐다가 하든도 됐다가 르브론이 되기도 했다. 40켤레의 농구화가 있었기에 혼자 즐겁게, 무엇보다 꾸준히 할 수 있었고, 어느 정도 내 의지대로 몸과 공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됐다.
연습을 통해 익힌 동작들이 차츰 쌓이니, 주말에 팀 게임을 할 때도 달라진 모습이 나오기 시작했다. 볼을 키핑하고 공간을 확보하는 움직임을 익힐수록 상대를 인지하면서 다음 동작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시야도 넓어졌고, 또 그만큼 팀원들에게 더 확실한 득점 찬스를 만들어줄 수 있었다. 그리고 슈팅 연습 머신으로 수많은 슛을 던져보면서 슛 근육을 만들었기에 높아진 슛 성공률을 믿고 직접 득점할 때도 많아졌다. 옵션이 다양해지면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움직임을 해야 하는지 의식하고 움직일 수 있었다.
연마된 나의 움직임이 팀에 도움이 되고 있었고, 내가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고 있음을 느끼는 순간순간이 나의 노력에 대한 가장 큰 보상이었다. 2017년 대회 때 내 모습에서 씁쓸함을 느껴 시작한 나의 투자가 성취감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늘어난 농구화만큼 내 농구도 훌쩍 늘어 있었다!
내 신발장을 채우고 있는 농구화를 보면서 이 글을 쓰고 있자니... 내가 농구에 투자한 시간과 돈이 헛되지 않았음에 안도하는 동시에, 내가 자기합리화에농구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그 진심이 아직도 변하지 않았음을 느껴 농구에 대한 마음이 또 한 번 뜨거워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