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스물일곱 번째 날
“차오(이탈리아어의 인사말), 벨라.”, “좋은 아침, 벨라!”, “고마워, 벨라.” “벨라, 입맛에 맞니?”
내 이름은 벨라가 아닌데 이곳에서는 모두가 나를 ‘벨라’라고 부른다. 일면식도 없어 통성명한 적조차 없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낮에 친구 M의 어머니를 처음 만났는데, 그녀는“벨라, 너는 이름이 뭐니?”라고 내 이름을 물으셨다.
사람들이 ‘벨라’라고 부를 때면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할 것 같다. 그중에서도 유독 ‘벨라’라는 단어를 강조하시는 분들을 만나면, 칭찬을 듣고 쑥스러워하는 아이처럼 몸이 배배 꼬일 거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럴 때면 이를 티 내지 않기 위해서 부자연스러운 눈웃음까지 쥐어 짜내며 수줍게 웃어버린다.
‘벨라’는 내가 가장 처음으로 배운 이탈리아어 단어 중 하나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만나는 사람 마다 나를 ‘벨라’라고 부르니,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이 단어는 나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어를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가장 먼저 익히게 되는 단어일 것이라고 확언할 수 있다. ‘벨라’를 한국어로 옮긴다면 ‘아름다운, 예쁜이, 예쁜 여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 뜻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사람들이 말끝마다 ‘예쁜 아이, 예쁜 여자’라고 부를 때마다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됐다. “정말 한국의 정서와 다르다. 말끝마다 예쁜이라니!” 글을 빌어 조금 더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내 동양적인 이목구비가 이탈리아에서는 먹히는구나!”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이탈리아인들의 습성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오늘 오전 S와 함께 과일을 사러 나갔다. 오색찬란한 과일과 저마다 개성 있는 푸른빛을 띠는 채소가 가득한 상점이었다. 사장님은 과일가게 앞에서 기웃거리는 우리에게 “벨라! 포도 먹어볼래?”라며 포도알을 몇 개 건네주셨다. 그리고 나서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후보처럼 모든 손님에게 인사를 건네며 장사를 이어가셨다.
“벨라! 요즘 복숭아가 아주 달아요.”
포도의 맛을 음미하며 사장님의 우렁찬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 시선의 끝에는 머리가 양배추처럼 하얀 할머니가 복숭아를 들고 향을 맡고 계셨다.
태연한 목소리로 할머니를 ‘예쁜이’라고 칭한 사장님을 보며 매우 놀랐다. 할머니보다 젊어 보이는 남자가 할머니에게 ‘예쁜이’라고 호칭하는 상황이 유교 사상을 밑바탕으로 나고 자란 내 기준에서는 예의가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할머니와 친구 S의 반응에 더 놀랐다. S가 혹시 못 들은 건 아닌지 확인 사살에 나섰다.
“방금 들었어?”
표정과 질문을 통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미 모든 것을 이해한 듯한 S는 능청맞게 웃으며 말했다.
“이탈리아에 있는 한, 모든 여자는 ‘벨라’야.”
이 사건을 계기로 단어에 잠재된 이탈리아인들의 습성을 알게 됐다. 모든 이탈리아 여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제2의 이름을 갖게 된다. 그 이름이 바로 ‘벨라’다. 파울라 벨라, 카롤리나 벨라, 마리아나 벨라, 프란체스카 벨라, 토마토 벨라, 친구네집 고양이 벨라, 이탈리아에 가지고 온 나의 캐리어 벨라.
이 호칭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효력을 발휘한다. 그간 누군가가 나를 ‘벨라’라고 부르면 수줍게 웃었던 지난 일을 떠올렸다. ‘아! 동양인은 수줍다는 몹쓸 선입견에 무게만 실어주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자신을 질책했다. 이탈리아에서 ‘예쁘다’라는 말은 칭찬이 아닌, 그냥 예의상 주고 받는 인사말과 같은 것이다. 정말 누군가가 호감을 표하기 위해서 칭찬을 건넨다면, ‘매력적이다’와 같은 표현을 쓸 것이다. 오늘도 이렇게 그들의 삶에 더 가까워지는 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