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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Tube Jan 28. 2021

제14편 '간겁시신'

제14편 '간겁시신'

간사한 계략으로 군주를 겁박하고 시해하는 신하

지금 신하가 칭찬하는 바를 군주가 옳다고 여긴다면 이를 '동취(취하는 것을 함께함)'라고 하고, 신하가 비방하는 바를 군주가 그르다고 여긴다면 이를 '동사(버리는 것을 같이함)'라고 한다. 무릇 취하고 버리는 것이 일치하는데도 군주와 신하가 서로 반목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것이 신하가 신임과 총애를 얻는 방법이다.
현명한 군주는 천하 사람들이 자신을 위하여 보지 않을 수 없도록 하고, 천하 사람들이 듣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그래서 자신은 깊은 궁궐 속에 있으면서도 천하를 모두 밝게 비춰볼 수 있으며, 천하 사람들이 군주의 눈을 가릴 수 없고 속일 수도 없으니 무엇 때문인가? 군주를 현혹하고 어지럽히는 방법은 폐지되고, 군주가 총명해지는 형세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세에 잘 맡기면 나라가 안전하고, 그 형세에 의지할 줄 모르면 나라는 위험에 빠질 것이다.


군주도 사람인지라 본인과 생각이 같은 사람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기미가 보인다면 신하는 그 군주의 좋고 싫음을 함께 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군주와 신하는 자연스레 친하게 됩니다. 이렇게 군주의 신임과 총애를 얻은 신하는 본인의 이익을 더 추구하게 되고, 당파를 만들며, 나아가 나라를 망하게 할 수 도 있습니다. 간신입니다. 때문에 군주는 궁궐 속에 들어가라고 합니다. 깊은 궁궐 속에 들어가서 법과 술만 잘 행해도 간신을 멀리할 수 있으며, 오히려 세상 곳곳을 더 잘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나라가 안전해집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할 수 있지만 결국 기본은 명확한 규칙, 그리고 상과 벌을 군주가 직접 휘두르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앞에서 계속 말하고 있는 것과 일치하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한비자에서 바라는 궁극적인 모습은, 신하는 군주의 마음을 얻어 공을 세울 수 있게 전력을 다하고, 군주는 일단 등용한 신하를 믿고 일을 맡기며, 그 결과에 따라 상과 벌을 주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 시스템이 선순환되면 자연스레 나라가 안정이 될 것이라고 한비자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양자가 지백을 처형하려고 하자 예양은 곧 스스로 얼굴에 문신을 새기고 코를 잘라 외모를 흉하게 만들고는 지백을 위해 양자에게 원한을 갚으려고 하였다. 이것은 비록 군주의 명예를 위해 몸을 상하게 하고 군주를 위해 목숨까지 바쳤다는 명성은 있지만, 실제로 지백에게는 가을 터럭 끝만큼의 보탬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하찮게 여기는데, 지금 세상의 군주들은 그를 충성스럽고 고매하다고 평가한다.
옛날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의) 무왕이 천하를 넘겨주려고 하자 받지 않고 두 사람은 수양산 구릉에서 굶어 죽었다. 이와 같은 신하는 엄한 처벌도 두려워하지 않고 후한 상도 탐하지 않으니 벌을 내려 금지할 수도 없고 상을 내려 부릴 수도 없다.

이들을 가리켜 무익한 신하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을 경시하여 내쳐야 할 신하로 여기지만, 지금 세상의 군주들은 그들을 중시하여 구하려 하고 있다.


한비자에서는 유가, 즉 공자로 대표되는 유교 사상에 대해 비판하는 부분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가에서 말하는 '인의'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무쓸모 하다고 하고 있는데요. 그 견해를 볼 수 있는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충의로 유명한 협객인 예양, 그리고 고고한 선비의 표본인 백이와 숙제를 모두 직접적으로 까고 있습니다. 한비자에 따르면 그들은 하찮은 신하, 내쳐야 할 신하입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수긍이 갑니다. 충의를 지킨다고 본인의 몸을 극단적으로 죽음에까지 몰아가 봤자 그것으로 뭔가 바뀐 것이 있는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인품이 훌륭하다고 한들 그 사람이 나라에 쓰여서 도움이 되는가? 모두 아니라고 합니다. 때문에 무의미한 신하인 것입니다. 물론 유가에서는 그들이 하나의 본보기로 세상 사람들에 영향을 끼치겠지만요.


상당히 냉혹하게 현실적이며 결과 지향적인 해석입니다. 당시 한비자와 그 시대가 마주한 가장 큰 문제는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끝내는 것이었고 그렇기 위해서 냉혹하더라도 과감한 결정들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군주에게 나라의 경영은 본인의 생존이 걸린 문제라 한가롭게 훌륭함을 칭송하고 있을 시간은 없습니다. 당장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신하가 있어야 합니다. 은둔 고수는 그 누구에게도 실력 발휘를 할 수 없는 사람일 뿐입니다.


이 오래된 책이 현재에도 의미가 있다면 이는 현재의 상황 역시 춘추전국시대와 마찬가지로 혼란스럽고 치열하게 싸우는 세상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행위자가 국가가 아닐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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