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
"사람에도 제자리가 있어서 그 사람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그가 살아 보이기도, 죽어 보이기도 합니다"
- 키키 키린
이삿짐센터 아저씨는 1분에 한 번씩 '원래 안 해주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가구가 들어오면 어차피 다시 정리해야 해서 그냥 두셔도 돼요. 진심입니다"라고 대답해도 소용이 없었다. 모처럼 포장이사를 선택했지만 다시 풀어놓을 곳이 정해지지 않아서 곤혹스러웠다. 이건 어디? 저건 어디? 를 백 번 정도 물으셔도 들어갈 가구가 없었다. 그나마 서너 개 되는 서랍과 주방에는 자주 쓰는 것을 깊은 곳에, 여분의 것을 얕은 곳에 나열해 두셨다. 세 명의 아저씨와 한 명의 어머님이 분주히 움직이고 땀냄새, 담배냄새, 힘주는 소리와 서로를 향한 고함, 찌그러진 스탠드 조명, 사라진 압축기, 지근지근 밟아서 찢어진 매트리스 커버. 사방에서 테이프 뜯는 소리, 이사는 이런 현장감이 당연한 일이고 체력적으로도 몹시 힘든 일. 그만큼 나의 감각도 박박 뜯기고 수차례 접힌 채 고단함과 불만을 고스란히 느꼈다. 여분의 수고비를 요구하는 뉘앙스도 추가된다. 홀연히 떠난 후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들과 함께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살던 집에서 쫓겨난 탓도 아니고, 남편이 이윤도 남지 않는 전시설치를 한다고 며칠 들어오지 않아서도 아니고, 아이와 둘이 이사를 하느라 긴장한 탓도 아니고, 두 배나 큰 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지난 살림들이 궁색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맨땅에 헤딩'이 지긋지긋해서, '빌린' 맹지에 농사짓듯 사는 삶에 지칠 대로 지쳐버렸기 때문에. 도대체 우리의 자리는 어디인지 선명하게 알고 싶었고 누군가 뿌리내릴 곳을 정해줬으면 바랐다. 차라리 대를 이을 가업이라도 있었으면, 떡을 빚든 기계를 돌리든 시키는 대로 하고 싶었다. 시골집이라도 있었으면 고쳐 살았을 텐데. '왜! 나만 덕선이야!' 소리치던 둘째의 설움처럼 평생 내 건 왜 하나도 없냐고 대들고 싶었다. 왜 우리만 0부터 100까지 하고 앉았냐고 엉엉 울었다. 이름 있는 회사를 때려치운 내 뺨도 후려치고 싶었다. 새벽 두 시 퇴근, 자꾸 돌아가던 치마를 입고 경쟁사 스니치 짓을 끝도 없이 시켜댔지만 버텼으면 지금의 불안정함을 겪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사할 때마다 박탈감과 회한에 시달리다가 10분 정도 조금 울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소매로 눈물을 콕콕 찍고 두어 번 훌쩍거리다가 양 볼을 밀어내 입술을 일자로 만든다. 광대를 끌어올려 해탈의 미소 한 번. 울분과 눈물조차 '생기'의 일부야. 찰나의 회상대로 살았다면 분명 부적소의 죽상이었을 거야' 단정 짓는다. 사실은 불안과 불안정이 뭐라고 지껄여도 나는 나를 안다. 굳이 내 손으로 해야만 하는 그런 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나의 자리는 현현의 영역이 아님을 안다. 또 얼마나 많은 이사를 하게 될지 모르지만 말이다. 남편과 아들이 "다녀왔어"라고 말하는 자리, 그 자리를 지킬 것임을 안다. 가진 것에 한해서 최고치를 이끌어 내는 능력 또한 불안정한 적소 때문인 것을 안다.
어린 시절 엄마는 아빠의 사무실 일을 돕느라 우리 남매를 외가 식구들에게 맡겼다. 아빠는 손재주가 좋아서 뭐든 척척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납품, 수금과 같은 운영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시집살이도 바쁜 엄마가 사무실에 나가 거래처와 이웃 상인들을 챙겨가며 빈 틈을 메우는 동안 우리는 외할머니와 이모, 삼촌의 희생으로 자랐다. 엄마는 우리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빈집'인 채로 , 그 누구도 맞이하는 사람이 없는 채로 두지 않았다. 오후 서너 시의 주방에 서있으면 엄마와 나란히 앉아 그림을 그리던 날이 떠올랐다. 크지 않은 부엌의 창으로 해가 눕기 시작한다. 사선으로 내려와 흰 칠판이 윤슬처럼 빛났다. 그림을 그리면서 환하게 웃어주던 엄마의 머리카락 뒤로 테두리가 생겼다. 볕이 드는 곳에서만 부유하는 먼지가 보였다. 그날의 온기는 평생 이어졌다. 어른이 되어서야 그런 순간이 매일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엄마가 없는 날에도 엄마가 있는 것만 같은 평온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발버둥을 쳤을까. 내가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쌓아둔 커리어를 포기한 채 아이 곁을 지키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알았다. 득은 눈에 잘 보이지 않고 실은 매일같이 나타나 괴롭힌다는 것을. 아이와 함께 있든 밖에서 일을 하든 선택사항에 '포기' 밖에 없다면 내 자리는 하나라는 것을 알았다. 아이를 환대하는 자리. 그 안에서 무엇이든 만들어 내고 싶었다. 엄마와 함께한 부엌을 더 많이 손수 갖고 싶었다. 뻔히 죽어있을 자리에서 살아지는 대로 살 수가 없었다. 까다롭게 내 힘으로 살아낼수록 이렇듯 더디고 또 분명했다.
침대 프레임 말고는 딱히 들어온 가구도 없는데 물건들은 마법처럼 제자리를 찾아갔다. 늘 이 집에 있었던 것처럼 살아 보인다. 자리는 쓰임에 따라 정해지는 걸까. 뷰파인더 뒤에서 찰나를 맞이하는 나처럼, 글을 쓰는 나처럼, 아이를 낳아 기르며 살아온 나처럼 수천번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생기가 제자리를 말해주는 것만 같다. 매주 화요일 아이가 학교에 간 동안 조금, 잠든 시간에 조금 <모서리로 서기>를 썼다. 퇴고의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지만, 늘 그렇듯 툭툭 털고 일어나 옷소매로 눈물 꼭꼭 닦고 다시 웃어 보이는 마음으로 (손가락을 마구 갈기면서 나오는 대로) 썼다. 사진을 찍듯이 놓치는 대로, 흔들리는 대로 살아있음을 썼다. 도무지 옅어지지 않는 민감함을 달래고 툭툭 튀어나오는 이변에 고꾸라져도 원하는 방향대로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썼다. “괴상한(또는 고상한) 완벽주의 철퇴! ” 브런치를 시작하며 외치던 다짐 하나만으로도 죽어있던 세포가 숨을 쉰다. 다시 내 자리에서 또 다른 엣지를 발견할 시간. 꼭 맞는 케이스를 만들어 내면 냈지 우리의 모서리를 갈아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조금 더 문학적인 퇴고와 아끼는 사진들을 함께 엮어 낼 수 있기를 바라며....
(읽어주신 분들 고맙습니다. 해피 뉴 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