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nsible mediocrity
세 사람이 불협화음을 낸 지 11년 차, 우린 여전하다. 나는 남편을 속으로 '모순이'라고 부른다. 남편의 방은 엉망이다. 차는 말할 것도 없다. 매번 "차가 너무 작지" (렉스턴 칸) 말할 때마다 이젠 콧방귀도 나지 않는다. 버스를 사도 만족하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 추억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타입이라 13년 전 운영하던 업체의 거래명세서도 버리지 못한다. 옷방에는 '건조'라는 명목하에 시래기처럼 널린 옷들이 있다. (어떤 코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무용한 양말을 끝도 없이 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제 손으로 버린 적도 없다. 눈앞에 물건이 없으면 세상에 없는 것이고(서랍 속, 책상 위에 버젓이 있음) 어제 나눈 대화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새로운 프로젝트 서 너 개를 동시에 진행시킨다. 자영업자의 설움을 알기에 미수금을 받아내질 못하고 따라서 가족의 설움을 지연시킨다. 길 위에 개똥은 매의 눈으로 피해 가는데 바로 옆에 아들은 잘 못 본다. 자생력을 가져야 한다는 명목하에 입 하나로 교육과 훈육을 해결하려 한다. "너는 4학년인데 아직도 삼각김밥 비닐을 제대로 못 벗기냐"와 같은 지적질이 끝도 없다. 잔소리와 훈수가 은혜로운 설교인 줄 알기 때문에 나들이를 나가면 10분 단위로 기분을 잡치게 만든다. 공포의 주둥이와는 반대로 가족 중 생활습관이 가장 나쁘다. 눈뜨자마자 초콜릿이나 라면 국물을 먹을 수 있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이 얼굴에 떨어질 때까지 영상을 보는가 하면, 양육에 있어 본보기가 될 만한 행동은 일절 하지 않는다.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푯말만 보면 홀린 것처럼 들어간다. 게다가 결코 자책이나 성찰, 후회 같은 것도 하지 않는다. 민감한 인지적 감각들은 불안이 되고 대체로 수동공격으로 표출된다. 대상은 남편의 언행과 생활습관을 포기한 채로 지내는 나와 아들이기에 그의 모순된 가르침이나 감정 호소는 공감받기 어렵다. 그의 화살은 언젠가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지만, 이젠 몇 미터 가지도 못한 채 힘없이 떨어지고 만다.
"타블로가 엔팁일까?"
"전혀. 투컷이면 몰라도"
"헉. 내가 그렇게 보이는구나"
그는 자신을 똑똑하고 유머러스한 사람으로만 여겼다. 틀린 말은 아니다. 적재적소에 착 붙는 언어유희와 취향을 드높이는 태도, 자신의 방식으로 끝까지 개척해 나가는 추진력 등 장점이 많은 사람이다. 윗 세대에서 콩고물 하나 떨어지지 않고, 땅을 아무리 파도 백 원 하나 그냥 나오지 않는 삶 속에서 11년째 그는 자력으로 우리 가정을 지켜왔다. 몸과 마음을 갈아 쓰는 동안 그의 고운 손 발이 지금은 돌아가신 아빠의 손발처럼 되어버렸다. 세럼을 두툼하게 바른 뒤 양손으로 하늘 높이 볼을 쳐올리던 , 출근 전엔 거울 앞에 서서 '아이우에오' 발음 연습을 하던 재수탱이는 사라졌다. 손대는 사업마다 성공신화를 달성할 거라는 그의 드높은 이상은 실패와 회생절차를 거듭하며 '진짜 현실'에 안착했다. 그럼에도 까다로움이라는 무기를 일로 승화시키면서 업계에서 조금씩 자리 잡고 있다. 누구도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내면 해낼수록 그가 애처롭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면 할수록 안쓰럽다. 그를 보고 있자면 어째선지 왕족으로 태어나 모종의 이유로 신분을 잃고 유배지에서 평민의 삶을 시작한 사람처럼, 그런 자의 좌충우돌 제2의 인생스토리처럼. 모든 말투가 "그러도록 하지"로 귀결되는 그의 모든 (오만한) 것이 웃음벨이자 애처로움이자 분노의 씨앗이 된다.
아들이 지난 11월 만 10세 생일을 맞이한 뒤로 아기 같은 맑음이 옅어졌다. 한동안 아이의 성장을 좇아가지 못하고, 양육에 있어서는 낙관적이던 생각에 제동이 걸렸다. 이맘때즘 아이들은 숨 쉬듯 무례한 말투와 뜻을 알지 못하면서 쓰는 '용어'가 난무한다. 시킨다고 말을 듣는 나이도 아니고 감성은 더 풍부해져서 무논리의 말대답도 잦다. 학원을 다녀 본 적도 없고 딱히 하는 것도 없는 애가 고작 20분 하는 복습 앞에서도 "하고 싶은데 안 하고 싶어어어어" 라며 바닥을 기어 다녔다. 코 앞에 장 보러 가는데도 "아아아악 나가고 싶지만 안 나가고 싶어어어어어" 10분째 옷을 입지 않는다. 아이는 남편만큼이나 까다로운 사람인데 두 사람이 닭다리나 폭립을 앞에 두고 대립을 이어나간다. "손으로 먹는 음식은 손으로 먹는 거야" " 그럼 포크는 왜 만든 거야?" 중간에서 "어떤 방법이든 맛있게 잘 발라 먹으면 된 거니까 그만해"라고 해도 "손으로 먹어야만 하는 음식이 있는 거잖아"로 돌아와서 "그럼 왜 도구를 만든 거냐고. 그리고 아빠는 왜 고압적으로 말해?" 그러다 폭발하고 뚜껑이 날아가서 초토화를 시키는 사람은 내가 된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등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아무도 먹지 마. 손 내려. 시끄러워. 말하지 마" 방으로 들어가 화를 식히면 갑자기 둘이 급속도로 친해져서 속닥속닥 거린다. 한 명씩 들어와 두 손을 모은 채 고해성사하듯 말한다.
"엄마, 내가 닭다리 손으로 먹었으면, 삼각김밥 잘 뜯었으면 좋았을 텐데 미안해."
".... (그게 아니잖아)"
"여보, 내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네"
"... (싶네? 연극인가...)"
이런 놈들의 모순점을 찾아내 치부를 찌르고 할 말이 없게 만드는 나는 몇 년 전 개명을 했었다. 이름에 엉뚱한 한자가 들어있었는데, 이 한자 때문에 어린 시절 매년 교무실로 불려 갔다. "보통 '참 진' 자를 쓰니까. 이건 참 특이하다. 누가 지어주신 거야?" 선생님들도 퍽 어려워하던 그 문제의 '진'은 '진압할 진'이다. 이름 뜻대로 흘러가는 삶이 지긋지긋해서 한글이름으로 바꿔버렸지만, 진압해 버리는 숙명은 걷히지 않았다. 이름은 아무 죄도 없고 나의 타고난 직성 때문이었다. '별 일 없이 안온한 하루'만 있으면 나는 양발 세 켤레로로 잘만 사는 사람인데, 더불어 사는 일이 내겐 숙제다. 진압이든 진정이든 사건사고에 놓이고 싶지 않고, 해결사가 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장례식장에서 '문제의 큰엄마'가 염병을 떨면 나가라고 고래고래 소릴질러 결국 자식들 손에 양팔이 끌려 나가게 만들고, 갉아먹는 인연의 끈은 팔뚝만 한 가위 들고 가서 싹싹 잘라버리고, 불법적인 것들 "이 눔입니다~" 죗값치르게 만든다. 세상의 모든 면면을, 사람의 겉과 속을 맨 정신으로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가 다정함 열차를 탈지, 핵폭발 열차를 탈지 정하는 것이다. 제발 '방관' 열차를 만들어달라 청했지만 뇌는 간절한 호소를 듣지 않았다. 올해를 마무리하며 친구가 지어준 나의 별명은 황조롱이. 몸집이 작은 맹금류로 호버링이 특징이다. 황조롱이의 공중정지는 나의 갑작스러운 언행정지(화났음)에 빚대어 설명할 수 있다. 황조롱이는 무리 짓지 않고 혼자 사는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이 녀석 깡밖에 없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몸집이 더 큰 맹금류에게 마구잡이로 들이대거나 버드세이버 스티커에 일부러 들이받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한다. '조롱이'라는 이름도 평소 '비유와 모사'가 '조롱'에 가까워알맞다는 평이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할아버지는 나의 무엇을 보고 '진압할 진'을 붙여 주셨을까. 작고 동글동글한 신생아에게서 어떻게 맹금류의 호전성을 보신 걸까.
모서리로 서기를 쓰면서 드러나는 발톱만큼이나 발버둥 치며 삼키는 설움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끔 알면서도 내 속을 어찌 다스릴까 두렵다. 절대적 불만족이 기저에 깔려 있어 미안함과 동시에 서운함도 뒤따른다. 감정 전이로 부풀어 오르다 밍밍한 온도로 매듭짓는 일은 싫어서 둘러앉은 우리 가족이 귀엽기도 했다. 서로의 모순과 실망을 톺아 보며 그럼 내가 바란 남편과 아들의 모습은 무엇이었는지 점검하곤 한다. 아들의 말에 속상하다가도 이내 열한 살 아이가 그렇게 느끼는 것이 정상 아닌가? 자문하기도 한다. 오래 재어둔 돼지갈비 양념 냄새를 싫어하고, 로션 같은 질감을 싫어하고, 젖은 소매를 제일 싫어하는 사람들. 불호가 많다는 건, 호에 대한 선명함을 가진 것이다. 이상이 높고 호의 지속성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이다. 칠판에 '좋은 건 알아서 할지니 싫어하는 것 하지 않기'라고 썼다. 햇살을 억지로 몰아낸 것처럼 갑자기 어둑해진 오후, 미팅 자료를 한 아름 안고 먼 출근길에 나선 남편의 방에 들어가 헷갈리지 않을 만큼의 정리를 하고 나온다. 빵빵해진 양말 서랍을 열고 뒤꿈치가 해진 양말을 버린다. 갑자기 놀러 온 아이 친구를 환대하며 점심을 준비한다. 방학 계획표에 그려진 오늘의 계획들은 친구와 놀기로 대체될 것이고, 몇 시간이 지나면 한 두 번은 말다툼을 할 것이다. 놀이터를 지나칠 때마다 욕지거리를 하는 아이들, 무기력하고 적대적인 아이들을 떠올리며 '뭐 하고 노나... 혹시 이 녀석들도...' 신경이 곤두선다. 그때 2층에서 "메가 진화아!!" 소리가 들리자 피식 웃어버렸다.
저녁을 먹으며 아들이 물었다.
"엄마는 아빠의 어떤 점이 좋아?"
"캐릭터가 분명한 게 좋다고 생각해"
"키키킼"
"피너츠 좀 봐. 루시가 그렇~게 심술궂어도 리더의 역할을 맛깔나게 하잖아. 친구들이 찰리 브라운을 끝없이 놀려도 때마다 엄청난 축하와 위로도 해주잖아. 다채롭고 좋아."
"맞아. 제일 어른 같은 라이너스도 가장 아기같이 담요를 끌어안고 있어"
"응 너무도 다르지만 늘 ~"
"같이 있어"
"캐릭터는 이해의 영역이 아니야"
"맞아 원래 그런 거야"
"삐그덕 대고 사는 거야. 리코더 시간처럼"
예민한 것 치고는 참 유머러스하고, 까칠한 것 치고는 참 순하고, 까다로운 만큼 분명하게 수용하는 우리는 오늘도 힘의 반동을 감지하며 외발 자전거를 탄다. 모순을 이용하여 조금은 특별한 결과를 도출한다. 과정에서 온갖 예술의 힘을 빌린다. 전시, 음악, 영화, 책 등 예술은 우리와 불편 사이에서 접착제 역할을 한다. 불안은 서로를 공격하고 드높은 이상은 극심한 박탈감과 완벽주의에 시달리게 했다. 그럴 때마다 피너츠 시리즈 중 <루시의 새해>를 재생한다. 찰리브라운은 거창한 새해 계획을 들고 루시의 상담소를 찾는다.
오늘은 무슨 문제로 왔니 찰리브라운?
올해 초에 지키고 싶은 계획들을 세워뒀었거든 그런데 이 많은 계획 중에서 단 하나도 지키지 못했어.
패배자가 된 기분이야.
기분만 그런 건 아닐 거야 찰리브라운. 내가 한 번 볼게. 이건 문제가 있어.
네가 세운 계획들은 하나같이 다 너무 비현실 적이잖아. 네가 가진 능력에 맞게 기대치를 낮출 필요가 있어.
나의 새해 계획 3번. 세계에서 가장 큰 눈사람 만들기? 이런 건 어때 그냥 눈사람 만들기.
9번도 문제야! 걸작을 그리기라니. 이 부분은 약간의 창의력 발휘하기로 바꾸는 게 좋겠어.
그럼 너무 밋밋해 보이지 않을까.
바로 그거야! 현실에 맞는 계획 한 가지를 세워서 실천하면 그래도 그해는 성공이지!
현실에 맞는 계획 한 가지라고? 좋은데? 이 정도는 누구든 할 수 있겠어! 나도 그렇고!
명심해 평범함 속에 현명함 그런 자세가 필요해!
우리는 매일 실패한다. 매일 나만의 감옥에서 스스로에게 루저라고 말하는 순간이 존재한다. 초단위로 누군가와 비교되는 세상에서 수만 가지 생각과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기를 반복한다. "그래, 내가 좀 예민하고, 아무거나 빨리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옳은 길로 가고 있나? 나라서 가족에게 도움이 안 되는 걸까? 우아하게 존엄이나 외치고 있어서 그런가? 불평불만만 하다가 끝나는 거 아닐까?" 수만 가지 물음과 뒤섞이는 불안이 우리의 그림자다. 남편에게서 아들에게서 같은 그림자를 발견할 때 일종의 유전 같아서 한없이 슬퍼진다. 늠름한 남편의 속에도 저 조그만 등짝에도 폭풍이 치고 있다. 예민하게 서로를 관통하는 것도 친절함과 다정함이 없다면 '침범'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내일 당장 배울 수 있는 깨달음(삼각김밥 껍질 벗기기, 병뚜껑 따기)은 살갑게 챙겨주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대신 큰 덩어리의 깨달음 앞에서는 다가가서 안아주고 싶어도 빠르게 알려주고 싶어도 모른 척해야만 한다. 아프지만 실패하게 두어야 하고 좌절하는 꼴을 뵈기 싫어도 견뎌야 한다. 이 과정에서 남편과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쉽지 않고 육아, 양육은 당장 성적표를 알 수도 없다. 그럴 때마도 루시의 말이 나를 진정시킨다. 평범함 속에 현명함. "그래, 아무리 그래도 나는 내가 좋아. 우리가 좋아. 단 1초도 타인처럼 살고 싶지는 않아. 그럼 됐어. 할 수 있는 걸 하자!"
내년에도 남편이 내게 기대하는 '한 방'은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고, 아들의 딱 한 입 남기는 습관도 계속될 것 같고 더 많은 불합리를 캐치할 것 만 같다. 나의 와잠은 깊어질 것이고 팔자 주름은 나를 울상으로 만들겠지. 그래도 알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틈을 발견하는 사람이기에 '평범함 속에 현명함'을 외치면서 한 발씩 나아가면 조금은 남다른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을. 평범함이란 목표를 삼으면서 내심 특별한 결과를 장담하는 '모순'이야말로 예민한 사람이 나아가는 비법이라는 걸. 우리에게 남은 시간들은 고집스럽기만 한 노인 대신에 '장인'의 모습이기를, 참지 않는 황조롱이 주니어보다는 '섬세한 청년'이기를 바란다. 모든 것에 진심인 것만큼 매력적인 엣지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