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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Dec 28. 2023

스키교실은 데려갔지만

아침밥을 못 먹였어요.

쌀을 챙기고 김치, 멸치, 김도 챙겼다. 체크인할 때 세미취사객실이라 밥솥이 없다고 해서 고객지원실에 따로 요청도 해서 받았다. 다음날 아침을 위한 준비가 끝났다.


자기 전에 밥을 해야 했다. 손에 로션이 잔뜩 묻어있다는 궁색한 핑계로 계속 미뤘다. 내일 아침 스키강습 신청을 위해 줄을 서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 눈곱만 떼고 나가야 했다. 쌀 씻을 시간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은 잤다. 아이 둘을 양쪽에 껴안고. 새벽 6시  알람은 자연스레 껐다. 예약하고 오는 길에 빵이나 햇반을 사 오면 된다고 생각했다. 대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은 있다.


아침 8시 10분에 예약창구 오픈이고, 7시 20분에 도착했다. 앞에 15명이 있었다. 8시가 넘자 번호표를 나눠줬고 또 기다렸다. 9시 30분이 스키강습 시작인데 내가 등록을 마친 시간이 8시 40분이었고, 9시까지 모이라고 했다. 방으로 전력질주했다. 밥은 어쩌나.


이미 배고프다고 전화가 한번 왔다. 첫째 아이에게 딸기를 씻어 먹으라고 했다. 꼭지 딴 딸기를 절반 잘라 접시에 동그랗게 놓은 사진이 왔다. 처음으로 차려 먹게 한 것치고 결과물이 우수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과일을 리스모양으로 세팅한 것을 따라 했나 보다. 기특함은 잠시였다. 어차피 딸기로 배부를 수 없는 아침 식욕을 가진 자매였다.  아침밥을 못 챙긴 데에 후회가 밀려왔다.


 빨리 일어나 일찍 줄 서서 빨리 접수하고 갈걸..


밥도 제대로 안 먹이고 스키수업 보내는 엄마가 다 있냐며 스스로를 좀 부끄러워했다. 첫째 아이는 크로와상을, 둘째 아이는 소금빵을 한 개씩 먹이긴 했지만 마음이 조금도 가볍지 않았다. 아침에 그 난리 생쇼를 해서 스키강습을 시켰으나 밥하나로 의기소침해졌다.


갑자기 어디선가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첫째 아이 친구와 엄마였다. 정신없이 첫째 아이는  수업을 들여보내고 둘째 아이 장비를  준비하고 있었다. 세수는 했는지 눈곱은 없는지 얽힌 머리는 어찌 보일지 신경 쓸 틈도 없었다. 둘째 아이도 마저 보내고 그 채로 같이 차를 마시러 갔다. 양치는 하길 잘했네.


그 엄마와 같이 온 일행의 아버님과 동석했다. 그 아버님은 아내와 딸의 스키강습을 위해 연차 쓰고 운전기사하러 따라왔다며 워킹맘이 휴가기간에 혼자 아이 둘을 데리고 온 것에 자못 놀랬다. 옆에 친구 엄마도 대단하다고 추켜세워줬다.


큰 틀에서 남들 보기에 아이들을 위한 활동을 많이 하는 엄마는 맞지만 디테일이 참 떨어진다. 스키장 헬멧이 아닌 다른 헬멧을 가져왔고, 귀마개가 없어서 직전에 급하사다 날랐고, 아이수업을 마치기도 전에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되었다. 즉 사진도 못 남겼다.


그래서 오늘은 밥을 했느냐. 그냥 내일 새벽에 더 빨리 나가서 1번 번호표 뽑고 햇반 사 와야겠다. 오늘도 그럴듯한 계획을 세우고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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