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첫차는 10년이 다 되어가는 옵티마였다. 작은 아빠가 차를 바꾸며 쓰던 차를 주셨다. 사회초년생은 준중형차가 대세였던 시절이었다. 반짝이는 새 차는 아니었지만 나름 중형차였다. 첫차가 중형차면 운전하기 불편하지 않냐고 지나가는 친구의 부러움 섞인 핀잔도 있었으니 충분히 과분했다. 마침 출퇴근하는 직장이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어려워 차가 필요하던 시기라 더운밥 찬밥 가리지 않고 감사했다. 그 친구는 몰랐다. 우리 엄마의 차가 다마스였던 것을. 그저 내 취업과 자차소유가 시샘이 났겠지. 서울로 발령받으며 그 차는 엄마에게로 갔다. 다마스의 상태가 좋지 않았으나 고쳐가며 쓰시던 터였다. 서울 생활을 하며 차와 운전에 대한 미련은 없었고 대중교통 이용을 당연하게 여기며 지냈다.
남편의 자동차는 연애 시절부터 엄마 차였다. 바로 시어머니 소유의 산타페였다. 결혼해서도 이 차를 쭉 사용했다. 결혼 전 SUV에 익숙하지 않던 나는 치마를 입고 올라타기 불편한 이 차가 마뜩잖았다. 다만, 운전병 출신에 운전을 잘하고 좋아하는 남편이 참 편했다. 결혼 후, 애 낳고 엄청난 짐을 소화해내는 것으로 보고, 애들 어릴 때는 무조건 SUV만이 답이다는 것을 깨달았다. 딱히 승용차를 타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미 높은 차체에 적응했기 때문에.
자동차와 운전에 거리가 먼 채 살았던 내가 급하게 차를 샀다. 복직을 했고 첫째 아이가 차로 라이딩을 해야 하는 어린이집에 가게 되었다. 어머님이 등하원에 쓰실 차가 필요했다. 어차피 시내 운전 용도였기 때문에 경차로 한정했다. 2년간 육아휴직을 쓰고 외벌이로 살았던 우리 집에 경차 외에 답도 없었다. 스파크와 모닝 중 빨리 출고되는 스파크로 정했다. 어머니가 딱 6개월 쓰셨다. 둘째를 임신하는 바람에 다시 육아휴직을 쓰게 되었다. 이후 스파크는 나의 고마운 발이 되었다. 첫째 아이 휴직 때 차 없이 남편 따라 연고 없는 곳에서 지방 살이 하느라 정적인 생활을 했다. 둘째 아이 때는 달랐다. 서울도 한달음에 다녀올 정도로 생활 반경이 넓어졌다. 차가 작아 운전과 주차에 부담이 없어 경차예찬을 입에 달고 살았다.
복직했다. 대중교통으로는 답이 안 나오는 곳에 발령받았다. 더 넥스트 스파크 2017년형을 타고 출근했다. 운전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근무하면서 우연히 팀원들 차종을 알게 되었다. 미혼의 남자 대리를 제외하고 모두 외제차였다. 차가 두 대인 집도 둘 다 외제차였다. 우리 집 은 20만 킬로를 넘게 타서 겨울이 되면 시동이 잘 안 걸리는 산타페 그리고 스파크였다. 이제 복직했으니 바꿀 여지가 있었느냐. 전혀 아니었다. 영끌 아파트의 전세금 반환을 앞두고 있었으니. 어차피 바꿀 수 없는 현실이라 아무렇지도 않았다. 외제차 비율에 놀라긴 했지만 괜찮았다. 난 현실 파악과 인정이 빠르니까. 그 차로 점심 먹으러 직원들과 맛집도 다녔고, 퇴근길 카풀도 했다. 당시 하루살이처럼 육아와 일을 해 나가던 시절이라 차를 바꾸고 싶은 생각조차 뇌에 자리잡지 못했다. 아, 나 팀장 아래 선임책임자였는데.
첫째 아이 초등학교 육아휴직을 했다. 이번엔 엄마들 차종이 눈에 들어왔다. 보이는 족족 외제차였다. 벤츠, 벤츠, 레인지로버, 볼보, 볼보. 나는 세컨카니까 괜찮다고 하기에 우리 집 패밀리카는 쏘렌토였다. 6개월을 기다려 받은 차였다. 제발 겨울 전에 출고되길 간절히 바랐던 차. 차를 바꾼 뒤 남편이 어찌나 내 차를 무시하던지. 차 바꾸는 꿈을 그때부터 꿨다. 차 크기는 그대로면서 남편 차보다 비싼 차를 사겠노라고 말했다. 물론 입으로만. 바꿀 여유 따위는 전혀 없었다. 내 마음이 살랑살랑 거리는 것쯤이야 현실이 꾹 눌러줄 수 있었다. 내 차로 동네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차만 봐도 누구 엄마인지 아는 사람들과 유리창 너머로 꼬박꼬박 인사하고 다녔다. 이제 와서 바꾼 들 무슨 의미랴.
또한 어떤 물건들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매월 고정지출을 발생시킨다. 자동차는 소유하는 순간 주유비와 세금이라는 고정지출을, 더 큰 냉장고는 더 많은 전기세를, 5평 넓은 집은 그만큼의 관리비 부담을 선물한다. 뭔가를 새롭게 소유하기 전에 매달 고정지출이 추가로 발생하지는 않을지, 그 지출을 내가 부담할 수 있을지 따져보아야 한다.
<심리계좌, 이지영 지음>
이렇게나 차에 관한 한 허영이 없는 나에게 크나큰 도전이 다가왔다. 이번에 복직하며 출퇴근길이 달라졌다. 우리 집도 사무실도 초역세권. 차를 가져가면 오히려 힘든 길이다. 스치듯 차의 처분을 고민했으나 당장 일과 생활의 적응에 치여 생각도 멈춰있었다. 그러다 가볍게 읽던 책이 나를 툭 쳤다. 차와 헤어질 결심을 해야 했다. 작년, 엄마들의 외제차에 치여 만족스럽지 못하게 질질 끌고 다녔던 차. 혼다 차와 부딪혀 그 차는 살짝 찍히고, 내 차만 보험으로 최고 수리비를 지불하여 안전을 위해 차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게 한 차. 점점 나와 마음이 멀어진다고 생각했다. 주 5일 동안 집 앞에 서 있을 것이고, 주말에도 주로 멈춰있을 나의 자동차. 한 달간 주행거리가 과연 얼마나 될지. 움직일 일이 있을지. 대부분의 답을 알고 있는 나는 아직도 헤어질 결심이 안되었다. 헤이딜*로 중고차 매도가격을 조회하면서 동시에 주행거리를 따져 보험료를 청구한다는 캐* 자동차보험을 알아봤다. 남편의 차를 운전하는 일은 부담스럽고 버거웠다. 차가 있어서 가볍게 갈 수 있는 장소들이 나의 생활 반경에서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불편함을 감수하면 된다고 큰소리치던 어린 날의 나는 어디에 있는지. 언제쯤 ‘마침내’로 마침표를 찍게 될지 궁금했다. 저 책의 다음 문장은 이렇게 시작했다.
‘가장 악성인 고정지출은 바로 부채이다’
네. 그 부채도 많은 사람이 자동차 하나를 지지부진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