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정열적인 스페인 남부의 보석들, 말라가 그리고 론다
2018.7.5~11 스페인 남부, 알카 에데사/지브롤터/말라가/론다 여행기
숙소 앞에 펼쳐진 지중해 해변은 두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오른쪽은 온 가족이 다 함께 즐길 수 있는 해수욕장. 왼쪽은 말로만 듣던 Naked Beach. 첫날, 친구가 저기 보라며 가리킨 곳에 아빠, 엄마, 아이 세 가족이 단란하게 나체로 물놀이를 즐기고 있어 흠칫했었지요. 친구가 시도해보고 싶냐 물어봐서 시기상조라며 한사코 거절을 했는데, 오늘은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아침 일찍이라 사람도 거의 없었지만 해가 벌건 가운데 옷을 벗기는 부끄러워 바다에 먼저 덤벙 뛰어들어 상의를 벗어 친구에게 던져주었습니다. 우와! 자유다! 내친김에 하의까지 탈의. 그것은 ‘언론의 자유’보다도 방대한 자유였습니다. 그렇게 친구와 발가벗은 채 깔깔 거리며 지중해를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친구는 저에게 “내가 여태까지 봐온 네 모습 중에 가장 행복해 보인다.”라는 감상평을 남겼지요.
오늘은 말라가와 론다에 가는 날. ‘말라가’는 워낙 관광지로 유명하기에 기대가 컸습니다. 차를 타고 한 시간쯤 달렸을까. 말라가로 진입하기 직전, 세상 아름다운 풍경을 스쳐가고 시내로 입성. 문제는 주차장을 찾기 어려웠다는 것, 아니 사실대로 실토하자면 구글 지도를 보고도 길을 못 찾는 저의 ‘길치’ 능력치가 늘 그렇듯 화근이 되었습니다. 렌터카에 내비게이션이 없어 친구가 운전을 하면 제가 대신 갈 길을 알려주어야 했는데, 저는 한국에서도 누군가의 조수석에 앉아본 적이 손에 꼽기에 이는 저의 능력 밖의 일이었습니다. 30분을 뱅뱅 돌다가 드디어 주차장에 입성. 뜨거운 날씨에, 주린 배에 이미 지쳐 에너지를 채우러 바로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드디어 맛보는 그 유명한 스페인의 빠에야. 매콤한 해물리조또 같은 맛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문어 샐러드였는데, 제 입맛엔 비린맛이 살짝 있었습니다.
배도 든든하게 채웠으니 이제 히브랄파로 성으로 올라갑니다. 너무 더워서 아주 조금만 올라갔는데도 땀이 흘러내렸습니다. 조금 올라갔더니 말라가 도시 전체의 전경이 아주 선명하게 보입니다. 해변, 항구, 투우장까지. 서로 으쌰 으쌰 해가며 드디어 성 앞까지 도착했는데 성에는 입장료가 있었습니다. 과연 입장료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고민하다 친구도 저도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성 밖에서 조금 더 있다가 내려가서 아이스커피나 한 잔 하기로 결정했지요. 한국에서는 굳이 방문하지는 않았던 스타벅스가, 여행만 나오면 이렇게 반갑습니다. 유럽에서 아이스커피를 찾기가 너무 어려운 탓입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더위를 식히고 다시 차에 올라 이번에는 론다로 향합니다. 론다로 이동하며 시야에 들어오는 황토빛깔 산 중턱의 풍경이 무척이나 이국적이라 이동 그 자체로도 여행 같다고 느껴졌습니다.
드디어 론다에 도착. 론다는 정말이지 첫눈에 반해버렸습니다. 노랗고 하얀 작은 건물들. 소박하다. 아담하다. 예쁘다. 감탄만 터져 나왔지요. 딱히 목적지를 정해놓지 않고 그저 걸었습니다. 가게에 걸려있는 하몽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그냥 스페인 거리의 분위기를 한껏 간직하려 노력했습니다. 걷던 길에 한 화실이 보여 구경하다가 아주 힘차보이는 투우사의 허벅지가 그려져있는 그림을 하나 샀습니다. 스페인 남부지역은 투우 경기가 아주 활성화된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헤밍웨이 산책로를 걸으며, 명사들의 이름이 붙은 거리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고도 생각할 정도의 아늑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을을 다 둘러보고 누에보 다리로. 그리고 누에보 다리를 더 잘 보기 위해 더 밑으로 내려갔지요. 누에보 다리는 아주 웅장했습니다. 협곡에 놓인 이 다리는 장장 40년 동안 지어졌다고 합니다. 예전에 어학원 친구 중에 건축가가 되고 싶다는 안달루시아 출신 청년이 있었는데, 이 장관을 보니 그의 장래희망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녁은 간단하게 먹자고 그리 다짐했건만. 저희는 론다에 푹 빠져 이 저녁을 가장 특별한 저녁으로 만들자며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그래서 누에보 다리가 가장 잘 보이는 호텔의 레스토랑으로, 아주 큰 마음을 먹고 입성했지요. 마침 딱 두 테이블이 남았다고 합니다. 경치며 분위기며 다 좋았는데, 한 가지 단점은 태양이 너무 가까이 있어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 내내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론다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소꼬리찜 요리와, 해산물을 빠뜨릴 순 없어 오징어 요리를 주문했습니다.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저희 앞에 한 커플이 앉습니다. 남자가 잠깐 밖으로 나가더니 뒤에 꽃을 숨겨서 돌아옵니다. 친구가 “어? 프로포즈하는 거 아니야?” 하는 순간, 남자가 무릎을 꿇고 여자에게 반지를 내밉니다. 이내 여자는 승낙했고, 남자는 “She said yes!”라며 저희를 안심시킵니다. 미드나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라 그저 신기했지요. 완전하게 낯선 이들이지만 절경을 바라보는 시공간에 함께 착석해있음에, 최선을 다해 박수를 쳐주며 행복하기를 빌어주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끝낸 후, 다시 누에보 다리 밑으로 내려가 그토록 뜨겁던 태양이 떨어지는 순간을 포착하려 노력했습니다. 론다에서의 석양이 너무 아름다웠던 탓인지, 아까 본 커플의 약혼 성사 때문인지. 결혼을 하게 된다면 론다에서 하면 참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밤 10시가 되어서야 밤이 됩니다. 슬슬 론다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론다에서 별장으로 돌아가는 길은 너무 구불구불 험해 운전을 하는 친구도 길을 알려줘야 하는 저도 잔뜩 겁을 먹었습니다. 둘 다 초집중 상태로 저는 구글 지도를, 친구는 운전대와 유리창을 응시해야만 했지요. 드디어 무사 도착. 이제 스페인에서의 일정은 이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두 발로 열심히 땅을 밟아가며 색다른 건물의 풍경이나 옆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들으며 여행지를 기억에 새겼던 이전 여행들과는 달리 별장 안에서, 마트에서, 혹은 바다에서 뜨거운 스페인의 산물들을 정적으로 흡수하고 있던 나날들이었습니다. 아쉬운 마음은 언제나 그렇듯 길들일 방도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