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깔끔 정갈함의 정석, 루체른
2018.7.11~14 스위스 루체른, 인터라켄 여행기
벨기에 친구와는 말라가 공항에서의 작별과 더블린에서의 재회를 고하고, 저의 오랜 단짝을 만나러 스위스로 향했습니다. 경유지인 마드리드까지 어김없이 지연됐지만, 다행히 취리히까지의 비행기도 함께 지연되었습니다.(경유 비행기를 무사히 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드디어 취리히 공항에 안착. 입국심사가 없어 뭐지? 의아했지만 아무튼 가볍고도 빠른 발걸음으로 출구로 나와 급한 일을 해결하고자 화장실로 직행하려는 찰나 누가 척! 어깨를 붙잡는 겁니다. 뭐야 누구야. 친구였습니다.(친구와는 비행기 시간 격차가 커, 루체른에서 만나기로 했었습니다.) 기차 시간이 오래 남아 공항을 전전하고 있었다 합니다. 동영상을 찍으며 깔깔깔 웃는 친구의 모습은, 일 년 반 만에 보는 것임에도 전혀 반갑지 않았습니다. 마치 어제 집 앞 놀이터에서 본 것 같은 이 익숙함은... 좋은... 감정인 거겠지요...?
배가 고파 공항에서 아무 샌드위치나 비싼 돈을 주고 사 먹고는 친구를 먼저 기차역으로 보냈습니다. 스위스에서 스위스프랑으로 환전을 해야 한다는 걸 스페인에서 흥청망청 놀다가 떠올려서 급한 대로 공항에서 €50만 환전을 했습니다. 스위스 프랑이 유로보다 단위가 낮아 53프랑 하고도 동전 몇 닢을 받았는데, 뭔가 우수리까지 얹어 돈을 거슬러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딱 한 달 전부터만 열리는 스위스의 기차 예약 시스템은 탑승 시간을 지정해서 구매하면 아주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취리히에서 루체른까지 단 돈 9프랑!) 비행기가 지연될 것을 고려하여 2시간 뒤의 기차를 예매해두었더니 시간이 남아돌아 역에 있는 COOP 구경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음대로 골라 담을 수 있는 LINDT 초콜릿을 발견하고는 신나게 퍼 담았습니다. 이윽고 탑승한 스위스의 기차는 무지하게 조용하여 초콜릿을 까먹는 것조차 실례처럼 느껴졌습니다. ‘소리 없이 강하다’ 기차 편이라고나 할까요.
스위스에 오자마자 3G가 터지지 않았습니다. 친구와 엇갈리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는데 친구는 이 넓은 루체른 기차역에서도 용케 저를 찾아냈습니다. 우선 숙소로 찾아갔습니다. 청정 구역 스위스라 청결 문제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숙소가 무진장 더러웠습니다. 돈 좀 아껴보겠다고 저렴한 곳에 예약했더니 이런 결과가. 베드 버그의 악몽이 다시금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이미 9시라 더 늦기 전에 루체른의 저녁을 구경하러 나섰습니다. 카펠교로 향하는 길은 무척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이었습니다. 월드컵 시즌이라 늘어선 펍마다 축구 중계를 해주고 있었습니다. 한참 구경을 하고 사진을 찍다가 맥주를 마시러 고르고 고른 자리에 착석.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물론 늘 전화로 얘기하여 다 아는 얘기지만, 얼굴을 보고 더 자세히 얘기하고,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지요. 마침 제가 좋아하는 모드리치의 크로아티아가 이겼습니다. “We won!!!” 소리를 지르는 크로아티아인들을 지나치며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베드 버그가 두려워 숙소의 불을 켜고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친구의 짐 부피를 덜어주고자 이른 아침부터 쌀국수를 끓여 먹었습니다. 6시에 인터라켄으로 넘어가는 일정이라 루체른 역에서 캐리어를 맡기고(한 명당 10프랑이라는 살인 물가) 본격적으로 루체른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첫 구경은 빈사의 사자상이었는데, 생각보다 꽤 큰 조각이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때 퇼르리 궁을 사수하다 전멸한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런 역사를 알고 보니, 죽어가는 사자의 표정이 더욱 처절하게 느껴집니다. 지금 제 옆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는 이 친구는 워낙 오랜 벗이라 서로의 가족들끼리도 다 아는 사이입니다. 친구와 스위스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하니 아빠가 고급 정찬이라도 함께 사 먹으라며 용돈을 두둑이 보내주셨습니다. 살인적인 스위스의 물가에 쿱 샌드위치로 매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아빠의 딸 사랑은 무한사랑입니다.
트립어드바이저로 맛집을 탐색하며 거리를 배회하다가 푸짐하게 보이는 런치 세트메뉴가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침 식당에서는 요들송 공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송아지 크림소스 요리, 돼지고기와 닭고기 퐁듀와 감자튀김을 주문했습니다. 세트 하나당 거의 6~7만 원의 거금이었지만, 아빠의 내리사랑 덕에 부유한 중국 관광객처럼 여유롭게 식사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감사해요! 사랑해요!) 요들송이 끝난 후에는 전통 춤을 보여주더니 갑자기 웬 소가 레스토랑을 뛰어다니며 친구에게 돌격해왔습니다. 갖가지 공연이 있어 식사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할 틈이 없었지요. 치즈 퐁듀는 약간 알코올 맛이 강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럭저럭 괜찮은 맛. 이어서 샐러드, 음식들이 차례차례 나왔습니다. 잡내를 걱정했던 송아지 고기는 매우 부드럽고 풍미 있었습니다. 돼지고기와 닭고기는 요리가 되어 나오는 건 줄 알았는데 기름이 팔팔 끓는 통을 따로 주어 꼬챙이에 꽂아 직접 튀겨 여러 가지 소스에 찍어먹는 것이었습니다. 튀긴 돼지고기와 칠리소스의 만남은 마치 탕수육을 연상시켜 저로서는 만족이었지요. 후식으로 나온 스위스 국기 모양의 예쁜 아이스크림은 저희의 감탄을 육성으로 자아내게 만들었습니다.
비싼 식사로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무제크 성벽으로 걸어갑니다. 더운 날씨에 언덕길이라 금방 금방 지치긴 했지만 둘이라 그런지 또 잘도 몸을 일으켜 시계성을 다 둘러보았습니다. 요만한 거 하나에 깔깔깔 웃다가 또 갑자기 진지한 얘기를 하다가, 의식의 흐름대로 대화하고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친구와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창 걷다가 루체른이 다 내려다보이는 벤치에서 시간을 보내고 역으로 가서 캐리어를 일단 찾았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문제는 갑작스레 정체를 알게 된 ‘Official guide book'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책자 안에는 Lindt 초콜릿 4개를 무료로 받을 수 있는 쿠폰이 숨어있지요. 역 안의 가게에서 받으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로이스강을 건너 한참을 걸어야 있는 가게에서 받아야 한답니다. 다음 기차까지 남은 시간 35분. 저희는 그 땡볕에 초콜릿 여덟 조각을 받아보겠다고 캐리어를 끌고 뛰기 시작했습니다. 겨우 닿은 상점 앞에 길에 늘어진 줄. 결국 포기하고 다시 뛰어 역으로, 목이 마르니까 음료수까지 사고, 딱 2분을 남겨둔 채 기차에 탑승했습니다. 타고 나서야 고작 초콜릿에 이게 무슨 짓이냐며 깔깔깔 웃기 시작했지요.
인터라켄행 기차는 ‘골든패스 라인’이라는 수려한 이름이 한 치의 과장도 보태지 않았음을 증명해주었습니다. 널찍한 창문으로 지나가는 풍경들. 기차가 아주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음에도 이 풍경만큼은 아주 느리게 제 시야로 걸어 들어와 주었습니다. 두 시간여를 달려 인터라켄 동역에 도착. 융프라우 VIP 패스를 사고(‘동신항운’이라 한국 사무실이 따로 있는 헤맸는데 그냥 매표소로 가시면 됩니다.), 역에 있는 COOP에서 맥주 두 캔을 사 숙소까지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맥주도 마시고 중간에 앉아서 쉬기도 하며 아주 천천히 숙소에 도착. 이 곳은 완전 캠핑장 베이스 같은 곳이었지요. 침대가 깨끗해 보이지 않아 조금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베드 버그는 없었습니다. 이미 저녁이 찾아와 오늘은 이대로 잠자리에 듭니다.